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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30)화 (130/234)

얌전히 장작을 들쑤시던 에녹이 못마땅한 듯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조용히 손을 뻗어 내 눈가를 가렸다.

“마거릿 얼굴 닳아. 그렇게 쳐다보지 말게.”

그렇게 쳐다보는 건, 대체 어떻게 쳐다보는 건데? 어른스럽고 신사적인 에녹도 가끔 아이처럼 유치해질 때가 있었다.

“오해입니다. 며칠간 불 없이 지내다 보니, 반가운 마음에…….”

디에고의 대답에 나는 슬그머니 눈앞을 가린 에녹의 손을 치워 냈다.

그러자 모닥불을 감격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디에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동안 루제프와 다니면서 불도 못 피웠던 모양이다.

“아니, 경은 불을 못 붙여요?”

“직접 불을 붙여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유안나 일행은 불을 피울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우연히 주운 불씨로 생활을 연명했다고 했었지.

“마물 토벌이나 전쟁에 나가면 해 보지 않아요?”

내 물음에 그가 곤란한 얼굴로 뺨을 긁적이다가 에녹의 눈치를 살폈다.

“저는 근위대장으로 특급 승급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에 파견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마물 토벌에서 불을 붙이는 건 부관들의 소임이었습니다. 수습 기사 시절에 해 보긴 했는데, 손에 꼽을 정도여서 지금은 기억도 안 납니다.”

그렇게 말한 디에고는 저가 생각해도 민망했는지 입을 다물고 눈치를 살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영애 옆에서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가르쳐 준다고는 안 했는데.”

“가르쳐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깨너머로 배우겠습니다.”

“귀찮게 하는 건 싫어요.”

“거슬리신다면 눈에 띄지 않게 피해서 지켜보겠습니다.”

“몰래 지켜보는 건 좀 무서운데.”

“……제가 사라지시길 원하셨던 겁니까. 죄송합니다. 눈치가 없어서.”

그러더니 디에고가 갑자기 괴로운 얼굴로 두 손을 모아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표정 변화 없고 제 속내를 잘 털어놓지 않던 인사였는데 이렇게 나오니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루제프와 둘만 낙오된 동안 굉장히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그럼, 조용히 지켜볼 수 있게만 해 주십시오.”

디에고의 말에 난 결국 알아서 하라며 손을 휘저었다.

그사이 에녹은 모닥불 앞에 쭈그려 앉은 내게 평평한 돌을 건넸다. 그러고는 마치 임신한 아내를 보살피듯 나를 살뜰하게 챙겨 앉혔다.

나는 에녹의 고아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상념을 접고 디에고를 돌아봤다.

“그런데, 남섬에 성녀님하고 왕세자 저하께서만 남았다면서요. 괜찮을까요?”

“그건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마거릿 그대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

에녹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를 돌아봤다. 에녹은 아스달과 유안나 따위에는 하등 관심도 없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아니, 선생님들. 그렇게 관심 없다는 듯이 굴면 어떡해요. 유안나에겐 열쇠가 있잖아요. 우리가 남섬에서 그녀와 함께 지냈던 이유가 바로 그 문제의 열쇠 때문이었는데.

게다가 우린 지금 제나스의 말대로 유안나를 찾아보기로 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반드시 무사해야만 했다.

눈치를 살피던 디에고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왕세자 저하께선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성녀님께선 살아남으실 겁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살아남는 데 자신 있다고 하셨습니다. 실제로도 도망치거나 숨는 데 뛰어나시고요.”

뒷골목 출신이어서 생존력이 강한 걸까? 나는 디에고의 말을 어느 정도 납득했다.

스스스-

그때 은지가 혀를 날름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든과 루제프 앞을 기웃거리던 녀석이 내게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내 발밑을 빙글빙글 돌던 녀석이 나를 빼꼼 올려다보며 귀엽게 고개를 갸웃했다.

쿨럭. 갑자기 디에고가 마른기침을 했다. 그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입가를 가리고는 은지를 바라봤다.

‘……맞다, 디에고는 귀여운 걸 좋아한다고 했지.’

은지는 보통 귀여운 게 아니라 우주 최강으로 귀여워서 디에고가 사족을 못 쓸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남섬에서 은지를 봤을 땐 이런 반응까지는 아니었는데. 귀여워하고 싶은 걸 그동안 꾹 참고 있었나?

확실히 이전과 달리 디에고는 긴장이 많이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남섬에서는 내내 기합이 바짝 들어가서는 아무런 표정도 찾아보기 어려웠으니까.

“여기서 또 만날 줄은 몰랐습니다.”

디에고가 은지를 보며 중얼거렸다. 꼭 마치 세기의 짝사랑 상대를 다시 만난 것만 같은 말투였다.

“저한테 각인했으니까 당연히 저와 있겠죠. 새삼스럽게.”

“그렇군요…….”

내가 디에고를 흘끔 보자 은지가 의아했는지 나를 따라 디에고를 쳐다봤다.

은지를 보는 디에고의 얼굴이 좀 전보다 더 붉어졌다. 그는 부끄러운 얼굴로 은지를 보며 쭈뼛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은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은지는 내밀 손이 없을 텐데.

‘혹시 저 인간, 지금 은지가 개인 줄 아는 건가?’

역시나 은지가 제게로 내밀어진 디에고의 손바닥을 흘끗 보더니 다시금 디에고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붉어진 얼굴로 어쩔 줄을 몰라 하던 디에고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서 굳었다. 그리곤 자괴감이 어린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죄송합니다. 이런 모습이 기사로서 믿음직스럽지 않게 보인다는 걸 저도 압니다. 그래서 성녀님과 함께 있을 때는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힘듭니다. 귀여운 걸 보고 참는 건.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나는 디에고의 말을 듣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도로 다물었다.

굉장히 지적할 부분이 많아서 도무지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그때 카이든에게서 나를 떨어뜨려 놓은 루제프가 내 옆에 앉았다.

그러자 카이든도 지지 않고 루제프와 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내가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자, 이번엔 에녹이 나를 갑자기 번쩍 안아 들고는 자신의 한쪽 무릎 위에 앉혔다. 나는 깜짝 놀라서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는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X발, X까. 이러는 건 반칙이지. 나도 여기 앉을래.”

그 모습을 보던 카이든이 에녹의 다른 쪽 무릎 위에 털썩 앉았다. 그러더니 뻔뻔하게 내게로 몸을 기대 안긴다.

루제프는 혐오스럽다는 듯 카이든이 하는 짓거리를 쳐다보고는 우리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앉았다.

“다치기 싫으면 몸 치워라, 로드.”

에녹이 카이든의 등을 노려보며 험악한 목소리로 읊조렸지만, 카이든은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그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던 나는 피곤한 얼굴로 한마디 뱉었다.

“둘 다 비켜.”

카이든이 얌전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에녹도 조용히 나를 놔줬다.

나는 차분하게 옷을 툭툭 털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우리를 지켜보던 루제프가 내게 말했다.

“영애. 이 중에서 제가 가장 정상인인 것 같습니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하십시오. 영애가 불편하지 않도록 제 한 몸 바쳐 봉사하겠습니다.”

루제프가 독실한 신자와 같은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봉사’라니. 네가 제일 이상한 것 같은데.

그래도 에녹과 카이든보다는 루제프 옆이 더 안전할 것 같아서 난 얌전히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루제프는 에녹과 카이든을 향해 보란 듯이 가슴을 펴고 내게 바짝 붙었다.

은지와 눈싸움을 하고 있는 디에고를 보다가 나는 조용히 모닥불로 시선을 옮겼다. 루제프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성녀님이 계신 곳에 가시는 겁니까, 아니면 별 표시가 있던 장소를 찾아가실 겁니까?”

루제프의 물음에 얌전히 에녹 옆에 앉은 카이든이 대답했다.

“거긴 우리가 다녀왔어.”

“네? 벌써 다녀오셨다고요?”

루제프의 외침에 디에고도 놀랐는지 이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카이든이 그간 우리에게 있었던 일을 차례로 설명해 줬다.

이야기를 듣고 놀란 루제프와 디에고가 여러 가지 질문을 했지만 에녹이 모두 답변해주었다.

덕분에 귀찮게 말해야 할 수고를 덜은 나는 얌전히 무릎 위에 앉힌 은지나 쓰다듬어 주었다.

“성녀님을 만나러 갈 거고 가는 길에 보급품을 챙길 거예요.”

“단단히 대비를 해야겠군요.”

내 말을 들은 루제프가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디에고와 루제프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고 했는데 식욕보다는 수면 욕구가 더 강했던 모양이다.

두 사람은 동굴 앞에 잠깐 자리를 잡고 앉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서로 등을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진짜 힘들었나 보다.”

두 사람 앞에 쪼그려 앉아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에녹이 나를 따라 옆에 서서 디에고와 루제프를 내려다봤다.

루제프가 들고 온 가방을 뒤적거리던 카이든이 구급 약통을 꺼냈다.

“가방 무거워서 버릴 줄 알았는데, 기어코 챙겨 다녔네. 다행이야, 약품은 전부 그대로 있다.”

카이든이 구급 약통을 열어 내용물을 살펴보더니 내게 말했다. 어쩐지 루제프를 기특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싸우면서 정이라도 든 걸까?

“우리도 자자.”

카이든의 말에 에녹이 단정한 얼굴로 주변을 훑고는 장검을 챙겨 들었다.

“한 사람은 불침번을 서야 하니, 두 사람은 먼저 눕도록.”

그때, 잠이 든 줄 알았던 디에고가 초췌한 얼굴을 하고 게슴츠레 눈을 떴다. 그러고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와 등을 기대고 있던 루제프까지 화들짝 놀라서 힘겹게 눈을 떴다.

“제가 서겠습니다, 불침번.”

채 눈도 뜨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선 디에고의 모습은 다소 초라해 보였다.

그러나 우리 중 그 누구도 그에게 그러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디에고가 눈치를 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염치없지만 거둬 주신 보답은 하고 싶습니다.”

그 말이 의아해서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저희가 언제 경을 거둬 준다고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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