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29)화 (129/234)

나는 점점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가까워지는 루제프를 발견하고 놀랐다.

“밖에서는 우리가 안 보이는 거지?”

내 물음에 카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안 보여.”

하지만 루제프는 정확히 우리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왔다. 어깨에 커다란 가방을 짊어지고 있어서 무척 힘겨워 보였다.

그는 간신히 결계 앞에서 딱 멈춰 서고는 심호흡을 한 뒤, 뒤따라오는 마물들을 향해 돌아섰다. 우리가 안 보이는 게 맞기는 한 모양이다.

가만 보면 우리 중에 루제프가 가장 운이 좋은 게 아닌가 싶었다. 하필 뛰어와도 우리가 있는 결계 방향으로 뛰어오다니.

그것도 카이든의 바로 코앞에서 등을 보이고 있었다.

카이든은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루제프의 등을 쳐다봤다.

“카이든.”

루제프를 안 데려오고 뭐하나 싶어서 그를 불렀다. 그제야 그가 루제프의 뒷덜미를 잡고 결계 안으로 끌어당겼다.

“으앗! 뭐, 뭐, 뭐……!”

엉덩방아를 찧은 루제프가 카이든을 발견하고 놀란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다.

나는 입술 위에 검지를 가져다 대며 그를 조용히 시킨 뒤, 디에고 쪽을 바라봤다.

디에고는 갑자기 사라진 루제프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는 괴상한 생김새를 가진 마물이 세 마리 정도 따라붙어 있었다.

나는 조명탄의 탄창을 열어 탄알을 확인한 뒤, 장전했다.

“제가 나가 볼게요.”

“절대 안 돼.”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나를 만류하는 카이든에게 단호하게 대답한 뒤, 결계 밖으로 나왔다. 그런 내 뒤를 에녹이 한 치 망설임도 없이 따라오더니 내 옆에 서서 나를 엄호했다.

결계를 지키느라 따라 나오지 못한 카이든이 인상을 가득 찌푸렸다.

나는 일단 카이든을 등지고 갈피를 못 잡고 서 있는 디에고를 불렀다.

“디에고 경!”

그가 우리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이쪽으로 와요!”

내 부름에 그가 잠시 주춤하더니, 곧 이를 악물고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당겨 그 힘을 반동 삼아 결계 안으로 그를 던져 넣었다. 그런 다음 조명탄의 해머를 당겨 내린 뒤, 가까워진 마물들 사이로 조명탄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펑! 퍼엉!

불꽃과 함께 마물들의 조각 난 사체가 사방에 터져 나갔다. 에녹은 나를 끌어안은 채 그대로 결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간신히 세이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에녹에게 고맙다고 전한 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두 남자를 바라봤다.

디에고와 루제프는 정말로 물 한 모금도 못 마신 듯이 아주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파리한 안색으로 주저앉아 있던 루제프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꽃처럼 화사한 표정을 지었다.

팔랑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는 그의 몸짓은, 꼭 나비가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청초하고도 연약해 보였다.

“영애! 무사하셨군요!”

그가 곧장 나를 끌어안았다.

끌어안은 힘만큼은 여느 굳센 남성들과 다를 바 없었다.

몸이 으스러지도록 나를 안은 루제프의 몸은 불안감으로 옅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헙, 숨을 들이켰다가 그의 떨림을 느끼고 놀라서 물었다.

“……울어요?”

“안 웁니다.”

내 등 뒤로 서 있던 카이든은 루제프의 얼굴을 보았는지 박장대소를 했다. 쾌활한 웃음소리가 단번에 무거운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야, 따까리. 너 우는 거 진짜 웃기다.”

“닥치시오, 이 교양 없는 마법사야.”

루제프가 카이든을 향해 험한 말을 하고는 천천히 나를 놔줬다.

나는 그 틈에 루제프의 얼굴을 살폈다. 정말로 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긴 했다. 어쩐지 집 나간 고양이를 찾아 데려온 기분이라 가슴이 찡하고 안쓰럽기까지 했다.

“괜찮아요?”

내 물음에 루제프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서러운 것이 잔뜩 쌓여 둑이 터진 것처럼 몹시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인간 불신을 이야기하던 신의 사제는 깊은 신뢰로 점철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빛에 담긴 직선적인 의미에 조금 놀랐다.

그가 내게 믿음을 표한 적은 더러 있었으나, 이렇게 직접적으로 제 감정을 드러내 고백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서.

‘에녹이나 카이든이면 몰라도, 루제프는 그냥 내가 밥 잘 챙겨 줘서 좋아하는 거 아니었나?’

가만히 내 눈치를 살피던 카이든이 와락 인상을 구기고 루제프를 노려봤다.

“네가 뭔데 우리 마거릿을 보고 싶어 해?”

“당신은 제발 그 입 좀 닥치십시오.”

물론 카이든은 거기서 그칠 남자가 아니다. 그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루제프를 조롱하기 바빴다. 루제프는 화가 잔뜩 치민 얼굴로 카이든의 말에 하나하나 반박했지만 그도 잠시, 끝내 진절머리난다는 듯이 항복하고는 나를 돌아봤다.

이윽고 그는 내 옷차림을 뒤늦게 발견했는지 놀란 얼굴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애, 옷이 왜 그럽니까! 아니, 어디서 만들다 만 옷을……?!”

만들다 말았다니, 원래 이런 옷인데. 말이 너무 심하네.

앞으로 남은 사람 머릿수만큼이나 저런 반응을 봐야 하는 거겠지? 어쩐지 벌써부터 지겨워지는 기분이다.

“주웠어요. 드레스는 도저히 못 입겠어서.”

“네……?! 그게 무슨 말도 안…….”

“우리 마거릿 귀찮게 하지 마.”

다행히도 적당한 타이밍에 카이든이 루제프의 말문을 막았다. 하지만 다시 시작된 유치한 말싸움 2차전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디에고를 돌아봤다.

디에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옷가지를 묵묵히 정돈하며, 그림자처럼 조용히 배경에 녹아 있다.

마치 우리 일행에게 있어 자신이 잘못 끼워진 퍼즐이라도 된 듯, 있는 듯 없는 듯이 그렇게 서 있었다.

“괜찮아요?”

내 물음에 차분하게 서 있던 디에고가 나를 바라봤다.

잠시 내 옷을 흘끔 바라본 그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귓불이 새빨갛게 붉어진 게 보였다.

“죄, 죄송합니다. 보려던 것은 아니고…… 용서를…….”

디에고가 횡설수설하다가 그런 자신이 싫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니, 여기 남자들은 왜 이렇게 다들 숙맥처럼 구는 거지?’

음……. 티셔츠가 좀 얇기는 하지만. 그리고 짧아서 배가 훤히 보이기도 했다.

그때, 에녹이 결계 주변에 마물이 또 등장하지는 않는지 확인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는 갑갑한 듯 한 손으로 셔츠의 맨 윗단추를 과감하게 풀어헤쳤다. 그러곤 턱을 치켜든 채, 다소 위압적인 시선으로 디에고를 노려봤다.

“살아 있었군.”

못마땅한 기색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에녹이 말했다. 마치 디에고가 살아 있는 게 의외라는 듯이.

그간 디에고의 무례한 행동들을 눈감아 주고 있었던 게 아니라는 걸 그 냉엄한 목소리가 증명했다.

디에고는 에녹이 등장하고서야 붉어진 얼굴을 진정시켰다. 그러곤 에녹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였다.

“그간 제 어리석은 행동들은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그저 두 분 모두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절도 있는 동작만큼이나 깔끔한 해명과 속죄였다.

물론 용서 같은 걸 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내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으니.

내가 다소 관망하는 태도로 디에고를 보고 있자 에녹이 한숨을 내쉬었다.

“경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두고 봐야겠지.”

에녹은 가차 없이 대답한 뒤 나를 쳐다봤다. 대화의 주도권을 내게 넘기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차분하게 디에고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에요? 여기까진 어떻게 왔어요? 어쩌다가 마물에게 쫓기고 있던 거고요?”

그러자 찬찬히 자리에서 일어난 디에고가 고단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그가 침착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 세 사람이 강에 빠지고 나서 그들은 강 건너편에 있던 아스달과 사인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북섬 서쪽, 별 그림이 그려져 있던 장소에서 만나자고.

그래서 루제프와 함께 무작정 서쪽으로 향하던 길에 마물과 마주쳤는데, 마물들에게 지능이 있었는지 밤낮으로 루제프와 디에고를 쫓아다녔다고 한다.

덕분에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고 먹은 것도 없이 며칠을 보냈다고.

그 얘기를 들으니 그들이 조금 불쌍해지기는 했다.

‘나보다도 더 험난했잖아?’

제나스에게 거둬진 내 쪽이 그나마 나았나 싶을 정도다.

“그런데 이게 결계인 겁니까?”

카이든과의 말다툼이 끝났는지 루제프가 궁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결계는 투명해서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손을 가까이 대면 푸르스름한 빛을 내며 결계가 작동되는 게 보였다.

바닥에 앉아 턱을 괴고 그런 루제프를 바라보던 카이든이 한마디 뱉었다.

“조심해, 거기 닿으면 저주 걸린다.”

“으악! 저, 정말입니까?”

루제프가 결계 쪽으로 손을 뻗다가 깜짝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그런 루제프를 보며 우리는 짧은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알고는 있었지만, 루제프는 참 단순한 것 같다. 저러니 카이든이 그를 놀려 먹는 걸 즐거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에녹과 함께 모닥불 피울 준비를 했다. 결계 안이라서 연기 걱정은 하지 말라는 카이든의 말에 안심하고 은지를 시켜 불을 붙였다.

불이 타오르자 얌전히 우리가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디에고가 울컥한 얼굴로 나를 봤다. 마치 지난날을 되새김질하는 아이처럼 서러운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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