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40)화 (140/234)

나도 은지를 따라 방 안을 차근히 살펴보았다.

선반 위에는 통조림이 쌓여 있었다. 과일 통조림과 옥수수, 참치 통조림, 그리고 햄 통조림도 있었다.

난 반가운 마음에 그것들을 집어 들었다.

꼬르르륵. 며칠 굶었더니 배에서 요란을 떨었다.

감동으로 눈물이 날 뻔했지만 우선 통조림의 유통 기한을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유통 기한을 확인해서 뭐 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를 모르는데.”

하지만 내가 마지막으로 한국에 있었던 날짜를 감안해서 보면 유통기한은 아직도 3년 이상 남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우연의 일치일지는 모르겠지만, 꼭 나와 비슷한 시기에 이 섬으로 넘어온 것들 같았다.

원작 속 유안나는 통조림 캔을 따는 법도 몰라 음식을 먹지 못했을 게 분명하다. 이 방을 정리한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그 또한 이것들을 먹는 법을 모르는 듯 보였고.

“벙커에 뭐가 있어?”

“식량이랑 생필품……?”

“지금도 먹을 수 있는 것들이야? 부패되지 않았을까?”

“먹을 수 있을걸? 나는 음식이 필요 없어서 내버려 뒀어.”

아니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제나스는 분명 벙커에 식량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나타가 한글을 읽을 줄 안다면 통조림에 쓰인 글씨를 읽고 이게 생필품인지 알았을 수도 있겠지.

어찌 됐든 배가 몹시 고팠던 나는 일단 이걸 먹기로 했다.

통조림을 열어 그것들을 허겁지겁 먹고 있으려니 울컥 눈물이 났다.

‘에녹이랑 카이든에게도 이 맛을 맛보게 해 주고 싶은데.’

다른 통조림도 맛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나머지는 에녹, 카이든과 나눠 먹는 게 좋을 것 같다.

나는 선반에 있는 생필품 중에서 작은 배낭 하나를 꺼내 그곳에다가 통조림을 담았다.

티슈와 구강 청결제, 양초도 챙겨 넣고 과도로 보이는 칼도 넣었다. 더 챙길 만한 게 있나 둘러보았지만, 안타깝게도 더는 없어 보였다. 지난번에 발견한 것 같은 수류탄 더미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나는 찬찬히 방 안을 둘러보다가 한쪽 구석에 놓인 깔끔한 침대를 바라봤다.

‘눕고 싶다.’

침대에서 자 본 게 언제인지 생각도 나질 않는다.

생각해 보면, 제나스의 오두막에도 침대는 있었다. 3층 방에 있는 침대들이 정갈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는데도 나는 굳이 1층 바닥에서 자야 했다.

“아니 잠깐, 제나스는 해먹에서 잤잖아.”

이 망할 XX.

나는 제나스를 떠올리며 잠시 이를 갈다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조심스레 침대에 앉았다. 잠깐만 앉아 보는 거다, 잠깐만.

이불은 없었지만, 침대는 굉장히 푹신했다. 매트리스 좋은 거네. 나는 침대에 앉아 닫힌 방문을 바라봤다.

‘응? 근데 내가 방문을 닫은 적이 있던가?’

기억이 나지는 않았지만, 그랬나 보다. 밥 먹는 데 정신이 팔려서 기억을 못 하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슬그머니 다리를 뻗고 누워 봤다. 우리 집에 있던 매트리스보다 좋은 것 같아서 한번 비교해 보려는 거다.

바닥에 있던 은지가 꼬물꼬물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왔다. 그러고는 내 머리맡에 똬리를 틀더니 하품을 했다. 녀석도 많이 피곤했던 모양이다.

꾸벅꾸벅 졸던 녀석이 눈을 감는 걸 보고 있다가 나도 함께 졸음이 밀려와서 그만 그렇게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 * *

오랜만에 부드러운 침대에서 세상모르고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어렴풋이 이진주로 살아가던 시절의 꿈을 꾸었다. 존재감 없고 사회에 어울리기 힘들 정도로 겉돌던 시절.

사람들 속에서의 내 존재감은 항상 희미했다. 마치 이 거대한 사회 속에 버려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단체 생활에 최적화된 걸 스카우트 강사 일도 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나라는 사람을 제대로 봐 주거나 기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진주? 아……. 진주 씨, 우리 부서였지.”

어렵게 취업한 캠핑 회사에서도 이상할 정도로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었다. 내가 주요 프로젝트를 담당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늘 그게 궁금했다. 왜 다른 사람들처럼 어울릴 수 없는 걸까. 마치 내가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중에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주운 소설 <생존보다 중요한 것>.

무언가 나와 본질이 통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런 이상한 끌림 같은 게 있었다.

길에서 그 소설을 줍게 된 그날은 조금도 특별할 것 없는 날이었다. 그러나 특별할 것 없는 그날에 주운 그 책은 아주 많이 특별했다.

책이 떨어진 보도블록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진 동그란 원이 그려져 있었고 그 문양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발현되고 있었다.

문제의 책은 바로 그 위에 놓여 있었다.

‘그래. 이제야 생각났어.’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신기한 현상이었는데 어떻게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바닥에서 발현되던 빛은 내가 책을 주워 드는 순간 사라졌다. 마치 그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내가 난데없이 길에서 소설을 읽게 된 연유는 그랬다. 그 순간 당장에 그 책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책 내용이 궁금했었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책을 완독한 순간 떨어지는 간판에 머리를 맞고 비명횡사했었지.

그때 그 책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건 분명 마법진이었던 것 같은데.

‘마법진……?!’

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코앞에 있는 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새하얀 은발에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진 여자가 내게 바짝 얼굴을 대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으아아아악!”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을 쳤다. 머리맡에서 자고 있던 은지가 화들짝 놀라서는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침대 위에 앉아 벽에 바짝 기대고 주변을 훑었다. 그러나 내가 조금 전 보았던 여자는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뭐지?”

의아한 얼굴로 침대에서 내려와 방 안을 훑었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방문이 열려 있는 걸 발견했다.

‘내가 방문을 열고 잤었나?’

아닌데. 분명 자기 전에 방문은 닫혀 있었다. 나는 소름이 끼쳐서 그만 열린 방문을 쳐다보며 굳어 버렸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그 여자, 은발에 붉은 눈이었어.’

외향으로는 로하데 가문의 사람과 일치했다. 게다가 여자라고 하면, 카이든이 제나스의 오두막에서 봤다던 아나타일 가능성도 있었다.

‘잠깐, 아니. 아니야. 카이든의 말에 의하면 아나타는 제나스의 오두막에 산 채로 봉인되어 있는 상황이었어. 이곳에 나타날 리가…….’

나는 머리를 싸매고 이 이상한 현상에 대해 고민했다.

생각해 보면 제나스의 오두막에 있을 때도 나는 지금처럼 유령을 봤다. 검은 옷자락을 가진 의문의 누군가가 나를 제나스의 방으로 이끌지 않았던가.

마물에게 붙잡혀 제나스의 오두막 밖으로 끌려 나갔을 때에도 ‘안식의 방’ 창문으로 의문의 그림자를 봤었다.

아나타가 봉인되어 있다는 그 ‘안식의 방’에서 말이다.

혹시…….

아나타가 봉인된 상태로 육체와 영혼을 분리시킨 뒤 자신의 영혼을 다른 장소에 보내는 걸까?

제나스의 눈을 피해서 다른 사람에게 뭔가 메시지를 전하려는 거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다.

하지만, 안식의 방에 봉인되어 수호신이나 다름없게 되었기 때문에 제나스의 오두막 영역에서는 그런 게 가능하다고 쳐도 이곳은 오두막과 굉장히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

스스스-

은지가 내는 소리에 나는 문득 고개를 내려다봤다.

발밑에 있던 은지가 나를 흘끗 보더니 꼬물꼬물 열린 문을 향해 기어갔다. 그러고는 다시 나를 보고 열린 문을 바라봤다.

나가 보자는 뜻 같았다.

“그래, 일단 나가 보자. 우선 짐부터 챙기고.”

나는 크로스백을 메고 생필품과 통조림을 넣은 가방도 등에 짊어진 뒤, 은지와 함께 방을 나왔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건 의미가 없어서 아래층을 다시 살펴보기로 했다. 어제 무서워서 내려 가 보지 못했던 그 아래층 말이다.

“그런데 벌써 이 지하에 온 지 이틀이 흐른 건가?”

하늘을 볼 수 있는 창이 없으니 하루가 지난 건지 이틀이 지난 건지, 시간관념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에녹과 카이든은 날 찾고 있을까?’

어쩌면 몇 번 찾는 시늉을 하다가 포기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이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를 찾을 이유가 없을 테니까.

카이든은 마력 조절법에 대해 파악하고 있으니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는 게 가능했고 에녹도 이제는 폭주를 완벽히 제어할 수 있었다.

그러니 두 남자에겐 더 이상 내가 필요하지 않다.

“그건 조금 서운하네.”

가슴이 조금 시린 느낌이었지만, 애써 무시하고 나는 계단을 내려갔다.

해골들이 벽을 뚫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을 지나 더 아래로 향했다.

돌벽에는 계속해서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돌벽 곳곳에 ‘알레아’라는 글자가 새겨진 걸 발견했다.

지금까지 제나스의 손길이 닿은 곳엔 모두 알레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니, 이 벙커가 그에 의해 만들어진 건 확실한 것 같다.

어느덧 계단이 끝나고, 나는 평평한 바닥에 섰다.

맨 아래층은 횃불이 없어서 어두웠다. 나는 가방에서 양초와 라이터를 꺼내, 양초 심지에 불을 붙였다.

방처럼 네모난 공간 끝엔 두 개의 문이 있었다. 오른쪽 문엔 ‘Return’이라는 글자가, 왼쪽 문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문을 향해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몇 발자국 뗐을 때였다.

갑자기 발밑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네모난 공간 가운데엔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고 어느새 나는 그 위에 서 있었다. 발밑엔 조금 전까지 보지 못했던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어? 이건…….”

소설 <생존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나는 책을 주워들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낡고 두꺼운 게 내가 예전에 읽었던 그 책과 흡사했다.

그 순간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며 빛이 뿜어져 나왔다. 눈을 제대로 뜨기가 어려울 정도로 강렬하고 환한 빛이었다.

한참 뒤 빛이 소거되고 시야가 온전히 돌아왔을 때, 나는 다른 장소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장소는 같은데 마치 다른 시간대에 있는 것만 같았다.

두 개의 문,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은 동일했다. 벽에는 횃불이 켜져 있었고 눈앞엔 두 여자가 마법진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은발에 붉은 눈을 가진 여자와 연갈색 단발머리를 한 유안나였다.

잠깐, 유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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