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39)화 (139/234)

“마거릿이…….”

그때, 에녹이 조용히 마른세수를 하며 입을 열었다.

“마거릿이 원래 우리가 있던 동굴로 돌아왔을 수도 있지 않나.”

그 절박한 목소리엔 간절함과 한 줄기의 희망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마거릿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의견에 카이든과 루제프는 조금 회의적이었다.

그들이 기억하는 마거릿의 마지막 표정은 배신감에 가득 차 있었으니까.

“그래도 다시 한번 동굴을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긴 합니다. 조를 나눠서 이동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루제프의 물음에 에녹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고 카이든은 지저분한 흙바닥만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금 그들 사이로 불편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에녹이 답지 않게 욕설을 뱉으며 들고 있던 천 조각을 바닥에 던졌다. 마거릿의 드레스 조각이었다.

그녀의 크로스백에 들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물건이어서, 그들은 이 흔적을 따라 동굴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온 것이다.

“제기랄, 이게 다 쓸데없는 계획 따위를 세운 탓 아닌가.”

이성을 잃은 듯한 에녹의 힐난에 카이든이 그를 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제 탓을 하는 겁니까? 전하께서도 동의하셨던 걸로 압니다만?”

카이든의 말에 에녹이 짜증스럽게 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어 접어 올렸다. 그리고는 손목을 휘두르며 카이든을 도발하듯이 노려봤다. 마치 싸움을 원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탓하는 걸로 보였나? 로드 말대로 나도 그 계획에 동의한 바라 누군가를 탓할 생각은 없었는데, 찔리는 구석이 있나 보군.”

에녹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듯 이를 악물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매우 조급하고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X발, 지금 그걸 말이라고……!”

두 사람은 기어코 서로의 멱살을 쥐고 싸움을 벌였다. 주먹질이 오갔고 거침없이 바닥을 굴렀다.

루제프는 미개한 짐승을 보듯 인상을 찌푸리고는 멀찍이 떨어졌다.

그때 디에고가 나섰다. 그는 한걸음에 에녹과 카이든에게로 다가가 그들을 각각 멀찍이 떼어 놓은 다음 루제프에게 고갯짓을 했다.

“잡으십시오, 주교님.”

디에고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 에녹은 짜증스러운 숨결을 토하며 주먹을 휘두르려던 것을 멈추고 그의 손을 뿌리쳤다.

문제는 카이든이었다. 루제프는 눈치를 보다가 디에고와 함께 날뛰는 카이든을 붙잡았다.

벌겋게 충혈이 된 눈 사이로 머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섬뜩한 얼굴의 카이든이 발악을 하다가 결국 나무에 몸이 단단히 묶였다.

“이거 놔!!”

옷가지를 정돈하며 피 묻은 얼굴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 낸 에녹이 피곤한 얼굴로 카이든을 쳐다봤다.

“괜찮으십니까.”

디에고가 긴장 어린 목소리로 에녹에게 물었다. 피를 본 에녹이 폭주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하는 눈초리였다.

에녹은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다. 폭주는 이제 제어할 수 있어.”

그의 말에 디에고도 루제프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제어가 가능하게 되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에녹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플로네 영애는 찾지 못하신 겁니까.”

눈치를 살피던 루제프가 조용히 물었다.

에녹이 심기 불편한 얼굴로 머리를 헤집었다. 그의 얼굴엔 짙은 절망감이 일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다가 끝내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그의 눈이 붉게 충혈이 되어 있었다.

마거릿이 어디까지 어떻게 그들의 말을 곡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혼자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것만 생각하면 가슴에 돌덩이가 앉은 듯 뻐근했다. 답답하게 목이 막혀와 숨을 쉬기도 버거울 정도로.

“포기해. 못 찾아.”

그때, 누군가가 대꾸했다.

에녹이 대답한 게 아니다. 어디선가 앳된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들 모두 두리번거리며 소리가 들린 방향을 찾았다.

나무에 묶여서 발악하던 카이든이 굳은 얼굴로 나무 위로 시선을 옮겼다.

“너 뭐야. 그런 데 숨어 있지 말고 내려와, XX.”

“미안. 그건 안 돼.”

에녹은 루제프, 디에고와 함께 카이든의 시선을 따라 나무 위로 고개를 돌렸다.

두터운 나뭇가지 위엔 카이든과 같은 로브를 둘러맨 소년이 앉아 있었다.

은발과 적안까지도 카이든과 똑 닮은 그가 다리를 휘적거리며 느긋하게 대답했다.

“여기선 힘을 못 써서.”

“그럼 꺼져.”

카이든의 거친 언행에도 소년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표정 변화조차 없는 그 모습에 루제프와 디에고가 의아함을 느끼는 사이, 에녹은 눈앞의 소년이 일전에 카이든과 마거릿이 말했던 ‘제나스 이그란 로하데’임을 알아차렸다.

“안녕.”

소년이 에녹과 루제프, 디에고를 향해 인사했다. 디에고가 검을 들고 소년을 향해 겨누었다.

“누굽니까?”

루제프가 카이든과 에녹을 돌아보며 물었다. 카이든이 소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꾸했다.

“어젯밤에 얘기했잖아. 이 섬에서 천 년을 산 마법사가 있다고.”

마거릿이 독가스에 중독되고 앓아누운 사이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루제프는 그제야 놀란 얼굴로 소년을 올려다봤다.

소년은 그들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궁금해서 와 봤어.”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리고 여유작작한 태도로 좌중을 훑었다.

그 모습은 맛이 가서 활활 타오르는 분노를 표출 중인 카이든에게 기름을 부었다.

카이든이 몸을 묶은 나무줄기들을 모조리 끊어 내고 나와 소년을 올려다봤다.

“궁금해서 왔다고? 너 XX, 다 보고 있었지? 끌어내기 전에 내려오라니까, 이 X 같은 X끼야.”

“싫어.”

소년이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그는 덤덤한 얼굴로 일행을 훑더니 한숨 쉬듯 느릿하게 말했다.

“재미있는 얘기 해 주려고 왔는데…….”

느리게 걷는 거북이처럼 또다시 말을 끊은 다음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는 그들을 내려다봤다. 마치 신이 인간을 굽어살피듯이.

“……듣지 않을 거야?”

에녹은 팔짱을 끼고 서서 소년을 올려다봤다. 그의 눈썹이 못마땅하게 치켜 올라갔다.

“재미있는 얘기?”

에녹의 물음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엄청 재미있을 거야.”

소년은 한 자 한 자 느리게 말하고는 말을 멈췄다. 그러곤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뒷말을 이었다.

“우리 마거릿에 대한 얘기거든.”

소년의 말에 루제프는 의아함을 느꼈다. ‘우리’라니. 얼핏 드러난 마거릿에 대한 소년의 소유욕이 심상치 않았다.

“너희가 아는 마거릿은 마거릿이 아니야.”

이어지는 충격적인 발언에 모두가 놀라 굳었다. 소년은 그런 반응을 원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마거릿 로즈 플로네 안에 다른 영혼이 들어가 있는 것 같더라.”

지금까지 표정이라곤 없던 무감각한 소년의 얼굴에 꽃처럼 화사한 미소가 걸렸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어두컴컴한 지하라서 더욱이 시간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부스럭거리며 기척을 보이자 옆에 있던 은지가 기어 와 내 팔 위로 얼굴을 올렸다.

나는 녀석을 들어 어깨에 올리곤 차분하게 주변을 다시 살폈다.

지하 무덤에는 더는 알아낼 만한 특별한 무언가도 없어 보였다.

어쩌면 이 해골들이 나를 이곳으로 끌어들인 이유가 이것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저들의 죽음을 알아 달라고.

나는 착잡한 얼굴로 해골들을 위해 기도해 준 뒤, 벽을 꼼꼼하게 훑었다. 빛이 새어 나오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벽을 매만지며 틈새를 확인해보자, 바람이 통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외벽인 게 분명했다.

‘문제는 벽을 부숴야만 한다는 건데.’

조명탄을 쓰는 건 어렵다. 그러다가 천장이 함께 무너지기라도 하면 나까지 그대로 땅에 묻혀 버릴 터였다.

‘어쩌지.’

그렇게 한참 고민을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덜그럭 덜그럭 덜그럭.

등 뒤로 해골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섬뜩해서 뒤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나는 그대로 굳고 말았다.

해골들이 움직여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나를 지나친 그것들이 벽에 쿵, 하고 몸을 들이박았다.

“뭐, 뭐야.”

바닥에 분해되어 쓰러진 해골을 멍하니 쳐다봤다.

뒤이어 달려온 해골들도 연달아 벽에 몸통 박치기를 했다.

순식간에 수십 개의 해골들이 달려와 벽에 부딪혔고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돌벽의 잔해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쿵쿵.

해골들이 쉬지 않고 돌벽에 자신의 몸을 희생했다. 오랜 시간 행위가 반복된 끝에 드디어 벽 한구석이 뚫렸다.

“맙소사.”

뚫린 벽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다. 몸을 숙이고 지나갈 정도로 길이 트였다.

해골들은 그것으로 제 소임을 다했다는 양, 힘을 잃고 와르르 바닥에 흐트러졌다.

“고, 고마워요.”

나는 해골들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들이 내 말을 들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들과 같은 희생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 나를 도왔던 건 아닐까?

나는 뚫린 구멍을 통해 어둑한 지하 공간을 조용히 벗어났다.

외벽을 타고 나오자 횃불이 불을 밝히고 있는 계단이 드러났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좁은 계단이었다.

계단의 양옆은 돌벽으로 가로막혀 있었고 아래로 내려가는 길과 위로 올라가는 길만이 존재했다.

나는 일단 위층부터 살펴보기로 했다.

어쩌면 이곳이 바로 벙커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알레아 섬에서 이런 공간이 있을 만한 장소는 벙커밖에 없었다. 위치도 이즈음이 확실했고.

그렇게 나는 일자로 곧게 뻗은 좁은 계단을 찬찬히 올라갔다. 그리고 금세 위층에 도달했다.

계단의 왼쪽으로 복도가 있었고 복도 끝엔 문이 하나 있었다. 나는 계단에 멈춰 서서 그 복도를 보다가, 다시 계단 위를 바라봤다. 한 층 더 올라갈 수 있는 것 같았다.

‘일단 끝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올까?’

결국 문은 열지 못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밖으로 나가는 통로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옅은 기대를 품고 계단의 끝까지 올라갔다.

예상대로 계단 끝엔 외부로 통하는 듯한 문이 하나 있었다.

문제는 단단히 잠겨 있었다는 거지만. 안에서도 열 수가 없는 구조라 난감했다.

그때 문득 유안나가 가진 열쇠가 떠올랐다. 그걸로 밖에서 열어야 하는 문인 걸까? 내가 샛길을 통해 들어오긴 했으니 이곳이 정식 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럼 나, 갇힌 건가?’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긴장과 두려움이 밀려왔지만 애써 침착하게 상황파악을 했다.

‘우선 아까 아래층에 방이 있었잖아. 거길 살펴보자.’

나는 다시 계단을 내려와 아까 보았던 아래층 방문 앞에 섰다. 문 뒤에 방이 있는지는 확실치 않았으나 왜인지 그럴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잠겨 있는 건 아닌지 문고리가 스르륵 돌아갔다. 나는 천천히 문을 잡아 당겼다.

방 안은 어두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점이 어쩐지 더 섬뜩해서 나는 방문을 열고 잠시 심호흡했다.

‘어쩌지. 불을 밝혀야 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방 안에 화르륵 불빛이 일었다.

“아 씨, 깜짝이야!”

나는 화들짝 놀라 문에 바짝 붙었다. 벽 곳곳에 달려 있던 홰에 불이 붙은 모양이다. 이 섬에 있으면 정말이지 심장이 남아나는 일이 없겠다.

“역시 마력이 맞았어.”

이 벙커(로 추정되는)에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소설에서 읽었던 그대로 방 안에는 현대의 물건들로 가득했다.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방엔 침대와 소파, 책상이 있었고 옷들이 즐비하게 걸린 행거와 먹을 것과 생필품이 가득한 선반이 있었다.

1인용이라고 했지만, 에녹과 카이든 루제프를 데려와도 문제없이 지낼 수 있을 것 같은 규모였다.

대체 이런 방을 누가, 왜 만든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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