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요.”
그녀들을 불러 보았지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미동도 없다.
횃불로 주변을 밝히고 나니, 한쪽 벽면을 빼곡하게 메운 붉은 텐타티오넴 꽃이 보였다. 저런 게 있었던가? 조금 전까지는 어두워서 벽면까지는 미처 확인해 보지 못했다.
-괜찮니?
은발의 여성이 유안나를 향해 물었다. 유안나는 붉어진 뺨을 하고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텐타티오넴에 중독이 된 모양이다.
은발의 여성은 아무 반응도 없는 걸로 보아 면역이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미안, 저 꽃은 제나스 작품이라 내가 없앨 수 없네. 그런데 열쇠는?
은발 여성의 말에 나는 다시금 붉은 꽃들을 바라봤다. 제나스가 텐타티오넴을 이곳에 심어 둔 건 아마도 저 두 개의 문에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하려는 의도겠지.
유안나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보였다. 그건 남섬의 오두막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었던 것과 같은 모양의 열쇠였다.
유안나가 은발 여성을 향해 물었다.
-정말로 모두를 살려 주시는 거죠?
유안나의 말에 나는 의아함을 느꼈다. 살려 줘? 모두를? 아직 우리 중 죽은 사람은 없었는데?
그녀의 물음에 은발 여성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모두? 너, 플로네 영애와는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어? 영애가 널 시녀 취급했잖아. 살해 시도도 했었고. 나도 다 봤어.
그녀는 아마도 아나타가 맞는 것 같다. ‘나도 다 봤다’는 저 말은 제나스와 마찬가지로 마물의 눈을 통해서 보았다는 말일지도.
게다가 시녀 취급에. 유안나 살해 시도라니. 이건 소설 <생존보다 중요한 것>의 내용이다.
유안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과거를 회상하듯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절 싫어하는 건 마거릿이었죠. 저는 마거릿을 나름 좋아했어요.
-널 싫어하는 사람을 왜 좋아해? 변태니?
-그러게요. 애증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나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다. 자신이 뱉은 말에 거짓은 없다는 듯이. 그녀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귀족들은 모두 앞뒤가 다르고 위선적인 줄만 알았거든요. 그런데 마거릿은 자신의 욕구에 솔직해요. 앞뒤가 똑같더라고요. 그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러면서 금세 능청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텐타티오넴에 중독되어 뺨이 붉어진 상태라서인지 그 모습은 굉장히 고혹적으로 보였다.
이상하게도 마거릿을 향한 유안나의 평가가 지나칠 정도로 후하다.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은발의 여자, 아나타가 유안나에게 물었다.
-너 보기보다 대인배구나?
-제가요?
-너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을 그런 이유로 싫어하지 않는다는 게 신기하잖아.
-글쎄요. 뒤에서 칼을 꽂는 망할 인간들보단, 마거릿이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에요.
유안나는 조금 씁쓸한 얼굴로 뒷말을 덧붙였다.
-과거로 돌아가면 마거릿도,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허무하게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어요.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던 은발의 여자는 그녀의 말을 존중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해줘. 그게 내가 너를 돕는 이유니까.
-…….
-그런 의미에서 차원 너머로 사라진 마거릿의 영혼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 차원의 문은 제나스만이 열 수 있어. 그것도 그냥 열 수 있는 건 아니고…… 실험이 모두 끝난 뒤에, 죽은 이들의 마력을 끌어모아야 가능해. 한두 사람의 마력으로 열리는 문이 아니거든.
이 실험의 목적은, 마력을 모아 차원의 문을 열기 위함이었나? 나는 아나타의 충격적인 말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잠깐, 그런데 차원 너머로 마거릿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뭐지?
-실험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플로네 영애의 영혼만 다른 차원으로 튕겨 나간 건지는 모르겠어. 섬에 결함이 생긴 걸 수도 있겠지. 천 년 동안 실험을 지속하면서 이 섬은 결함이 많아졌거든.
아나타가 ‘Return’이라고 적힌 문을 가리켰다. 이어서 마법진이 그려진 왼쪽 문도 가리켰다.
-그렇다고 차원의 문을 열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야. 네가 그 열쇠로 회귀 게이트를 열면 차원의 문도 열릴 거거든. 마거릿은 그때 내가 데려올게. 제나스는 아직 우리가 결탁한 사실을 모르니까 신속하게 움직여야 해.
유안나가 회귀 게이트를 열었던 거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다시 데려온 플로네 영애는 네가 아는 영애가 아닐 수도 있어. 영혼만 같은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아주 커. 그리고 너도 어차피 지금 생의 기억은 못 할 거고.
영혼만 같은 다른 인물. 그건 이진주인 나를 칭하는 말이 분명했다.
‘그럼 나는 누구야?’
나는 마거릿인가, 이진주인가.
그러니까 나는……
나는…….
계속되는 충격으로 사고가 정지해 버리는 기분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들고 있던 책을 꼭 쥐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 혼자 마력을 사용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마거릿이지만 동시에 마거릿이 아니었기 때문인 걸까.
이어서 유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요. 지금은 모두 죽고 저만 살아남았지만, 과거로 돌아가면 되잖아요. 그럼 살아있는 모두를 볼 수 있는 거잖아요. 그게 중요해요.
하지만 말이 끝나자마자 유안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입을 다물었다. 목울대를 타고 울컥 치밀어 오른 울분을 감추듯이.
-회귀 게이트를 열면 저만 과거의 시간대로 돌아간다고 하셨죠. 그럼 제가 만날 아나타도 과거의 아나타인가요?
-아니, 나는 지금의 나일 거야. 제나스가 만든 오두막은 이 섬의 본체와도 같아서 시간의 흐름에 영향을 받지 않아. 다만, 회귀 게이트를 열면 제나스가 알게 될 거고. 그러면 나는 봉인되어 있을지도 몰라.
-회귀 게이트 같은 걸 만든 이유는…….
-실험에 적합한 피실험자가 모두 죽어 버렸을 때, 처음부터 다시 실험을 되돌리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만든 거였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무한히 반복하려고. ……미안하다.
아나타가 괴로운 표정으로 사과했다. 그녀의 얼굴엔 죄책감이 짙게 깔려 있었다.
-구하러 갈게요. 마거릿하고 같이.
유안나의 말에 아나타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미 제나스와 함께 쌓은 죄가 많은 사람이야, 구원 따윈 받을 수 없어.
아나타가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내려다봤다. 그녀가 손으로 마법진을 톡 건드리자, 마법진에서 빛이 났다.
-너도 마찬가지야. 너, 회귀 게이트 어떻게 여는지 알지? 단순히 열쇠를 사용하는 게 끝이 아니야. 인과율을 어기는 거니, 네 영혼을 담보로 해.
영혼을 담보로 한다고? 나는 놀라서 아나타와 유안나를 번갈아 보았다.
유안나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하기 위해 연신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아나타가 단호하게 말했다.
-영혼을 담보로 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네 목숨을 바쳐야 회귀 게이트를 열 수 있다는 말이야. 과거로 돌아가서 탈출하는 방법을 찾는다고 해도, 모두가 이 섬을 탈출할 수 있다고 해도. 넌 못 나가. 넌 혼자 이 섬에서 죽을 거라고. 섬에 영혼이 저당 잡혔으니까.
-…….
-그런데도 모두를 위해서 시간을 돌릴 거니?
그 말을 듣던 유안나의 코끝이 붉어졌다.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리라.
이윽고 손등으로 대충 눈물을 훔쳐낸 그녀가 울음을 삼키더니, 바닥에 떨어진 <생존보다 중요한 것>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나타. 아나타가 그랬잖아요. 생존보다 중요한 건, 내가 나임을 잊지 않는 거라고. 그래서 지금까지 겪은 일을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거든요. 결국 완성은 못 했어요. 텐타티오넴의 독기 때문에 도저히 못 쓰겠더라고요. 그래도 덕분에 깨달았어요. 난 정말 그간 모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었구나. 내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그땐 반드시 모두를 살려야겠다.
유안나는 이제 완전히 결심이 선 얼굴로 아나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아도 어차피 전 여기서 혼자 죽어야 하잖아요. 그럴 바엔 모두를 살리고 죽겠어요. 저는 모두를 책임질 의무가 있어요.
모두를 책임질 의무.
유안나 혼자 짊어지기엔 너무도 무거운 의무였다.
아나타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차원의 문을 열고 데려온 플로네 영애가 관건이겠네. 그녀가 부디 모두의 희망이 되기를, 부디 돌아간 과거에선 모두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기를…….
아나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바닥에 떨어진 책 <생존보다 중요한 것>을 주웠다.
-이 기록은 내가 마무리해둘게. 이걸 매개체로 플로네 영애를 데려올 생각이거든. 적당히 영애의 흥미를 끌 만한 요소를 첨가해야 끝까지 읽을 것 같으니 그게 나을 거야.
안타깝게도 아나타의 그 말을 끝으로 환각이 사라졌다. 환각과 함께 보였던 횃불도 모두 사라지고, 마법진에서 흘러나오던 빛도 소거되어 있었다.
어두컴컴한 지하에 나는 그렇게 홀로 서 있었다.
나는 <생존보다 중요한 것>이 어쩌면 유안나의 기록용 노트일지도 모르겠단 의심을 했었다. 시작은 그게 맞았지만, 결론적으론 아나타가 나를 낚기 위해 양념을 첨가한 소설이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본 환상 또한 소설 속 내용 따위가 아니라, 회귀하기 전에 아나타가 마법진으로 남겨둔 기록일 것이다.
이제야 모든 게 들어맞는 기분이다.
그래. 어쩐지 ‘소설’ 속의 유안나의 성격과 실제 그녀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했다.
‘소설’과 다르게 마물이 나타나던 것도, 유안나의 머리맡에 열쇠가 떨어져 있던 것도 회귀의 영향이겠지.
머릿속이 새하얬다.
오도카니 서 있는 것 말고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아나타라는 존재와 그녀가 내뱉은 정보에 대해서 생각하는 건 둘째 문제였다.
마거릿도, 이진주도, 그 누구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린 나.
영혼을 저당 잡혀 자발적 시한부 인생이 되어 버린 유안나.
내가 지금까지 봤던 유안나는 회귀 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의식중에 반영된 과거의 잔재가 남아 있었을 것이다. 내게 되도 않는 소리를 하던 것도, 주도권을 원했던 것도 그 영향이었겠지.
충격적인 진실 앞에서 머릿속이 뒤엉켰다.
사실 잘 모르겠다. 그녀의 희생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내가 감히 그걸 이해한다 말할 수 있을까?
왜 그녀가 백 년 만에 나타난 대단한 신력을 보유한 성녀인지. 신은 왜 그녀에게 그런 성스러운 힘을 준 건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