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나스의 오두막에서 주웠어.”
나는 조금 당당하게 거짓말을 했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 최후까지 숨겨 두려고 했던 내 비장의 수가 이렇게 털리다니 조금 가슴 아팠지만.
어차피 가장 조심해야 할 인물인 제나스가 벙커의 위치를 알고 있으니, 감추는 건 소용이 없었다.
“이건 뭐지?”
카이든이 벙커라고 쓰여 있는 표시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나도 정확히는 몰라. 성녀님 지도에서 봤던 보급품 위치가 이 근방이었던 것 같지 않아?”
“그러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옆에 앉은 에녹도 우리를 따라 지도를 보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우선 지도에 표시된 곳이 가장 가깝다는 건 확실하군. 그곳에 먼저 가 보는 게 어떻겠나. 그런 다음 성녀를 찾는 게 좋겠어.”
나는 에녹의 말을 듣다가 불현듯 조금 전 봤던 마물을 떠올렸다. 놈은 꼭 뭔가를 찾는 것 같았다.
‘마물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마물들이 나를 정말 별미로 생각하고 따라다니며 공격하는 거라면,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까지 위험에 노출되는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이 섬의 모두에게 ‘버그’ 같은 존재인 건 아닐까. 내가 있음으로서 모든 인과율이 틀어지는.
‘하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대책도 없잖아.’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뭔가 다른 대책이 생기기 전까지는 역시 다 함께 다니는 편이 좋을 것이다.
‘1년이 지나면 ‘탈출 문’이 열리는 건 맞을까?’
그렇다면 아마 성녀가 가진 그 열쇠가 필요할 것이다.
나는 왠지 그 문이 제나스의 오두막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나스의 오두막 지하실에서 보았던 그 수상쩍은 ‘문’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말을 에녹과 카이든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내가 빙의자며 이곳은 내가 읽던 소설 속이라는 얘기를 해야 하지 않은가.
‘게다가 너희가 원래는 유안나와 그렇고 그렇게 될 사이였다는 걸 어떻게 얘기해!’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안면을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져서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에녹과 카이든이 빤히 내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에녹은 팔짱을 낀 채로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카이든은 재미있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넌 진짜 표정이 다양하다.”
“내가?”
나는 내 뺨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조금 전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괴상한 얼굴을 한 모양이다.
“마거릿, 섬을 탈출해도 나 만나 줄 거야?”
카이든이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나는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고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건 나가 봐야 알지?”
“아, 얼른 섬에서 탈출하고 싶다.”
카이든이 내 말을 듣더니 한숨을 내쉬면서 내 어깨에 머리를 치대며 기댔다.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던 에녹은 생각보다 얌전히 그런 카이든을 내버려 뒀다.
내가 그런 그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는 걸 알아차렸는지, 에녹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이 위에선 조용히 있는 편이 좋겠군. 어차피 오늘은 나무 위에서 밤을 보내야 할 듯하니.”
에녹의 말에 나는 난감한 얼굴로 두꺼운 나무 기둥을 둘러보았다. 성인 남녀 세 명이 올라와 앉아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두꺼운 나무였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내가 부산스럽게 계속해서 꼼지락거리자 카이든이 나무 기둥에 비스듬히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키고는 내게 물었다.
“안아 줄까? 불안하지?”
“그게 더 불안할 것 같은데?”
“이쪽으로 와서 기대. 어제처럼.”
이어서 에녹이 자신의 다리 사이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카이든이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나와 에녹을 번갈아 보다가, 뒤늦게 그 말을 이해하고서 와락 인상을 구겼다.
“아, 제기랄. 그런 거면 마거릿, 오늘은 나랑 자.”
“야. 그거 대사가 되게 이상하다?”
“나랑 자자.”
카이든이 내 허리에 팔을 두르더니 어깨에 뺨을 비비적거리며, 고양이처럼 치댔다. 물론 얼마 못 가 에녹에 의해 제지당했다.
카이든은 에녹에게 붙잡힌 손목을 보며 그를 빤히 쳐다봤고 나를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말없는 신경전을 벌였다.
나는 피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저 내려갈까요?”
“미안해, 마거릿.”
“미안하다. 그댈 불편하게 했군.”
두 남자가 한 치 망설임 없이 빠르게 사과하고 멀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더더욱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한눈팔다가 마물 밥 되기 십상 아닌가?
역시 모두가 살아남으려면 연애할 시간에 생존을!
다시 한번 그런 다짐을 해 보았다.
* * *
에녹이 자리를 내어 줘서 나는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잠이 들었다.
에녹과 카이든은 각기 다른 자세로 나뭇가지에 다리를 묶고 상체만 기댄 채로 잠을 잤다.
어스름하게 해가 떠오르는 느낌에 나는 눈을 떴다.
언제까지 이렇게 마물들을 피해 나무에서 잠을 청할 수는 없었다.
‘마물의 모체를 찾아 마물 소탕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렇게 되면 제나스가 마물의 눈을 빌려 우리를 감시하는 짓도 더는 못 하지 않을까?
내 무릎 위에 똬리를 틀고 잠들어 있던 은지가 졸린 듯이 게슴츠레 눈을 뜨고 고개를 들었다. 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차분히 주변을 살폈다.
에녹과 카이든은 어제 잠을 못 자서인지 오늘은 불편한 자세로도 푹 잠이 든 모양이었다.
나는 크로스백에서 누군가의 일기가 적힌 노트를 꺼냈다. 그리고 다시 찬찬히 노트를 훑었다. 제나스가 돌아올까 봐 오두막에서는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쭉 훑어보기는 했던지라 예상하긴 했지만, 글씨를 너무 흘려 적어서 알아볼 수 없는 메모들이 더욱 많았다.
그러나 나는 그 사이에 적힌 한 문구를 발견하고 놀라서 숨을 삼켰다.
-아나타, 고마워.-
아나타? 아나타라면 제나스의 누나가 아닌가? 혹시 제나스의 누나가 이 일기를 쓴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아무런 증거도 없지만 그저 내 감이 말하는 대로 유안나가 일기의 주인일까?
‘하지만 유안나라고 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돼. 이 일기는 이미 과거에 일어난 일 같은데, 유안나는 우리랑 비슷한 시기에 섬에서 눈을 떴잖아.’
불현듯, 노트의 주인이 언급한 ‘그녀가 알려 준 장소’라는 게 벙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언급되는 ‘그녀’는 아나타일지도 모르고.
그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에녹이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일어났어요?”
나는 노트를 접으며 그에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피곤한 낯으로 마른세수를 하던 그가 흠칫하며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막 일어나서 잔뜩 잠긴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마거릿.”
“네?”
“그냥 불러 봤다.”
“네……?”
“아침부터 예쁘게 웃고 있기에.”
그가 다시금 얼굴을 쓸어내리며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고는 뻐근한지 뒷목을 매만졌다. 너무 직설적인 표현이라 순간 말문이 막혀 나는 입을 다물었다.
“으음.”
마침 카이든도 하품을 하며 일어났다.
“아, 진짜 불편하네.”
에녹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는데 카이든은 잠자리가 너무 괴롭다며 불평을 했다. 하지만 잠자리가 좋지 않았다는 데엔 나도 격하게 동의하는 바여서 그와 함께 불평을 토로했다.
“아 참, 이건 제나스의 오두막에서 주운 건데 읽어 보실래요? 크게 도움 되는 건 없지만.”
나는 에녹을 향해 들고 있던 노트를 내밀었다. 에녹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노트를 보다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상비약을 꺼내면서 이 노트를 본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내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기다려 준 걸까?
“누가 쓴 거야? 여기서 말하는 ‘그녀’는 또 누구고? 제나스의 일행인 것 같은데. 만능 열쇠? 이거 성녀가 가지고 있던 그 열쇠인가?”
에녹이 얌전히 있자 먼저 노트를 가져가 살피던 카이든이 내게 물었다. 나는 차분하게 내가 추측한 내용을 설명해 줬다.
“노트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는데, 거기 언급되는 ‘그녀’가 아마도 아나타가 아닌가 싶어.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그녀가 알려 준 장소’라는 게 아무래도 지도에 표시된 장소 같고.”
나는 턱을 괴고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든에게서 뒤늦게 노트를 받아 살핀 후에 에녹이 대답했다.
“더더욱, 지도에 있는 장소를 찾아가 봐야겠군.”
“진짜 의문만 가득하네. 그럼 일단 가 봅시다. 이 섬의 비밀이 대체 뭔지, 탈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제대로 파헤쳐야지.”
에녹의 말에 카이든이 한숨처럼 대답했고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출발하죠.”
그렇게 우리는 벙커가 있는 장소를 찾아 다시 움직였다. 나는 지도를 펼치고 걷다가 카이든이 빈손으로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카이든, 그런데 네 가방은 어디 있어? 남은 폭탄이 거기에 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
“아, 그거 따까리가 주워 오지 않을까? 거기다가 던져 놓고 왔는데. 가방 메고 헤엄을 칠 순 없잖아.”
카이든의 태연자약한 말에 나는 가방의 무게를 떠올려 봤다. 그거 생각보다 무거웠던 것 같은데, 루제프가 과연 들고 올 수 있을까?
“주교님이랑 어디서 만나기로 했어?”
“응? 만나기로 하진 않았는데?”
카이든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루제프는 혼자 살아남기 힘들 텐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루제프는 챙겨 다녀야 하지 않을까? 그 인간은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