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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23)화 (123/234)

기이하게도 카이든과 만나고 나자 서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마치 안개가 스스로의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말이다.

“다친 덴 없어? 아픈 곳은? 마물은 안 마주쳤고?”

내 물음에 카이든이 그제야 고개를 들고 나를 보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마거릿이 이렇게 열렬하게 걱정해 주니 좋네.”

대답은 하지 않고 딴소리를 한다. 나는 결국 더 묻지 않고 그의 상태를 살폈다. 팔짱을 끼고 지켜보기만 하던 에녹도 카이든에게 안부를 물었다.

“안개가 꽤 짙어서 걱정되더군. 정말 괜찮았나, 로드.”

카이든이 그제야 에녹을 돌아보며 민망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일단 어디 자리를 잡고 얘기할까요?”

우리는 마물의 시선을 피해 대화를 나눌 만한 곳을 찾아 모여 앉았다. 우선 상황 정리부터 한 뒤에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날 생각이었다.

“우선, 카이든 너부터 말해 봐.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안개가 생기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에녹을 만났거든. 너는 하루 종일 이 안개 속에 혼자 있었잖아.”

내 말에 카이든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와 에녹을 돌아봤다.

“하루가 지났다고?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지도 몰랐어.”

그가 피곤한 얼굴로 머리를 헤집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잠시간 기억을 되짚는 듯 콧잔등을 찡그리더니, 이윽고 차분하게 우리에게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나는 계속 오두막을 따라 가고 있었어. 그런데 어느 순간 오두막이 시야에서 사라지더라. 하지만 그 오두막이 굉장히 이상한 기운을 풍기는 곳이라, 보이지는 않아도 대충 어느 방향에 있는지 알 것 같았거든.”

오두막의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니.

아스달이 마력의 흐름을 감으로 느낄 수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 듯했다. 카이든은 감이 뛰어나고 예민했으니까.

그가 느낀 이상한 기운이란 어쩌면 제나스의 기운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계속 그 방향으로 가보려는데, 안개가 자꾸만 시야를 가로막더라고. 나중엔 환각까지 보이더라. 마치 내가 오두막을 찾지 못하게 하려고 방해라도 하는 것 같았어.”

나는 제나스가 나를 오두막 밖으로 밀어내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분명 불청객이 찾아왔다는 말과 함께 나를 밖으로 떠밀며 미안하다고 했던 것 같다.

“분명 내가 못 오게 교란을 하는 느낌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오두막 앞에 있더라고. 난 거기에 네가 그 오두막에 있을 줄 알았어.”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안식의 방에서 조우한 은발 머리 여자와, 오두막 밖으로 끌려나간 뒤 마주친 은발 소년의 이야기까지.

나는 너무 놀라워서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안식의 방은 분명 잠겨 있었다. 그런데 카이든은 그 방문을 열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 안에 정말로 사람이 있었다니.

카이든이 한숨을 내쉬었다.

“체감상으론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벌써 하루가 지났다니 놀랍네.”

그는 다소 얼이 빠져 보이는 모양새였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굉장히 생소한 일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오두막을 찾지 못하게 하려고 방해하는 게 맞을지도 몰라.”

카이든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팔짱을 끼고 가만히 대화를 경청하던 에녹도 나를 보았다.

카이든과 재회하면 제나스에 대한 얘기를 해 주기로 했으니, 지금이 그 타이밍인 듯했다.

“나도 그 오두막에서 하룻밤을 보냈거든. 천살 넘은 대마법사랑 같이. 네가 만난 그 어린 소년이 나와 함께 있었던 대마법사 같아.”

“천 살이 넘은 대마법사? 그게 무슨 소리야?”

카이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렇지, 나 같아도 못 믿겠다.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이야. 그리고 이름은 ‘제나스 이그란’이라고 했는데.”

“잠깐, 뭐? 제나스 이그란?!”

카이든이 조금 전보다도 더 깜짝 놀라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덩달아 깜짝 놀란 내가 뒤로 몸을 젖히자 에녹이 손을 뻗어 내 등을 받쳐 주었다.

“왜 그러지, 로드?”

에녹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카이든은 입가를 가리고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한참 말이 없다가, 갑자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마탑주들에게 대대로 내려온다는 펜던트였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 내 광대뼈를 가격했던, 바로 그 펜던트 말이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게 왜?”

“이 펜던트를 만든 주인이야. 제나스 이그란이라는 마법사.”

“……응?”

“……그리고 우리 가문의 선조지. 제나스 이그란 로하데. 대마법사이자, 로하데 후작 가문의 초대 가주. 제기랄,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뭐?!”

연달아 이어지는 카이든의 충격 발언에 나는 놀라서 비명처럼 외쳤다.

나는 그제야 제나스가 은빛 머리칼에 붉은 눈을 가지고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로하데 가문의 유전이었던 모양이다.

“제나스는 천 년 전에 죽은 마법사인데 여기 어떻게 있어?”

이번엔 카이든이 내게 되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런데, 나한테 얘기하기로는 본인도 이 섬에서 천 년을 살았다고 해. 탈출은 못 한대. 제나스가 한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갇혀 있었다고? 그 천재 마법사가?”

카이든이 반문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간 내가 오두막에서 겪었던 일을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누군가가 나를 강에서 끌어 올렸는데 그때 제나스를 발견했으며, 그가 나를 오두막으로 데려와 치료해 주었고, 제나스의 오두막에서 이상한 ‘문’과 ‘안식의 방’을 발견한 이야기까지.

이제야 생각이 난 건데 제나스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코코넛을 들고 있었다. 본인은 식사를 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고 했는데 말이다.

그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카이든이 내게 말했다.

“하지만 네가 말하는 제나스는 내가 가문에서 익히 들어 왔던 이야기 속 제나스와는 상당히 다른 사람 같아.”

“네가 아는 제나스는 어떤 사람인데?”

“일단 제나스는 그런 어린아이 모습이 아니야. 다 큰 성인이고 살인을 즐기는 변태라고 들었어. 인간적인 감정이 심각하게 결여되어 있어서 악마였을지도 모른다는 문헌도 전해지더라.”

“…….”

확실히 카이든이 말하는 제나스는 내가 만난 제나스와 굉장히 달랐다.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일 가능성은 없나?”

에녹이 카이든에게 묻자 카이든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잉그람 왕조 시절 사람인 데다가,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게 몸의 균형까지 바꾼 마법사라고 했잖습니까. 그 시절에 그런 고차원적인 마법을 구현할 수 있었던 마법사는 제나스밖에 없습니다.”

카이든은 굉장히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에녹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럼 오두막 주변의 안개는 그 마법사가 만든 건가? 하지만 이 섬에선 마력을 쓸 수 없지 않나.”

에녹의 말에 나는 곰곰이 제나스가 해 줬던 말을 곱씹었다.

“몸을 바꿀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카이든의 말이 맞다면 그는 본래 성인의 몸을 가지고 있고, 성인의 몸을 하고 있을 땐 마력을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저에게 ‘이 몸으로는 마력을 제어당하고 있다’라고 했거든요.”

“그렇다면 지금은 왜 굳이 어린아이 모습을 하고 있는 거지? 육체를 보호하기 위해서인가? 하지만 그 상태에서는 마력을 사용할 수 없다면, 안개 같은 건 어떻게 만든 걸까.”

카이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나는 그에게 다시 물었다.

“카이든, 네가 들어갔다고 했던 안식의 방은 왜 문이 열려 있었을까? 나는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거든. 그리고 문에 분명 ‘봉인’이라고 적혀 있었어.”

“왜 문이 열렸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장소가 봉인되어 있는 건 맞는 것 같더라. 그 여자, 마법진 위에 묶여 있었어.”

“그 역시 제나스란 마법사가 한 짓인가.”

에녹의 물음에 카이든은 생각을 더듬는지 관자놀이를 꾹꾹 문지르며 미간을 좁혔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 여자가 나한테 도망치라고 하더군요. 그 순간 오두막 밖으로 내던져졌습니다. 직후에 단발머리 꼬맹이를 만났고요. 마거릿의 말을 들어 보니, 그 꼬맹이가 제나스였던 모양입니다.”

도망치라니.

무엇으로부터? 누구로부터 도망을 치라는 거지?

“아, 그러고 보니 제나스한테 누나가 있다고 했었어. 이름이 아나타라고 했는데…….”

“아나타? 아나타 샤넷 로하데도 여기 있었다고?”

카이든이 깜짝 놀라 내게 되물었다.

“제나스는 꼭 그녀가 죽은 것처럼 얘기했거든. 그런데 네가 안식의 방에서 본 여자가 은발에 적안을 가지고 있다면, 그녀가 아나타가 맞을지도 몰라. 로하데 가문의 외양 특징과 일치하잖아.”

아나타는 왜 그곳에 봉인되어 있던 걸까. 제나스는 그 사실을 왜 숨겼던 거고. 혹시 제나스가 아나타를 봉인한 장본인인 걸까?

풀리지 못한 의문점이 너무도 많았다.

“마거릿.”

에녹의 부름에 사념에 젖어 있던 나는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봤다.

“거기에 ‘안식의 방’이란 게 있었다고 했었나. 그리고 봉인이라고도 쓰여 있었고.”

나는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녹은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이 턱을 쓰다듬으며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윽고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잉그람 왕조에 있던 풍습인데, 안식의 방을 만들어 사람을 산 채로 봉인하면 그 영혼이 수호신이 된다는 말이 있다.”

에녹은 쏟아지는 충격적인 이야기 속에서도 별달리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냉철하고 단단해 보였다.

그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어쩌면 오두막을 에워싸고 있던 안개의 근원은 제나스의 마력이 아니라 봉인된 영혼의 마력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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