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녹이 한쪽 무릎을 꿇고 마거릿 앞에 앉아 그녀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들을 세심하게 정리해 주며 물었다.
“독가스에 중독되었다고? 그럼 상당히 위험한 것 아닌가.”
“그때 증상과 같다면, 시간이 해결해 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휴식을 취하면 회복이 되는 것 같더군요.”
루제프의 말을 들으며 카이든 또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번엔 그들의 관심사가 디에고에게로 돌아갔다.
“아, 디에고 경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처 소독도 모두 끝냈으니, 회복만 하시면 됩니다.”
루제프의 말에 이번에도 안도하며 그들은 두 환자를 동굴 안에 잘 눕혔다. 그러곤 동굴 앞에 모여 앉아 불을 피웠다.
에녹은 불을 피우고 그 앞에 앉아 장작을 더 넣었다.
에녹의 옆에 앉으며 루제프가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디에고 경과 불침번을 서던 와중에 갑자기 어디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군. 아나콘다의 서식지도 아닌데, 갑자기 아나콘다 무리가 무언가를 찾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걸 발견했어. 그리고 그중 일부는 우리와 마주치는 순간, 갑자기 진화했다.”
에녹은 차분하게 간밤의 일을 설명했다.
“결계를 보지는 못하는 것 같았는데, 귀신같이 결계를 향해 움직이는 것 같더군. 마치 어떤 ‘기운’을 감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에녹이 그런 말을 하며 덤덤한 얼굴로 마거릿을 돌아봤다. 루제프가 그를 따라 마거릿을 쳐다봤다.
“마물들이 유달리 플로네 영애께 공격적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녀 때문에 마물이 몰려드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요. 아무래도 그녀가 가진 마력 때문인 것 같습니다만,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루제프의 질문에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에녹과 카이든은 말이 없었고 타닥타닥 타오르는 장작 소리만 공기 중을 맴돌았다.
한참 뒤에 카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현재 가장 유력한 이유는 확실히 마거릿이 가진 마력밖에 없지. 전에도 의문을 표하긴 했지만, 마거릿 혼자만 마력을 갖고 있는 것도 굉장히 의심스러웠어. 나도 처음엔 마거릿의 탈을 쓴 첩자는 아닐까 생각도 해 봤거든.”
“그럴듯한 말이군요. 확실히 플로네 영애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변했으니까요.”
루제프의 말이 끝나고 카이든이 한층 더 목소리를 낮췄다.
“따가리, 넌 아직 모르겠지만 이 섬에 천 년을 살았다는 잉그람 왕조 시절의 대마법사가 있거든. 그 마법사가 나한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하더군. 때가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마거릿이 열쇠인 것 같아.”
“천 년을 살았다니……!?”
“목소리 낮춰라, 주교. 마거릿 깬다.”
팔짱을 끼고 얌전히 앉아 있던 에녹이 낮은 음성으로 루제프에게 경고했다. 위압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그의 금안과 눈이 마주친 루제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마도구를 자유롭게 다루는 것도 수상쩍긴 하지. 솔직히 그녀가 말하는 ‘알레아’라는 언어가 동대륙 소수 민족이 쓰는 언어도 아닌 것 같고.”
카이든의 중얼거림에 에녹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녀가 이 섬을 설계한 실험자의 첩자든 아니든 상관없다. 내가 믿는 건 지금의 마거릿이거든.”
그의 말에 카이든이 대번에 불쾌하단 티를 냈다.
“나는 뭐 안 그런 줄 압니까? 마거릿을 생각해서라도 객관적으로 판단해야죠. 중요한 건, 마물들이 마거릿을 노리는 게 정말로 마력 때문인 건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지킬 것 아닙니까.”
그의 대답에 이번엔 루제프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걸 알아낼 방법이 있습니까?”
“그건 지금부터 고민해 봐야지.”
“가장 위험한 사람은 어쩌면 마거릿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가 지켜야지.”
“지키는 건 좋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요.”
루제프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하자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던 카이든이 대안을 내놓았다.
“마거릿의 마력을 일시적으로 봉인시켜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시험을 해 보는 거지. 마력이 없는 마거릿에게도 마물이 모여드는지 보자고.”
“플로네 영애께서 동의하지 않으실지도 모르는데요. 그리고 영애의 마력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필요하잖습니까.”
루제프의 말은 일리가 있었지만, 다 함께 살아남자고 마거릿 개인을 희생시킬 수는 없었다. 카이든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만약 정말 마력 때문에 마거릿이 공격을 받는 거라면, 불편해도 마거릿의 마력은 없는 게 나아. 그동안 마력 없이도 우리 잘 살아남았잖아.”
“없다가 있는 것과 있다 없는 건 다릅니다.”
“야, 따가리. 넌 XX 그래서 우리 마거릿이 위험해져도 좋다는 거냐?”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당연히 아닙니다.”
“그럼 닥쳐.”
그들의 싸움을 중재시키며 에녹이 카이든에게 물었다.
“그런데 마력은 어떻게 봉인시킬 작정인가?”
“왕세자 저하께서 주신 마력 보조구가 마력 방출을 하는 기능도 있지만, 제어를 해 주는 기능도 있거든요. 마력이 몸 안에 봉인된 것처럼 보이도록 반지를 통해 제어해 주는 겁니다. 일시적으로 저희랑 같은 상태로 만드는 거죠. 그리고 마물을 유인해서 시험이 성공적인지 확인한 다음, 마물은 죽이면 됩니다.”
조용히 그의 말을 듣던 에녹이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 어린 얼굴을 했다.
카이든은 그의 답을 기다렸다. 한참 뒤에서야 에녹이 입을 열었다.
“그게 가능한 거라면, 나 역시 로드 말에 동의한다. 일시적으로 봉인시키고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겠군. 마거릿을 위해서. 하지만 그래도 그녀의 의견을 듣는 게 우선이니, 내일 깨어나면 다시 얘기해 보도록 하지.”
에녹의 말에 카이든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거릿도 당연히 동의할 겁니다.”
물론, 그들은 마거릿이 그 대화를 드문드문 듣고 오해를 하고 있었으며, 아나콘다의 독가스에 중독되어 이성을 잃어버렸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 * *
숨쉬기가 곤란했다.
한참을 달리다가 나는 커다란 나무를 찾아 올라갔다. 그리고 그 위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가방끈에 돌돌 말려 있던 은지가 슬그머니 무릎 위로 내려왔다.
어디서 자꾸 역겨운 곰팡이 냄새가 나나 했더니, 내 몸에서 나는 냄새 같았다.
‘X 같네.’
나는 피곤한 한숨을 뱉으며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댔다. 아나콘다를 해치울 때, 문제가 있었나?
두통이 나는 건 어쩌면 이 냄새 때문일지도 모른다. 혼란스러웠다. 이성적인 사고가 어려울 정도로.
터진 감정의 둑이 메워지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내려 진창 바닥에 고이고 있었다. 그 진득한 늪처럼 고인 감정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분이다.
에녹과 카이든이 내게 나쁜 짓을 하지 않으리란 걸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자꾸만 서글프고 서운했다.
다 필요 없고, 그냥 혼자 도망치고 싶었다. 이 힘든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공들여 쌓아 올린 견고한 정신이 낡고 무뎌지며 보잘것없이 허물어지는 느낌이다.
“집에 가고 싶다.”
내 집이 아니라도 좋다. 마거릿의 집이라도 가고 싶다. 어디든, 이 섬만 아니라면 좋을 것 같았다.
언제 어디서든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이 섬이 아니라면, 어디든 좋았다.
에녹과 카이든이라 할지라도 내 생존에 위협이 된다면 필요 없다. 비겁하게도,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모두를 버려도 좋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살고 싶어.’
눈물이 흘러내렸다. 엉엉 울음이 터져 나왔다.
‘죽고 싶지 않아.’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는데, 무릎 위에 앉아 내 눈치를 살피던 은지가 꼬물꼬물 몸을 타고 기어 올라왔다.
그러고는 갑자기 내 목을 무는 것이 아닌가.
“악!”
화들짝 놀라서 그만 나무 아래로 떨어졌다. 높이가 높지 않아서 다행히 큰 부상을 입지는 않았다.
나는 목이 따끔거려서 손을 얹어 보았다. 손에서 피가 묻어 나왔다. 그것도 붉은 피가 아니라 진득한 보라색 피.
“젠장, 이게 뭐야.”
목을 손으로 감싸 지혈하며 나는 나무 위에 있던 은지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은지가 나뭇가지 위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이내 입을 크게 벌리더니, 보라색으로 보이는 가스 같은 걸 뿜어냈다.
남섬에서 아나콘다가 폭발하며 터졌던 독가스와 흡사했다.
“독가스?”
내 의아한 물음에 은지가 펄쩍 뛰며 맞다는 듯이 자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고는 꼬물꼬물 나무를 타고 기어 내려와 이내 영차영차 힘겹게 내 몸을 타고 올라와 목에 감겼다.
녀석은 자신이 물었던 내 목을 자신의 머리로 툭툭 쳤다.
“왜……?”
의아한 얼굴로 묻자 녀석이 다시 바닥에 내려가더니 입을 크게 벌리고 주먹만 한 보라색 가스를 뿜었다. 그러고는 내 몸을 다시 타고 올라와 목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그제야 은지가 하려던 말을 이해했다.
“아. 이 보라색 피가 독가스라는 거야?”
은지가 혀를 날름거리더니 기쁘다는 듯이 내 어깨를 휘감고 뺨에 얼굴을 치댔다.
나는 가방에서 챙겨 둔 붕대를 꺼내 목을 지혈했다. 꾹꾹 누르니 계속해서 보라색 피가 붕대에 스며 나왔다. 붕대에 묻어 나오는 보라색 피가 많아질수록 머리가 차차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조금 전까지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힘들고 괴로웠던 기분도 점차 나아졌다.
“아, 혹시 이것 때문이었나?”
내가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던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