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25)화 (125/234)

다행히 다리에 힘이 풀리기 직전에 마법진이 완성됐고, 완성된 마법진은 에녹의 어깨 부근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찢기고 벌어진 상처가 차차 아물어 가는 걸 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거릿!”

두 남자가 동시에 나를 잡았다.

“괜찮아요. 좀 피곤해서 그래요. 쉬면 괜찮아 질 거예요.”

나는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에녹과 카이든을 만나고 긴장이 풀리자 그간 켜켜이 쌓여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더군다나 마력까지 사용했으니 그 여파가 더 심한 모양이다.

나는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상처가 완전히 아물어 매끈한 배를 내려다봤다. 전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던 갈비뼈 쪽은 이제는 아프지도 않았다.

“이 섬은 이상하게 회복이 빠른 것 같네.”

그 말을 하며 나는 입가를 가리고 하품했다. 어쩐지 졸음이 밀려오는 것 같은데.

에녹이 넝마가 된 셔츠를 껴입으며 나를 쳐다봤고 내 옆에 다시 앉은 카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머리카락도 수염도 안 자라잖아. 마력도 쓸 수 없는 거 보면, 아예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공간 같기도 해.”

다른 시공간에 있는 건 맞지.

‘좀 어지럽다.’

순간 현기증이 와서 나는 이마를 짚었다. 에녹과 카이든이 동시에 나를 쳐다봤다. 마치 내 행동 하나하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던 것처럼.

“괜찮아?”

카이든이 내게 물었다. 괜찮냐고 물어본 건가?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고 보니 이 섬에 온 지 얼마나 됐지?

벌써 네 달은 지난 것 같은데, 언제 탈출할 수 있으려나. 날짜를 적던 나무판자를 넣은 가방은 카이든이 들고 다녔었는데, 잃어버렸나?

하아.

어쩐지 몸에 잔뜩 열이 오르는 느낌이다.

하긴 이 섬에 오고서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혼자 다 했는데, 디에고가 드레스를 훔쳤을 때를 제외하곤 크게 아픈 적이 없었다.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였지.’

“마거릿.”

에녹의 커다란 손이 내 턱을 조심스레 잡아 올렸다. 그의 금안이 시야에 담겼다.

“상태가 좋지 않군.”

에녹이 내 얼굴을 샅샅이 훑으며 안색을 살폈다. 카이든도 내 이마에 손등을 얹어 보더니 말했다.

“열 오르는 것 같은데? 이마가 불덩이야. 꽤 심각해.”

그가 꽤 심각하다 말할 정도면 정말로 상태가 나쁜 것 같은데.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나른하게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앉았다.

“괜찮아. 좀 자면 괜찮아질 거야.”

“혹시 어디 다친 곳이 더 있는 거 아니야? 뭐, 독에 중독되어 있다거나.”

카이든이 호들갑을 떨며 내 몸을 살폈다. 나는 고단한 느낌이 들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야. 괜찮아.”

에녹이 또 본인을 치료하다 그런 줄 알고 자책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그냥 정말 몸살인 것 같은데.

눈꺼풀이 무거운 추를 달아 놓은 것처럼 힘겹게 내려갔다. 힘을 쓸 수가 없었다.

“괜찮아……. 그냥…… 몸살인 것 같…….”

“마거릿?!”

카이든의 다급한 부름을 끝으로 나는 그렇게 정신을 잃었다.

* * *

어렴풋이 정신이 들었다.

몸이 으슬으슬 추웠고 한기가 돌아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한겨울에 맨몸으로 눈밭에 내던져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아무리 일교차가 심하다고 해도 열대 기후에서 이 정도의 한기를 느낄 수는 없을 텐데.

“마거릿, 깼어? 괜찮아?”

“제길, 아직도 몸이 차군. 마력은 더 못 쓰는 건가?”

“여기서 마력까지 쓰면 마거릿은 정말 위험해질지 모릅니다.”

카이든과 에녹의 다급한 대화 소리가 앞뒤로 왔다갔다 들려왔다. 어깨와 허리춤에 앞뒤로 두터운 팔이 나를 감싼 듯한 느낌이 들었다.

떨리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차차 보이는 시야에 에녹의 얼굴이 보였다.

추워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탓에 몸이 함께 덜덜 떨리자 허리춤에 감겨 있던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마거릿, 아직도 추워?”

등 뒤로부터 카이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드나.”

앞에서는 에녹이 초조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눈을 떴는데도 상황 파악이 쉽게 되질 않았다.

코앞엔 에녹이 맨몸으로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었고 등 뒤로는 카이든이 내 허리를 끌어안은 것 같다. 역시나 등 뒤로도 맨살의 감촉이 느껴졌다.

하지만 의아함이 든 것은 아주 찰나였다. 머리가 너무도 어지럽고 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추워…….”

이제는 입도 얼었는지 덜덜 떨리기만 하고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내가 오들오들 떨며 몸을 움츠리자 두 남자가 더 바짝 몸을 밀착해온다. 진득한 살결이 빈곳 없이 빼곡하게 맞닿는다.

두 남자는 상의를 탈의한 채로 앞뒤로 나를 끌어안으며 체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은지야, 불 좀 더 태워야겠는데?”

카이든의 목소리에 나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우리 옆에서 열심히 장작에 불을 뿜고 있는 은지가 보였다.

은지는 카이든의 말에 불을 뿜다 말고 열심히 하고 있는데 왜 그러냐는 듯이 뿔이 난 얼굴로 자리에서 팡팡 뛰었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안절부절못하고 자리를 빙글빙글 돌더니 다시 열심히 장작에 불을 붙였다.

“마거릿의 몸이 더 차가워진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러다가…….”

“불길한 소리는 하지 말고.”

“제기랄.”

카이든이 기어코 욕설을 내뱉었다.

나는 에녹의 따뜻한 가슴팍에 뺨을 기댔다. 등 뒤로 나를 끌어안은 카이든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촉촉한 입술을 문댔다. 어깨에 닿는 그의 숨결이 따뜻하다는 느낌만 있었을 뿐, 성가신 입술 감촉에 대한 깊은 감상은 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두 남자는 몸에 열이 많은 편이었고 덕분에 아까보다는 추위가 덜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민망한 자세라니.’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체온을 올리는 데 분명 효과는 있었다.

누가 이런 방법을 제안했는지는 안 봐도 뻔했는데, 그걸 에녹이 납득한 것도 다소 의외였다.

나는 정신을 힘겹게 가다듬었다. 뭐라도 말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덜덜 떨리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이게 무슨……, 큼.”

그렇게 입을 열었다가 우스꽝스럽게 잔뜩 쉰 목소리가 나와서 잠시 입을 다물고 목을 가다듬었다. 이 분위기에서 이게 무슨 창피야.

“마거릿? 괜찮아?”

“몸은 좀 어떤가.”

카이든과 에녹이 동시에 몸을 일으켜 앉더니 차례로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그들이 내게서 떨어지자마자 순식간에 한기가 밀려왔다.

“마거릿.”

에녹이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한 번 더 불렀고 나는 달달 떨며 그의 팔을 잡았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 본다.

‘어떡하지? 민망한데 말할까, 말까.’

수십 번 고민하던 중, 불어온 바람에 뼛속까지 시린 추위를 느낀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주섬주섬 에녹의 재킷과 카이든의 로브를 뒤집어썼지만 역시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아, 아까 했던 대로 해 주시면 안 되나요?”

“뭐?”

내 말에 에녹과 카이든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몸을 움츠리고는 추위에 떨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씨, 왜 이렇게 못 알아듣지.

“추우니까, 안아 달라고요.”

나는 조금 전보다 더 또렷하게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찰나 동안 정적이 흘렀다.

‘수치사가 있다면, 나는 지금 죽었을 거야.’

계속되는 침묵에 자괴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괜히 말했어, 제길.’

그때, 정적을 깨고 카이든이 감탄사를 터뜨리며 내 몸을 돌려 눕혔다.

“와, 마거릿. 나 보면서도 말해 주면 안 돼?”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군.”

이어서 에녹의 한숨 소리도 들려왔다.

그들은 내가 한 말에 대한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나는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눈물을 삼키며 외쳤다.

“아 좀! 그냥 안아 달라고요! 나 춥다고!”

짜증이 가득 담긴 그 외침에 두 남자가 놀란 얼굴을 했다. 이어서 카이든이 박장대소를 한다.

그렇지 않아도 시야가 살색의 향연이라 눈을 어디다 둬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자꾸 뜸을 들이네. 나는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말을 하면서 차차 정신이 또렷하게 돌아오고 있었다. 추운 건 여전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결계 안인 것 같았다. 흙바닥에 커다란 나뭇잎을 이불 삼아 깔고 누워 있었는데, 어쨌든 잠자리가 썩 좋지는 않았다.

에녹이 다시금 내 앞에 누워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뒷머리를 토닥였다. 나는 그의 맨 가슴팍에 뺨을 기대고는 민망한 기분을 애써 다독였다. 어쩐지 다른 의미로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이어서 카이든이 등 뒤에서부터 나를 끌어안더니, 내 어깨에 고양이처럼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웃었다.

“아, 너무 좋다. 마거릿이 안아 달라고 했어.”

“마거릿이 불편해하지 않나, 너무 치대지는 말도록 해.”

곧장 에녹이 제지에 들어갔다. 어쩐지 문장 하나하나에 힘이 실려서 살벌하게 들리기도 했다. 꾹꾹 눌러 담은 화가 잠시 밖으로 새어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뒤에서 카이든이 에녹이 저를 견제한다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내가 기절해 있는 동안 내내 저렇게 투닥투닥거린 게 아닌가 싶었다. 굳이 두 사람 모두 나를 끌어안으며 체온을 나누고 있는 것도 그것 때문인가?

에녹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뒷머리를 다정하게 토닥였다.

‘이게 뭐라고 신경전을 벌이는 거람.’

아무튼 따뜻하니까 됐어. 그 덕분에 오늘도 살아남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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