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28)화 (128/234)

“아마, 디에고 경이랑 있을 것 같군. 남섬에 왕세자와 성녀가 남아 있으니 그들과 만나려고 할 가능성이 가장 클 거야.”

에녹의 말에 카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아니면, 지도에 있던 별 표시가 있는 곳으로 올 수도 있고. 우리가 찾아다니던 그 오두막이 지도상에 별로 표시된 곳이 아닌가 싶은데.”

지도상 별 표시가 있던 곳에 제나스의 오두막이 있다는 건 정확했다.

“길이 엇갈리면 어떡하지?”

“뭘 어떡해. 우린 우리 갈 길을 가는 거지. 어차피 처음부터 우리 일행은 아니었잖아.”

카이든은 아주 태연하게 말했다.

“그렇게 따지자면, 로드도 우리 일행은 아니었는데.”

묵묵히 앞장서서 걷던 에녹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카이든이 울컥하며 자기도 우리 일행이라고 말했고 또 다시 두 남자의 신경전이 시작됐다.

나는 이제 그들의 신경전을 시끄러운 배경 음악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말리는 게 더 귀찮아.’

그렇게 한참을 걷다 보니 체력이 많이 소모돼서 허기가 졌다.

생각해 보니, 제나스의 오두막에서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가는 곳마다 근처에 계곡이 없었고, 급한 대로 열매로만 배를 채웠기 때문이었다.

“카이든, 너는 배 안 고파?”

“응? 아, 그러게. 배고파. 좀 힘들긴 하네.”

카이든은 하루 종일 안개 속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을 거다. 그때 에녹이 걸음을 멈췄다.

“저기 뭔가 있는 것 같군.”

나는 에녹이 가리킨 방향을 쳐다봤다. 낮은 언덕 밑에 사람 높이만 한 거대한 나뭇잎 더미들이 보였다. 꼭 중요한 무언가를 가려 둔 것처럼.

에녹이 움직이려는 나를 가로막고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거릿, 그댄 여기 있도록. 로드?”

“네네, 당연히 마거릿은 제가 데리고 있겠습니다.”

카이든이 뒤에서부터 내 허리를 끌어안고는 어깨에 턱을 올렸다.

그 모습을 보고 에녹이 못마땅한 얼굴을 했지만,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장검을 뽑아 들고 등을 돌렸다.

두 사람 모두 내가 강에 빠져 실종된 이후로 과보호가 부쩍 심해졌다. 하지만 아직까진 불편한 건 없었으니 나는 얌전히 에녹의 말대로 카이든과 서 있었다.

에녹은 천천히 다가가서 나뭇잎을 치워 냈다. 그리고 드러난 장소엔 작은 동굴이 있었다.

“어?”

“뭐야, 누가 여기서 지냈던 모양인데?”

내가 놀라서 외치자 카이든도 고개를 들고 중얼거렸다.

누가 지냈다니. 섬 곳곳에 누군가가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그들이 탈출을 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까.

‘아니면, 제나스가 천년 동안 지내면서 거처를 옮긴 걸 수도 있고.’

에녹이 나뭇잎을 완전히 치워 내고 허리를 살짝 숙여 안을 살폈다. 언덕 아래에 움푹 파여 있는 작은 동굴은 그리 깊지 않았다. 성인 남녀 네 명 정도가 들어가서 누워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허기 때문에 체력 고갈도 심각하니, 오늘은 여기서 회복을 하는 게 좋겠군.”

에녹이 안을 둘러본 뒤에 밖으로 나오며 우리에게 말했다.

“결계를 치고 안에서 자면 괜찮을 것 같아.”

내 말에 두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오늘 하루는 이곳에 짐을 풀기로 했다.

“마거릿, 지저분하니까 잠시 기다려라.”

막 동굴에 들어가려는데 에녹이 나를 가로막았다. 그러고는 카이든과 함께 열심히 동굴 청소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 장면을 다소 신기하게 바라봤다. 마거릿도 물론 귀족이긴 했지만, 에녹은 제국의 황태자고 카이든은 마탑주가 아니던가.

‘청소 잘하네.’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두 남자는 굉장히 청소를 잘했다. 본래가 한 깔끔 떠는 성격들이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동굴 안에 있던 먼지와 흙을 쓸어 내고 누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든 다음, 나뭇잎과 이끼를 깔아 편안한 잠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마거릿, 몸은 괜찮아? 여기 앉아.”

카이든이 살뜰하게 나를 챙겨 안으로 들여보냈다. 누가 보면 내가 부상이라도 당한 줄 알겠어.

“나는 사냥을 다녀오도록 하지. 로드는 여기서 마거릿을 지키는 게 좋겠군.”

에녹이 검을 들고 동굴 입구에 서서 말했다. 카이든이 내 손을 잡고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에녹을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조심하시고요. 낮에도 마물이 나오잖아요.”

내 말에 에녹이 옅은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맞아, 저 괴물 같은 작자는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더라.”

카이든이 마법진을 순식간에 완성하고 마력을 불어넣으며 내게 말했다. 에녹은 그런 카이든을 흘끗 바라보고는 사냥감을 구하러 나갔다.

우리는 동굴 앞을 가리고 있던 커다란 나뭇잎들을 내린 뒤,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어깨에 감겨 있던 은지가 꼬물꼬물 기어 내려와 바닥에 똬리를 틀었다.

“여기는 누가 살았던 곳일까?”

나는 그제야 동굴을 차분하게 둘러보며 말했다. 카이든은 근처에 있는 야자나무 아래서 가져온 코코넛을 단검으로 쪼개던 중이었다. 그가 나를 흘끗 보며 입을 열었다.

“제나스가 살았던 건 아닐까? 그 오두막을 만들기 이전에.”

나는 그에게서 코코넛을 받아 들고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 이전에 다른 생존자가 있었을 수도 있고. 만약 이곳이 정말 실험을 위한 섬이라면. 피실험자로 이 섬에 온 사람이 우리가 최초가 아닐 수도 있는 거잖아. 이 섬은 무려 천년 동안 존재했으니까.”

내 말에 코코넛 수액을 마시던 카이든이 멈칫했다. 그가 섬뜩하단 얼굴을 하고는 나를 돌아봤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계속해서 말했다.

“남섬에 있던 오두막이나, 이렇게 사람이 지낸 흔적 같은 것들은 모두 우리처럼 이 섬에 납치된 사람들이 만든 걸 수도 있고.”

“그럴듯해서 소름 끼치네.”

카이든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답했다.

그 말을 끝으로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각자 생각에 잠긴 탓이다.

‘대체 무슨 실험인 걸까. 목적은 뭘까.’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카이든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그를 돌아봤다.

“있잖아, 마거릿. 어젯밤에 한 말은 농담 아니었어.”

그는 어울리지 않게 차분하고 단정한 얼굴이었다.

“섬에서 탈출하면…… 우리가 지금과 같을까?”

그리고 뜻밖에도 다소 감상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건 늘 내가 그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흔들 다리 효과가 사라지고 일상으로 돌아가 이성을 되찾으면, 모든 게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대답했다.

“내 대답은 똑같아. 나가 봐야 알겠지?”

나는 마거릿이자, 마거릿이 아니다.

섬에서 탈출하면 인과율이 적용되어 죽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앞으로 이 섬에서 어떻게 될지도 전혀 예측할 수 없고.

하지만, 만약 내가 진짜 마거릿이 될 수 있다면…….

“그래도 지금과 같았으면 좋겠어. 모두가 변하지 않고.”

내 말에 카이든이 잠시 놀란 눈으로 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윽고 그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나도 변하지 않은 너와 함께했으면 좋겠어. 지금처럼.”

카이든이 나를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말이 듣기가 좋았다. 그냥 그랬다. 어쩐지 큰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 * *

에녹이 커다란 새를 두 마리나 잡아 왔다. 덕분에 그날 우리는 나름의 포만감 가득한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라이터를 쓸 필요도 없이 은지가 불을 붙여 주니 아주 편리했다.

“마거릿, 편히 쉬어라.”

식사를 끝마치고 자리를 정돈하려는데 에녹이 대뜸 나를 말렸다.

“그래, 마거릿. 좀 쉬어.”

카이든도 에녹의 말에 동의한단 듯이 나를 밀어냈다.

동굴 청소도, 잠자리 마련도, 식사 준비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에녹과 카이든은 내가 힘을 쓰는 건 최대한 하지 않고 휴식을 취하게끔 배려했다.

정작 내내 마물과 싸우고 안개 속에서 고생했던 그들이 더 힘들 텐데도 그런 내색 한 번이 없다.

‘미안하게.’

도움을 줄 게 없나 싶다가도, 그냥 정말로 맘 편히 쉬고 체력 회복을 하는 게 돕는 거겠거니 싶어 마음을 비우고 동굴에 누웠을 즈음이었다.

콰앙--!

한밤중, 어디선가 들린 거대한 굉음에 나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동굴 앞을 열심히 청소 중이던 에녹과 카이든도 놀랐는지 숲속을 쳐다봤다.

“뭐지? 마물인가?”

내 놀란 중얼거림에 에녹과 카이든이 빠르게 각자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들은 내 앞을 가로막고서 숲속을 경계했다.

나는 혹시 몰라 크로스백을 찾아 조명탄을 꺼내 들었다. 은지가 조용히 내게로 기어 오더니 팔에 휘감겼다.

“결계는 아직 무사하지?”

내 물음에 카이든이 흘끗 바닥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 쉽게 깨지지 않을 거야.”

그나마 안심이 됐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 숨을 죽이고 어두컴컴한 숲속을 노려보았다.

아아악!

아주 먼 곳에서부터 남자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작게 들리던 비명은 점차 가까워졌다.

“뭐지, 낯설지 않은 목소리 같은데.”

카이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우리는 곧 낯설지 않은 그 목소리의 정체를 알게 됐다.

어둠 속으로 비춘 달빛 사이로 언뜻 물빛 머리카락이 흩날린 것 같았다.

때가 잔뜩 타서 지저분한 주교복을 입은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루제프 대주교였다.

그는 있는 힘껏 우리가 있는 방향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 뒤로는 디에고가 따라 뛰다가 멈춰서 몰려드는 마물을 상대하고 또다시 루제프를 따라 뛰며 마물을 상대하고 있었다.

“저거, 따까리 아니야?”

“맞는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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