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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24)화 (124/234)

봉인된 영혼의 마력을 사용한다니.

“만약 그런 거라면, 너무 소름 끼치는데? 아나타의 마력이라는 거 아니야?”

카이든이 기가 차다는 얼굴로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만약 잉그람 왕조에 그런 풍습이 있던 거라면, 정말로 에녹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오두막 주변으로 사람을 교란시키는 안개가 형성됐던 것도 설명이 된다.

“아나타를 봉인한 것, 어쩌면 제나스의 짓일지도 몰라.”

카이든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는데?”

“어릴 적에 내가 신의 X 같은 XX들한테 실험을 당했었거든. 안식의 방에 들어가는 순간, 그 당시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더라고.”

카이든은 마치 타인의 기억을 더듬는 것처럼 아주 덤덤하게 말했다.

표정엔 괴로움 한 점 없었지만, 그의 속내도 평온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이 섬은 어떤 실험을 위해 만들어진 섬이 맞는 것 같아. 나를 실험했던 교황청 XX들이 말하기로는 피실험자 명단이 있다고 했었거든. 제나스의 이름도 언급됐었는데, 아무래도 그들과 연관이 있는 것 같았어. 우리 가문도 그렇고.”

카이든은 잠시 말을 끊고는 착잡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으니, 그 나름대로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겠지.

나는 얌전히 그의 말을 곱씹었다.

대체 무엇을 위한 실험일까.

거기다가 신전과 로하데 가문까지 함께 엮여있었다.

로하데 가문은 마법사들을 대표하는 가문인데, 마법사와 신관이 서로 대립한 역사는 천 년이나 이어져 온 것이 아니던가?

“어쨌든 제나스가 아군이 아니라는 건 확실해졌네. 이 섬의 실험과 연관이 있다니…….”

나는 조금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제나스가 내게 호의적이던 이유도 그래서였을까? 실험자가 피실험자에게 호의나 호기심을 갖는 건 당연하잖아.

팔짱을 끼고 묵묵히 앉아 있던 에녹이 입을 열었다.

“신전과 마탑이 손을 잡은 건가? 제국의 황태자와 왕국의 왕세자는 물론, 주요 인사들을 납치해 실험을 한다는 게 도통 이해가 가질 않는군.”

“대륙 전쟁이라도 일으키려는 모양이죠.”

카이든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아, 그러고 보니 제나스가 성녀를 잘 지켜보라더군요. 그녀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다고요.”

“성녀가? 뭘?”

내 말에 카이든이 반문했다.

“그건 나도 몰라. 본인도 궁금하다고 했어. 더는 설명 안 해 주더라고.”

제나스의 오두막에 있는 시간은 고작 하루 반나절 정도였다. 게다가 그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정보가 들이닥쳐 제대로 무언가를 생각해 볼 정신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중요한 퍼즐 조각이 많이 나온 것 같은데, 그 많은 퍼즐을 짜 맞추는 과정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문지르며 마물에 관해서도 떠올렸다.

“제나스가 마물의 눈을 빌려 우리를 지켜봤다고 하더라고요. 다만 눈을 빌릴 뿐, 조종은 못 한댔어요.”

“마물의 눈을 빌린다고? XX, 그 늑대 X끼들이 그냥 날 쳐다본 게 아니었어. 감시하는 게 맞았군. 대체 그 마법사는 뭔데 그런 음침한 짓을 하는 거야?”

“이 모든 일의 원흉이거나, 아니면 신전과 로하데 가문 사람들에 의해 천 년 동안 이 섬에 갇혀 있어서 제정신이 아니거나. 둘 중 하나겠군.”

카이든이 분개하자 에녹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그 망할 자식은 나더러 꼭 살아남으라더니, 마물의 밥이 되기 직전엔 그저 방치하기만 했지.

“우선 우리 자리를 옮길까요? 언제 마물이 나올지 몰라 불안해요.”

분이 가라앉지 않은 듯하던 카이든은 그 말에 조금 진정이 된 것 같았다. 붉은 눈동자가 흘끗 나를 보았다.

“내가 있잖아, 마거릿. 그건 해결 가능해.”

그는 곧장 얇은 나뭇가지를 주워 흙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뭐 하려는 거지?

한참 동안 굉장히 복잡해 보이는 마법진을 완성한 그가 그 위에 서서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마력, 빌려줄 수 있어?”

“아. 응.”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지를 끼고 있는 손이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았고 곧장 맞잡은 손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나왔다.

눈을 감은 카이든이 다른 손으로 마법진을 향해 손을 뻗자 그의 손을 타고 나온 빛이 마법진 안에 스며들었다.

몸 안에서 마력이 무서운 속도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우리 주변을 둘러싼 파란빛이 기둥이 되어 솟아올랐다. 잠시간 방출되던 빛은 금방 소멸됐다.

카이든이 손을 털며 나와 에녹을 돌아봤다. 그는 평소의 쾌활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마물들이 볼 수 없게 여기 결계를 쳐 뒀어. 이 정도면 아무리 제나스라 할지라도 못 들여다 볼 거야.”

그가 나를 보며 윙크했다. 역시 내가 가진 마력을 가장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줄 아는 건 카이든이었다.

아직 몸 안에 마력은 많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슬쩍 에녹을 바라봤다.

그는 여전히 피투성이 몰골을 하고 있었고 이전에 입은 상처도 상당히 심각해진 것처럼 보였다.

“카이든, 혹시 치료 마법도 할 수 있어? 에녹의 상처가…….”

에녹의 어깨를 가리키며 묻자 에녹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다. 나보단 영애가 치료를 받는 게 좋겠군.”

“아니, 어떻게 괜찮아요 그게?”

“잠깐만. 이게 무슨 소리야, 마거릿. 너 다쳤어?”

카이든이 황급히 다가와 내 어깨를 잡았다. 그러고는 내 복장을 살피더니 놀란 얼굴을 했다.

“어? 잠깐, 황태자 전하의 제복을 걸치고 있어서 못 봤네. 너 바지 입었었네? 뭐야, 이거 상의는 왜 이래. 왜 이렇게 짧아? 제기랄, 이런 옷 처음 봐. 너무 야한 거 아니야? 속옷보다 더한데?”

그가 재킷을 슬쩍 열었다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재킷 앞섬을 여며 주었다.

“너 이거 벗지 마. 진짜 벗지 마.”

그러더니 아예 자신의 로브를 벗어 재킷 위에 추가로 걸쳤다.

“그렇게까지 안 해도 돼. 괜찮아. 이 옷 편해.”

내가 카이든의 말에 반박하고 로브를 벗으려고 하자,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에녹이 뜻밖에도 카이든을 두둔하고 나섰다.

“마거릿, 난 그대가 로드 말에 따라 줬으면 좋겠는데. 그 옷은 매우 위험해.”

아니, 대체 이 옷이 어디가 위험한 거죠? 누가 위험한 건데요? 나는 황당한 얼굴로 에녹을 돌아봤다. 에녹이 저렇게 카이든의 편을 드는 건 또 처음 본다.

“상처는 치료해 줄게. 일단 마거릿 너 먼저 하고, 전하를 치료하는 건 그 다음.”

카이든의 말에 에녹도 팔짱을 낀 채로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너무 완강해서 이럴 바엔 차라리 내 상처부터 빨리 끝내는 게 낫겠다 싶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카이든에게 반지 낀 손을 내밀었다.

카이든은 내 손을 부드럽게 잡더니 씨익 미소를 짓고는 깍지를 껴 나를 살짝 당겼다.

나무 기둥에 앉아 있던 나는 얼떨결에 일어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가 내 허리를 휘감았고 그의 얼굴이 코앞으로 가까워졌다.

뺨에 입술이 닿기 직전, 커다란 손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가로막혔다.

“로드, 지금 뭐 하는 건가.”

서릿발처럼 섬뜩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내려앉았다. 에녹이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다들 뭐가 이렇게 빨라?’

카이든이 혀를 차며 내게서 살짝 물러났다. 무척 아쉬워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에녹의 살벌한 시선에 그는 결국 얌전히 내 상처 치료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상처가 있는 내 배 위에 손을 얹자, 푸르스름한 빛이 쏟아졌고 조금 차가운 느낌과 함께 쓰라리던 통증이 차차 가시기 시작했다.

“와. 신기해.”

보통 통증이란 건, 진통제를 먹는다 하더라도 약효가 퍼지는 시간이 있기 마련인데, 이건 고통이 사라지는 게 바로 체감이 됐다.

‘나도 마법 배우고 싶다.’

카이든은 힘 한 번 들이지 치료 마법을 끝냈다. 그가 예쁘게 미소 짓고는 잡은 손을 놓지 않고 한번 꽉 쥐었다. 그러더니 에녹에게로 다가갔다.

일단 에녹의 흰 셔츠는 정말로 엉망이었다. 셔츠가 넝마처럼 찢어져 있어서 군데군데 그의 탄탄한 복근과 굴곡진 근육이 그대로 보일 정도였다.

‘다시 보니까, 민망하긴 하네.’

재킷이 필요한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좀 벗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너무 지저분해서 치료하기 번거로워 보이는데.”

카이든이 에녹을 요리조리 보더니, 쯧 하고 혀를 한 번 찼다.

에녹이 말없이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조용히 에녹이 셔츠를 벗는 걸 지켜보고 있자 카이든이 흘끔 나를 봤다.

“마거릿. 눈 감고 있을래?”

“어? 왜?”

내 물음에 카이든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럼 보려고?”

“바지를 벗는 것도 아니잖아.”

“어……, 그렇지?”

카이든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에녹이 셔츠를 완전히 벗어 던졌고 그의 사납고도 다부진 육체가 드러났다.

신이 조각해 놓은 것처럼 섬세하게 굴곡진 근육들과 성난 가슴이 시야에 담겼다. 피가 잔뜩 튀고 생채기가 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조각상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남성의 몸이 이렇게 관능적일 수도 있구나.

그의 몸에 난 상처 중에 어깨 상처가 가장 심각해 보였는데, 정작 에녹은 태연한 얼굴로 앉아서 맨몸을 드러내고 카이든과 나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의 고요한 금안은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마치 고통 같은 걸 느끼지 않는 사람처럼.

“좀 심각하긴 하네.”

카이든도 미간을 좁히고는 에녹의 상처를 살핀 뒤, 나를 돌아봤다.

“이건 마력이 많이 필요할 것 같은데, 괜찮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와 맞잡은 반지 낀 손을 내려다봤다. 에메랄드빛 보석에선 은은하게 광채가 돌고 있었다.

“아직은 충분해.”

내 말에 카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얇은 나뭇가지를 주웠다. 그러고는 그가 바닥이 아닌 공중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뭇가지를 따라 푸른빛의 궤적이 허공을 스쳤다. 정말이지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마법진은 굉장히 복잡한 수식이다. 바닥에 선을 그려도 종종 수식을 잘못 그리기 일쑤인데, 선이 남지 않는 허공에 마법진을 그리다니.

‘그러고 보니 머릿속으로 그린 마법진을 구현할 수도 있다고 했었지.’

역시 카이든은 천재가 맞긴 한가 보다.

하지만 그런 여유로운 생각도 잠시, 몸 안에서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마력이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기력이 사라지는 느낌이라 나는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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