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22)화 (122/234)

교황청의 문양이 박힌 로브의 후드를 뒤집어 쓴 사제들이 카이든을 에워싸고 있다.

그들은 낡은 책을 펼쳐 들고 무언가를 쉴 새 없이 중얼거리고 있다.

그때.

지하실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온다. 어린 카이든의 시야에 얼핏 나이가 꽤 많이 들어 보이는 노년의 사제가 한 명 보인다.

의복이 이 중 가장 화려한 것을 보아 대주교 혹은 교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가. 제나스 님과 상성이 잘 맞을 것 같더냐.’

노인의 말에 어린 카이든을 둘러싼 사제 중 한 명이 대답한다.

‘네. 가진 마력도 제나스 님에 준하는 것 같으니, 상성은 최상일 것 같습니다.’

‘흠. 로하데 가문과는 합의를 마쳤네. 제나스 님과 엮이면 그쪽도 융통성이라는 게 생긴단 말이지.’

‘이대로 성장하면 완벽해질 것 같습니다. 마지막 피실험자 명단에 함께 넣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심혈을 기울여서 명단을 만들게. 이번 계획은 범위가 큰 만큼, 마지막 실험이 되겠군. 보고서를 작성하여 올리도록.’

노인이 흡족한 표정으로 대답을 한 사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그가 어린 카이든을 흘끗 내려다본다.

노인의 푸른 눈동자와 카이든의 붉은 눈동자가 마주친다.

시선이 마주침과 동시에 카이든은 순식간에 기억 속에서 빠져나왔다.

허억.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이, 마법진 위에 앉아 있던 여자가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카이든은 고통스럽게 호흡하던 와중에도 여자의 붉은 눈과 시선이 마주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저 여자의 얼굴이 낯설지 않다.

‘누구지?’

그 순간 여자가 입을 열었다.

도.

망.

쳐.

그와 동시에 등 뒤로 문이 활짝 열렸다. 알 수 없는 무언가에 뒷덜미를 잡힌 카이든은 그대로 문 밖으로 질질 끌려나갔다.

순식간에 3층 복도로 끌려나온 그는 그대로 복도 창문 밖으로 내던져졌다. 힘을 잃은 몸뚱이가 3층 높이에서 거침없이 추락했다.

“이런, XX!”

바닥에 충돌하기 직전, 누군가가 그를 홱 잡아당겼다. 중력 가속도가 힘의 반동으로 인해 확 꺾이며 카이든은 바닥을 굴렀다.

“C발.”

콜록콜록.

비산하는 흙먼지 사이로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는데, 그의 앞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목 부근에서 찰랑거리는 단발을 가진 소년이었다.

은발에 적안, 역시 낯설지 않은 외양.

소년이 카이든을 표정 없는 얼굴로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궁금했는데, 드디어 만났네.”

분명 소년임에도 그는 마치 오랜 세월을 산 듯 연륜이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카이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년이 뒷짐을 지고 천천히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런데 아직 때는 아니라서.”

그러더니 카이든의 이마에 손가락을 얹었다.

“이만, 가봐.”

소년이 카이든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어냈다. 카이든은 다시금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그렇게 오두막과 함께 소년은 자취를 감췄다.

* * *

마거릿과 에녹, 카이든이 차례로 사라지고 난 뒤, 유안나는 완전히 착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 주저앉아 펑펑 눈물을 흘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다들, 죽으면…… 또 죽으면……!”

그러고는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횡설수설하더니 열쇠를 꺼내어 손에 쥔 채 오열했다. 정신이 말짱한 상태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해가 지기 전까지 내내 그런 상태였던 유안나는 밤이 되고서야 간신히 진정했다.

그러나 그때부턴 사람이 완전히 변했다. 마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대단한 뭔가를 깨우친 사람처럼 말이다.

‘역시 이상해.’

아스달은 그런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사실 아스달이 그간 그녀에게 호의적으로 굴었던 것은 디에고만큼의 유별난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뭔가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아직도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지금 보니, 단순히 그의 감이 예민한 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척 허기가 졌다.

“플로네 영애가 무척 보고 싶군.”

아스달이 초췌한 얼굴을 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옆에 가만히 앉아 있던 유안나가 동의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저도 영애가 무척 보고 싶네요.”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있던 유안나는 그제야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괜찮나.”

그의 물음에 그녀가 의아한 듯 그를 쳐다봤다.

“성녀님이 그들을 그렇게나 좋아하는 줄 몰랐는데.”

“설사 싫어하는 사람이 강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보통은 이 상황에서 충격을 받아요.”

“그렇긴 하지.”

그녀의 말에 공감하며 더는 할 말이 없어진 아스달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에게 뭔가를 묻고 싶었는데, 뭐부터 물어봐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 그는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세 사람은 살아 있을까요?”

“그랬을 거다.”

“확신하는군요.”

“죽었다는 걸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믿지 않아.”

아스달의 대답에 유안나가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스달은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우선 지도를 다시 한번 보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나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

유안나는 몹시 피곤한 기색이었는데, 아스달이 엄격한 얼굴로 손가락을 까딱하자 귀찮은 얼굴로 주머니에서 지도를 꺼내 건넸다.

아스달은 바닥에 지도를 펼쳤다. 그들은 북섬으로 건너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찾아 올라가야만 했다.

‘강가를 따라서 서쪽으로 쭉 올라가는 게 좋겠군.’

그가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배고파요, 저하. 새 좀 잡아 주실 수 없나요?”

“……이젠 성녀도 밥값을 할 때가 됐어.”

“오늘 저녁으로 새고기 먹을 수 있게 해 주신다면, 내일부터는 밥값 해 볼게요.”

유안나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평소처럼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대꾸하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물론 그 미소가 아스달에겐 통하지 않았지만.

“수작 부리지 말고 일어나. 같이 열매라도 캐도록 하지. 어차피 둘 다 동물 손질은 못 하지 않나.”

그제야 유안나가 납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투덜거리며 강가를 넌지시 쳐다봤다.

“물고기라도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유안나의 중얼거림에 아스달은 그제야 마거릿이 물고기 잡는 법을 배우라고 했던 걸 무시한 게 뼈저리게 후회됐다.

‘그때 배워 둘 걸 그랬군.’

매우 뒤늦은 후회였다.

하지만 그것도 아직 남섬에 있는 터라 진화한 마물을 만나기 전이기에 할 수 있는 사소한 뉘우침이었다.

아스달은 나중에 북섬에 도달하고 새로운 마물들을 만나고서야 물고기 잡는 법을 배웠어야 한다고 후회할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 * *

나는 중앙 강(섬의 중앙에 있는 강을 이렇게 부르기로 했다) 앞에 서서 지형을 살폈다. 우리가 어디 즈음 있는지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아직 근방에서 벗어나질 못한 것 같은데요? 여긴 제가 깨어났던 곳 근처인 것 같아요.”

내 말에 주변을 경계하며 서 있던 에녹이 흘끗 나를 내려다봤다.

“오두막, 찾을 수 있겠는가. 그곳 주변을 위주로 탐색하는 게 좋을 것 같군.”

“으음……. 강가를 등지고 북쪽으로 계속 올라갔거든요?”

“그럼 그 방향으로 일단 가 보지. 높은 산지가 없어 길을 잘못 들거나 하진 않을 것 같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와 함께 제나스의 오두막이 있을 법한 방향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들어간 숲속에서 우리는 또 다시 자욱한 안개와 조우하게 되었다.

“에녹.”

나는 불안한 얼굴로 앞서 걷는 에녹을 불렀다. 그가 의아한 듯 나를 돌아봤다.

“손잡고 걷는 게 좋겠어요. 카이든과 그랬던 것처럼 저희도 찢어지면 안 되잖아요.”

나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빤히 내려다보던 에녹이 느릿하게 내 손을 맞잡았다.

단순히 손만 잡았을 뿐인데, 맞닿은 체온 너머로 어쩐지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고 무척이나 든든했다.

“고마워요.”

에녹은 내 말에 답하지 않고 잠시 나를 쳐다보다가 나직한 미소만 슬쩍 지었을 뿐이다.

그렇게 막 다시 에녹과 함께 안개 속으로 들어가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거릿?”

“카이든?!”

나는 놀라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안개 사이로 언뜻 은발을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마거릿.”

카이든의 목소리였다.

자연스레 에녹과 잡은 손이 떨어졌는데, 화를 낼 거란 예상과 다르게 에녹은 뜻밖에도 말없이 한 발자국 멀어졌다. 그 나름대로 카이든과 나를 배려한 모양이다.

“카이든.”

나는 카이든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그의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그답지 않은 반응이다.

“무사했구나. 다행이야. 다행이야…….”

그가 같은 말을 계속 중얼거리며 숨이 막히도록 나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나 진짜 돌아 버리는 줄 알았어, 네가 어떻게 된 줄 알고…….”

카이든은 초조함과 불안함이 가시지 않는 듯 재차 나를 끌어안으며 내 목덜미에 뺨을 문댔다.

“너야말로 괜찮아? 어디 있었던 거야?”

한참을 아무 말 없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들이쉬던 카이든이 고개를 들고 촉촉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사라지고 쭉, 안개 속에 있었어.”

그가 다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마거릿.”

어쩐지 카이든의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 있는 것 같기도 해서 나는 일단 그가 진정할 때까지 그를 조용히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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