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33)화 (133/234)

동굴 위에 몸통을 기대고 있는 거대한 아나콘다가 내 움직임을 눈치채고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였다.

화아아악!

멀리 있던 은지가 거대한 불꽃을 뿜으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아나콘다가 다시금 그쪽으로 시선을 준다.

멀리서 다른 아나콘다와 고군분투 중인 에녹과 디에고를 보며 나는 무지막지한 두께를 자랑하는 아나콘다의 몸통 위로 올랐다.

비늘이 미끌미끌해서 올라가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놈이 큰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탓에 끝내 무사히 머리 위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아나콘다의 머리 위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에녹을 보며 소리쳤다.

“에녹!! 피해요!!”

정신없이 아나콘다의 머리에 검을 찔러 넣던 에녹이 뒤늦게 나를 발견했다. 그는 빠르게 검을 뽑으며 아나콘다의 비늘을 타고 내려왔다.

나는 디에고가 걸려 있는 머리 부분을 피해 몸통에 조명탄을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푸슈욱-! 펑! 퍼엉!

불붙은 탄알을 직격으로 맞은 아나콘다의 몸통이 박살났다. 놈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비틀어 고통을 호소했고 그 탓에 이빨에 걸려 있던 디에고의 옷이 찢어지며 그가 아래로 추락했다.

디에고의 생사를 확인할 새도 없이 내 발밑에 있던 아나콘다가 움직였다.

제나스가 이 아나콘다들의 눈을 빌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거라면-,

그가 정말로 섬의 설계자라면-,

보여 줘야지.

네가 바라는 게 뭐든 간에 뜻대로 되지 않을 거라고.

“X까. 나는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생각 없어.”

빠르게 아나콘다의 머리를 타고 앞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놈이 입을 벌리는 순간 놈의 아랫니에 발을 걸고 윗니를 손으로 잡은 뒤, 조명탄을 입속으로 조준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퍼-엉!

크와아아악!

아나콘다의 괴성과 함께 머리가 터져 나갔고 나 또한 그 반동으로 날아갔다.

놈의 머리가 터지며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보라색 가스가 퍼졌는데,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켠 탓에 나는 그 연기를 함께 마셔 버렸다.

그러나 바닥으로 추락하는 통에 그런 걸 따질 정신은 없었다.

가까워지는 거친 흙바닥 앞에 눈을 질끈 감은 나를 누군가가 간신히 받아 냈다. 에녹과 카이든이었다.

두 남자가 양팔을 벌려 나를 받아 내고는 놀라서 내 상태를 살폈다. 허리가 좀 뻐근했지만, 그래도 목숨은 붙어 있었다.

디에고가 어떻게 됐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사한 것 같았다.

‘다행이다.’

물론 다행인 건 그들이고 나는 그렇지 못했다.

보라색 연기와 함께 풍겼던 퀴퀴한 냄새가 주변을 감도는 것 같았다. 토할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고 속이 메스꺼웠다.

나는 에녹과 카이든의 품에 안겨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 * *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태양이 작열하는 한낮이었다.

푹신한 나뭇잎 위에 누워 있었는데, 카이든의 로브 자락이 내 어깨 위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몸이 굉장히 무거웠다. 또 몸살이라도 난 걸까. 겹겹이 쌓인 피로로 결국 무너진 듯했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워,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머리도 너무 아파.’

엄청난 두통과 함께 머릿속이 잔뜩 얽혀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정신도 몽롱했다.

어디선가 구린내가 풍긴다.

‘무슨 냄새지?’

분명 기절하기 직전에 맡았던 것과 같았다.

꼭 썩은 곰팡이 같은 냄새인데, 거기다 뿌연 연기 같은 게 공기 중을 가득 메운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다들 잘 있나 궁금해졌지만, 이 구역질나는 두통을 풀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했다. 결국 나는 조금 더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때, 등 뒤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모두들 내 등 뒤로 모여 앉아 있었던 모양이다.

“마거릿, 깼나?”

“아닌 것 같군.”

카이든과 에녹의 목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부스럭거리는 소음과 함께 타닥타닥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도 들렸다.

“디에고 경은?”

“아직 의식은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에녹의 물음에 루제프가 답했다. 디에고가 바닥으로 추락한 뒤,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는데 역시나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다.

일어나서 자세한 사정을 듣고 싶었지만 눈꺼풀도 무겁고 몸도 무거웠다. 잠자코 그들의 대화나 들어야겠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루제프의 물음에 에녹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디에고 경과 결계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나콘다 무리와 마주쳤어. 뭔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다. 이쪽은 원래 서식지도 아니었을 텐데, 진화를 해서 그런지 서식지 구분도 없어 보였고.”

그 말을 들은 루제프가 입을 열었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마물들이 유달리 플로네 영애께 공격적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녀 때문에 마물이 몰려드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고요. 그녀를 탓하는 건 아니고 순전한 의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루제프의 물음에 긴 침묵이 내려앉았다.

에녹과 카이든은 말이 없었고 타닥타닥 타오르는 장작 소리만 공기 중을 맴돌았다.

한참 뒤에 카이든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거릿이 의심스럽긴 하지. 나도 처음엔 마거릿의 탈을 쓴 첩자가 아닐까 생각도 해 봤거든.”

“그럴듯한 말이군요. 확실히 플로네 영애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변했으니까요.”

루제프와 카이든의 말을 들으며 나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나를 수상쩍게 여길 거란 건 당연히 예상했고, 그래서 한때는 혼자 도망가려고도 했었다.

하지만 그간 함께 지내면서 그런 의심을 받을 단계도 한참 지났을 거라고 여겼는데…….

내가 너무 방심했던 모양이다.

루제프의 말이 끝나고 카이든이 한층 더 목소리를 낮췄다.

그 탓에 그들의 목소리가 들렸다가 들리지 않았다가 했다. 대화가 드문드문 끊겨서 흐름을 파악하기 어려워 답답함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때가 되면…… 분명 마거릿이 열쇠…….”

언뜻 들리는 단어들이 굉장히 불길했다.

“마도구를 자유롭게 다루는 것도 수상쩍……. 솔직히 동대륙 언어도…….”

“……가장 위험한 사람은 어쩌면 마거릿…….”

드문드문 들려오는 대화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마거릿의 마력을 일시적으로 봉인시켜…….”

“시험을 해 보는…….”

그리고 이어지는 대화의 흐름은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내가 보아온 이들이 하는 대화가 맞는 건가? 혹시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아니다. 이건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지금껏 내게 무한한 신뢰를 보이던 남자들이 갑자기 수상쩍다고 나를 시험하고 마음에 안 들면 죽인다는 말을 할 리가 없다.

내가 잘못 듣고 있는 걸 것이다, 분명.

“마력은 어떻게 봉인시킬…….”

그러나 이어지는 대화들은 불안감을 더 고조시킬 뿐이었다. 이제는 누가 꺼낸 말인지도 분명치 않을 정도다.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계속해서 썩은 곰팡이 냄새가 코끝에 감돌았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왕세자 저하께서 주신 마력 보조구가…….”

“그리고 마물을 유인…… 시험이 성공적인지 확인한 다음, ……죽이면 됩니다.”

잠깐, 뭐라고?

내가 지금 제대로 듣고 있는 게 맞는 건가? 마물을 유인해서 날 죽이겠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지금?

“……로드 말에 동의……. ……봉인시키고…… 마거릿을……. ……내일 깨어나면…… 해 보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대화가 종결됐다.

그저 잘못 들은 것이라고 치부하고 저들에게 그게 무슨 소리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동안 내 안에 남아 있던 아주 작은 불씨에 조금 불이 붙은 것도 같았다.

‘원작 불변의 법칙’.

이야기가 어떻게 틀어진다 하더라도, 결국은 원작대로 흐름이 진행된다는 법칙이었다.

나는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남주들에게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던 걸까.

‘……아니야, 정신 차려.’

혼란스러웠지만, 내가 아는 카이든과 에녹이라면 그럴 리가 없다. 절대로.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내게 단단한 믿음과 신뢰를 보였던 남자들이다. 그래,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극한의 환경에 내몰려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다면, 순간적으로 판단력이 흐트러질 수도 있지 않나?’

자꾸만 그런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분위기를 봐서 내일 직접 물어보자.’

내가 아는 에녹과 카이든이라면 분명 그게 무슨 헛소리냐며 웃을 것이다. 그리고 걱정 말라며 안아 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나는 조용히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두통은 여전했다. 코끝엔 어제 맡았던 구린내가 계속해서 맴돌았다.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대체 어디서 나는 냄새인 건지 그 진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냥 느낌인가.’

나는 하품을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간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감각이 예민해진 걸 수도 있었다.

‘그래, 어제 내가 들은 것도 모두 꿈이겠지.’

그렇게 치부하려고 했는데, 일행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에녹은 원래 표정만으로 쉽게 속내를 판단하기 어려운 사람이니 넘어간다 치더라도, 확실히 루제프와 카이든은 수상했다.

티가 날 정도로 내 눈치를 살피는 루제프와, 나를 집요하게 관찰하는 카이든, 여전히 눈을 못 뜨고 몸에 붕대를 감은 채 누워 있는 디에고.

지난밤에 들은 대화에 관해 물어볼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마거릿, 몸은 괜찮나.”

에녹이 내게 다가왔다. 그 순간, 굉장한 두통과 함께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리고 나를 보는 에녹의 머리 위로 갑자기 괴상한 뿔이 돋아났다. 그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고 입술이 길게 찢어지며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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