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42)화 (142/234)

“널 싫어하는 사람을 왜 좋아하고 잘 보이려고 했어? 변태니?”

“그러게요. 애증인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전 대화를 다시 곱씹고 나니,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졌다. 생각지도 못한 유안나의 이면과 진실을 보고 나니 몹시 혼란스러웠다.

게다가 아나타와 유안나의 대화만으로 섬의 비밀을 전부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직 풀리지 않은 문제도 있었다.

로하데 가문과 신전, 그리고 제나스는 어떤 관계인가.

또, 차원의 문은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가.

제나스의 오두막에 있던 ‘문’은 무엇인가.

스스스-

그때, 어깨에 감겨 얌전히 있던 은지가 혀를 날름거렸다. 덕분에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나 난 코끝에 이상한 냄새가 감도는 것을 곧바로 감지했다. 돌벽에 텐타티오넴 독초가 가득했던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나는 들고 있던 양초로 문 옆의 벽을 살펴볼 수 있게끔 불을 밝혔다. 환각 속에서 보았던 대로 붉은 꽃들이 빼곡하게 피어 있었다.

압도적인 비주얼에 나는 그만 숨을 삼켰다.

그 순간, 노란 꽃 수술의 일부가 코로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기침이 나오고 말았다.

콜록.

그 바람에 벽면을 빼곡하게 채운 꽃에서 노란 수술 가루가 확 퍼졌다. 엄청난 양의 꽃가루였다.

“제기랄!”

루제프가 가져왔던 한 송이 꽃만으로도 심한 부작용을 겪었는데, 이렇게 많은 꽃들이라니.

나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유안나는 여기서 대체 어떻게 버틴 건지 모르겠네.

이미 머릿속이 혼곤해지고 있었다. 온몸이 뜨거웠다.

‘괴로워.’

지난번에 겪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시 겪은 것의 몇 배에 달하는 고통이 밀려왔다.

아득히 정신이 멀어진다. 아니, 정신이 멀어진다기보단 미치광이처럼 돌아 버린 것 같았다.

온몸에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손발이 덜덜 떨렸다. 발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끓어오르는 용암에 던져져 서서히 녹아 가는 고철처럼 느긋한 고통에 실성할 것만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괴로워하며 남아 있는 정신 한 가닥을 간신히 붙잡고 있던 중이었다.

“여기 있었구나?”

어디선가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건 어린 소년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나는 다급하게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에 옷자락 같은 게 잡혔다.

“도……와줘…….”

이어서 나를 끌어안는 손길이 느껴졌다.

살결이 몸에 닿자 지독한 갈증이 밀려왔다. 나는 갈증에 허덕이는 사람처럼 갈급하게 그 손길에 매달렸다.

“이대로 있어. 제발…….”

신체접촉만으로는 부족했다. 더 강력한 자극이 필요했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

텐타티오넴에 중독된 것이라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농후했다. 정말로 죽을 수 있을지도.

누구든 제발 도와줘.

* * *

늪지대를 ‘무사히’ 건너는 방법 따위는 없다. 아스달과 유안나는 늪지대를 건너는 것을 벌써 몇 번이나 실패하고 후퇴했다.

북섬으로 가는 다른 방법을 찾고 싶었지만 출렁다리가 끊어진 이상, 길은 이곳뿐이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 같은데. 먹은 게 없으니 힘도 나질 않는군.”

아스달은 흙바닥에 주저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그는 힘없이 늘어졌다. 이제는 걸을 힘도, 말할 힘도 모자랐다.

사냥을 할 줄 알면 뭐 하나. 그도 유안나도, 사냥감을 손질할 줄은 모르는데.

“방법이 없을까요?”

유안나도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늘 여유로운 모습만 보이던 여자가 한풀 기세가 꺾인 얼굴로 우울한 빛을 띠자 아스달도 덩달아 착잡해졌다.

마거릿과 다른 일행의 생사도 불분명한 데다 북섬으로 건너가지도 못하고 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부디 마거릿이 살아 있어야 하는데.’

시간이 제법 흘렀기에 아스달도 여유를 잃고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늪지대라고 하나 나무가 많아. 땅을 밟지만 않으면 건널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또한 쉽지 않겠지.”

나무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아닌 이상, 다른 나무로 옮겨 가며 이동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유안나가 무언가 생각이 난 얼굴로 손뼉을 마주쳤다.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계획을 설명했다.

설명을 들은 아스달은 유안나가 원래 어딘가 미쳐 있다고 생각했지만, 제 생각보다도 더 단단히 미친 여자였다는 걸 깨달았다.

“마물을 늪지대로 유인해서 그것들을 밟고 지나가자고? 그거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는 거 알고 하는 소린가?”

“전 목숨 따위 아깝지 않아요. 제가 미끼가 될게요.”

유안나는 굳은 결심이 어린 얼굴로 말했다.

아스달은 복잡한 심경으로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수상쩍은 데가 있는 것은 여전했지만, 확실히 유안나는 마거릿 일행이 강에 빠진 이후로 변했다.

마치 다른 사람처럼.

이 섬에 있으면 다들 다른 사람처럼 변모하는 걸까. 마거릿도 그러더니, 이젠 유안나마저…….

아스달은 머리를 헤집으며 고개를 저었다.

“성녀님을 미끼로 던져 두고 나 혼자 살아남으면, 남은 생은 끔찍한 죄책감과 함께 살아가겠군. 내가 못나긴 했지만, 인간의 긍지를 저버릴 정도의 얼간이는 아닐세.”

아스달이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옷가지를 정리했다. 그러곤 유안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하려는 게 뭔지 자세히 말해 보게. 협조하지.”

* * *

제나스는 벙커로 향하며 콧노래를 불렀다.

나머지 피실험자들에게 불신의 씨앗을 심어두고 왔으니 저의 할 일은 그것으로 끝났다.

“마지막 실험이니까.”

확실히 해야지.

느릿하게 중얼거린 제나스는 가볍게 걸었다. 이제는 마거릿이 무얼 하고 있는지 지켜보러 갈 차례였다.

‘마지막으로 본 곳이 지하 샛길이었던가.’

쥐 형태를 한 마물의 눈을 빌려서 그녀의 위치를 파악해 두었다. 정문으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그도 오래전에 잊어버린 샛길을 통해 들어갈 줄은 몰랐다.

제나스는 즐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재미있어.”

천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다.

특이한 물건과 독특하고 다양한 글자를 사용하는 다른 차원의 세계. 그 세계로 향하는 차원의 문을 여는 실험을 수천 번 시도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차원의 틈으로 사람이 지나가는 데 성공한 적은 없었는데…….

대체 어떻게 온 건지, 어디서 온 건지, 본래의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드디어 성공이 눈앞에 있네.”

그저 사람이 달라진 거라고 설명하기엔 마거릿은 애매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다른 차원의 사람이었다니.

제나스의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보낸 마거릿이 그에게 ‘벙커’에 관해 물은 적이 있다.

여타 지도와 달리 그녀가 갖고 있는 지도에는 다른 세계의 글자로 ‘bunker’라고 적혀 있었다. 그게 ‘벙커’라는 이름을 가진 지하창고라는 걸 알아보는 제국인은 없을 텐데 말이다.

‘의외로 허술한 부분이 있단 말이지. 귀엽게.’

제나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우거진 덤불 사이를 헤치고 지나가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아나타의 마력으로 움직이는 오두막이 아니라면 그는 마력을 사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직접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게 여간 수고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너저분한 나뭇가지와 이파리들을 치워내고 나니 이끼가 잔뜩 낀 평평한 돌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문처럼 보이지 않았으나 숨겨진 문고리가 있었다. 제나스는 문고리에 패여 있는 열쇠 구멍을 한번 살피고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간단히 문을 땄다.

그렇게 들어간 지하에서 그가 발견한 건, 아나타의 마법진 위에 쓰러져 있는 마거릿이었다.

캬악.

그녀의 옆을 지키고 선 하찮은 뱀 한 마리가 그를 보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은색 비늘을 가진 작은 뱀이었다.

“아 그래, 너. 궁금했었어.”

조그만 뱀이 심기가 매우 불편하단 듯이 꼬리를 바닥에 팡팡 내리쳤다.

제나스는 팔짱을 낀 채 작은 뱀을 노려봤다. 붉은 눈동자가 샅샅이 뱀을 훑고 지나가자 녀석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는 소심하게 눈치를 보더니 마거릿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다가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숨겼다.

“마물은 맞는데.”

다른 마물들은 눈을 빌려서 보는 게 가능했는데, 이 녀석만 그게 불가능했던 이유.

“각인을 했네.”

마물이 인간한테 각인을 하다니.

재밌다. 역시 마거릿은 재밌어.

제나스는 천천히 마거릿이 쓰러진 마법진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곤 작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괴로…워.”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마거릿이 고통에 찬 신음을 뱉었다. 텐타티오넴에 중독이 된 것이 확실해 보였다.

제나스는 조용히 그녀의 발치에 떨어진 책 한권을 주웠다. 책의 겉면엔 <생존보다 중요한 것>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간은 아나타가 이곳에 마법진을 그려둔 이유를 알 수가 없어 방치를 해뒀다. 그런데 그 사이 마법진을 발견한 마거릿에 의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모양이다.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제나스는 마법진 위로 넘실거리는 마력의 잔재를 발견했다.

“마법진이 발동을 했던 모양인데…….”

이대로 뒀다간 다른 누군가가 남은 마력을 훔쳐 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차라리 내가 흡수해야겠군.

그는 곧 쓰러져 있는 마거릿의 아래 그려진 마법진에 손을 얹었다. 기하학적인 문양 위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새어 나온 빛은 제나스의 손 안으로 스며들었다. 쭈그려 앉은 소년의 몸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열두 살 소년의 몸을 하고 있던 제나스는 어느새 이십대 후반 즈음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목 언저리에서 찰랑이는 새하얀 은발, 날카로운 눈매와 그 안에 자리 잡은 붉은 눈동자는 초점이 서서히 돌아오며 차갑게 빛났다.

“하아. 개운하군.”

그의 육신은 온전하지 않다. 그래서 육체를 보호하기 위해 평상시에는 어린아이의 몸을 하고 있어야 했다. 그 상태로는 일정 수준 이상의 대화도 나누기 버거울 정도였다.

마법진에 새겨진 마력을 흡수하고 금제가 풀린 그는 비로소 성인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흡수한 마력을 다 소진하는 순간 다시 작아지겠지만.

제나스는 나른하게 턱을 쓰다듬으며 바닥에서 연신 괴로운 신음을 뱉어내는 마거릿을 쳐다봤다.

“도……와줘…….”

그녀가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움켜잡았다.

제나스는 흥미로운 눈을 하고 그녀를 구경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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