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던 에녹이 내 크로스백에서 소독약을 꺼냈다.
“제가 할게요.”
“불편하잖아. 해 줄게.”
그가 말할 때마다 귓가에 숨결이 닿았다. 제기랄.
“잠깐, 윽.”
양손으로 그의 팔을 잡았다가 순간 통증이 밀려와서 몸을 굳혔다. 에녹이 부드럽게 나를 토닥였다.
“마거릿, 긴장 풀어.”
그 말을 듣고 있으려니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선생님이 그러고 있으면 긴장 절대 못 풀 것 같은데요. 제기랄, 신종 고문법인가.
나는 결국 체념하고 그에게 몸을 완전히 맡기기로 했다. 몸에 힘을 쭉 빼고 그의 가슴팍에 등을 기댔다.
“재킷은 잠시 벗는 게 좋겠군.”
그의 말에 나는 쓰라림을 참아 내며 재킷을 벗고 다시 그에게 기대앉았다.
티셔츠 한 장만 입고 그에게 기대 앉아 있으니 등 뒤로 성난 가슴 근육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기분이 좀 이상하네.’
나는 괜스레 민망해지는 감각을 애써 떨치며 에녹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뒤에서부터 나를 끌어안은 자세로 그가 천천히 내 배에 난 상처를 살폈다. 지금 그의 표정이 어떤지 볼 수 없어 조금 아쉬워졌다.
‘……아니 잠깐? 내가 미쳤나? 표정을 못 봐서 왜 아쉬워?’
“흡.”
그 순간, 에녹이 상처에 붙인 거즈를 천천히 떼어 냈고, 나는 딴생각을 하던 것도 잊은 채로 숨을 참았다.
“쉬이, 조금만 참아.”
귓가에 나를 다독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못 참을 정도는 아닌데 그가 이렇게까지 도자기 다루듯이 조심스러워하니, 괜히 상처가 더 아픈 것처럼 느껴졌다.
에녹은 거즈를 떼어 낸 뒤에 소독약 뚜껑을 열었다.
“괜찮겠나.”
내 의견을 구한 그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주 조심스럽게 상처 위에 소독약을 뿌렸다.
“흐읏.”
제기랄, 쓰라려 죽겠네! 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그의 가슴팍에 뒷머리를 기댄 채 눈을 질끈 감았다. 에녹이 거즈를 다시 붙여 준 뒤에 한 손으로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잘 참았다.”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지나칠 정도로 달콤했다.
에녹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던가? 어쩐지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까 평소보다도 더 에녹 같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가 상처를 피해 내 허벅지를 잡아 슬쩍 자신에게로 다시 밀착시켰다.
“묶어야 하니까, 조금만 더 참아.”
에녹은 곧 잘라 온 나무줄기를 길게 풀어 우리가 앉아 있는 커다란 나뭇가지 아래로 던졌다.
강한 힘에 의한 반동으로 반대편에서 나무줄기가 올라왔다. 몇 번 그런 식으로 줄기를 감으며, 나와 그의 다리를 나무줄기에 단단히 묶었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고 그에게 매미처럼 붙어 있어야만 했다. 결국 나는 체념하고 편하게 그에게 몸을 기댔다. 딱딱하고 불편한 소파에 기대 잔다고 생각해야겠다. 나무 기둥에 기대는 것보단 낫지.
그때 어깨에서 에녹의 얼굴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미안하다, 나도 불편하긴 매한가지라.”
그가 변명을 하듯 중얼거리고는 내 맨 어깨에 자신의 뺨을 문댔다.
“에녹.”
“응?”
“일부러 그러는 거죠, 지금.”
“무슨 소리지.”
“저 고문하는 거잖아요.”
그러자 잠시 고개를 들었던 에녹이 뒤이어 웃음을 터뜨렸다. 피곤에 젖어 지독히도 낮게 잠겨 있는 웃음소리는 다소 선정적이었다.
“마거릿.”
“네?”
“긴장되나.”
그가 웃음이 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지금 저 놀려요?”
“이제 알았나 보군.”
그가 내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생각했다.
‘하, 제기랄. 놀림받는데 왜 기분이 좋은 거지? 내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
* * *
에녹의 행동에 난데없이 설레며 긴장했던 것도 잠시,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깊이 잠에 빠져 버렸다.
바로 전날, 제나스의 오두막에서 날밤을 새웠는데 에녹을 만나며 긴장이 완전히 풀어진 모양이다. 불편한 자세로도 푹 잠이 든 걸 보니 말이다.
그러다가 나는 별안간 눈을 떴다. 어디선가 괴상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슬쩍 눈을 뜨자 뭔가가 이동하고 있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나와 에녹이 앉아 있는 나무 아래로 어떤 거대한 무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움찔했는데, 그 작은 동작에도 에녹이 바로 눈을 떴다.
“저건…… 나와 로드가 마주쳤던 진화한 마물인 것 같군.”
에녹이 내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그의 말대로 내가 기억하는 소설 속 마물들은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를 표본으로 했던 것 같은데(실제로 지금껏 만나 왔던 마물들도 그러했고), 저 마물들은 도무지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
두 발 달린 거대한 물고기 형상을 하고 있는 것도 있었으며, 애벌레처럼 생겨서 꿈틀꿈틀 기어가고 있는 것도, 두 발로 걷는 머리가 큰 에일리언 같이 생긴 것도 있었다.
모두 어떤 동물에서 시작돼 끔찍하게 변형된 것처럼 보였다.
날이 밝아 오는 아침이었는데도 그것들은 무리 없이 숲을 활보하고 있었다.
‘소름 돋아.’
여기서 떨어지면 X 되는 거다.
“괜찮아.”
그때, 귓가로 따뜻한 말 한마디가 와 닿았다.
“혼자가 아니니까, 괜찮을 거다.”
확실히 에녹이 마음먹고 싸운다면 저런 마물들은 소탕까지는 못 해도 어찌저찌 해치우고 달아날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는데 목소리만으로 이렇게 안도감을 주다니.
다리 위에서 얌전히 잠들어 있던 은지가 슬그머니 눈을 뜨고선 나를 쳐다보다가 아래를 보고 화들짝 놀랐는지 펄쩍 뛰었다.
녀석이 아래를 봤다가 나를 봤다가 다시 아래를 보고 나를 본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해 달란 뜻 같았다. 나는 나도 모른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녀석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나는 혹시 떨어질까 봐 녀석의 몸통을 꽉 붙들었다.
우리는 괴수들이 시야에서 전부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숨을 죽이고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괴수들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는 긴장이 쫙 풀렸다. 나는 에녹의 품에 안기듯 늘어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나무 위에 있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그대 덕에 살았군.”
에녹이 민망하게 그런 말을 덧붙였다.
“혼자였으면 힘들었을 거예요.”
에녹의 옅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에게 안겨 있는 탓에 그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직도 민망해.’
나는 멋쩍게 그의 품에 안겨 있다가 슬그머니 허리를 세웠다.
“이제 내려갈까요? 카이든이 무사할지 무척 걱정되네요.”
상황을 회피하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카이든이 걱정됐다. 카이든이라면 분명 살아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그대 말대로 이러고 있을 건 아니군.”
매번 으르렁거리며 카이든을 견제하더니, 에녹도 카이든이 걱정되긴 했나 보다.
우리는 다리를 묶었던 끈을 풀고 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다리를 두드리며 미간을 좁혔다.
“다리 저려.”
그러자 에녹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더니 나를 올려다봤다.
“풀어 줄 테니, 잠깐 앉아 봐.”
“아니요. 괜찮아요.”
“푸는 게 나을 텐데.”
“이 정도는 참아야죠.”
나는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그가 직접 다리를 풀어 준다니. 그럼 분명 심장이 또 널뛰기를 할 텐데 그러다가 에녹이 내 심장 소리를 듣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건 안 돼. 내 다리 지켜.’
나는 고개를 저으며 쥐가 난 다리를 두어 번 털고는 들고 있던 에녹의 재킷을 입고 크로스백을 고쳐 멨다.
“갈까요?”
에녹이 아쉬운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바닥에 있는 은지를 주워 어깨에 올리고는 에녹과 함께 다시 카이든을 찾아 숲속을 헤맸다.
* * *
카이든은 홀로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앞서가던 은지도, 에녹도 사라졌다.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안개는 계속해서 짙어지기만 할 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제길, 오두막이 바로 앞에 있었던 것 같은데.”
3층 구조의 커다란 오두막을 발견한 순간 갑자기 짙은 안개가 그들을 휩쌌다. 그 뒤로는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오두막이 있었던 방향으로 걷기만 하면 안개가 짙어졌다. 마치 그가 오는 걸 방해라도 하는 듯이.
그렇게 한참을 주변을 경계하며 천천히 걷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안개가 걷히며 코앞에 문이 나타났다.
카이든은 곧장 문에 부딪히고 말았다.
안개가 지나치게 짙었던 탓에 물체가 가까이 있는 줄도 모르고 걷기만 했다. 그는 짜증스레 욕설을 뱉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거, 아까 그 오두막인데?”
그는 어느새 아까 그 거대한 3층짜리 오두막 앞에 서 있었다.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지만, 은지도 에녹도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고는 오두막의 나무문을 빤히 노려보았다.
이 안에 마거릿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망설임은 사라졌다. 그는 찬찬히 문을 열었다.
오두막 내부는 고요했다.
1층 거실엔 벽난로에서 불이 타닥타닥 타들어 가고 있었고 그 앞에는 빈 해먹이 걸려 있었다.
오두막 밖으로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어서인지 내부는 랜턴이 필요해 보일 정도로 어둑했고 몹시 스산했다.
그때,
쿵.
위층에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XX, 뭐야.”
카이든은 작게 욕설을 중얼거리며 찬찬히 계단 앞으로 다가갔다. 슬쩍 위를 쳐다봤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마거릿이 위층에 있는 건 아닐까.
카이든은 잠시 고민하다가 곧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그렇게 올라간 2층엔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바닥에 챌 정도로 많은 쓰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는 코를 틀어쥐고 2층을 차근히 훑었다. 별다른 건 없었지만 이전까지 꽤 많은 사람이 지내던 오두막이었다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쿵.
이번에도 위층에서 소리가 났다.
카이든은 저도 모르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 소리가 꼭 마치 그를 부르는 것 같았다.
‘혹시 마거릿이 구조요청을 하는 건가?’
그것밖에는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는 황급히 계단을 뛰어올라 3층에 도착했다.
3층은 1층과 2층보다도 더 을씨년스러웠다. 게다가 쓰레기로 인해 2층의 악취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옷자락으로 코를 막고 주변을 훑어보니, 계단 옆에 있는 굳게 닫힌 문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악취 같았다.
“소리 난 곳이 여기인가?”
문에는 ‘<안식의 방> 봉인’이라고 적힌 팻말이 달려 있었다.
안식의 방이라니. 의아한 얼굴로 팻말을 읽어내린 카이든이 문고리를 돌렸다.
문은 찬찬히 열렸다. 방 안엔 창문이 하나도 없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컴컴했는데, 그가 문을 열며 빛이 조금 비쳐 들어와서 내부가 어렴풋이 보였다.
방 한가운데엔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그 가운데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의자엔 사람이 하나 앉아 있었다.
“……마거릿?”
카이든이 놀라서 그쪽으로 다가가자,
쾅!
문이 닫혔다.
놀라서 닫힌 문을 돌아본 사이 뒤에서 무언가 화르륵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든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의자 밑에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마법진을 일정 간격으로 에워싸고 양초가 놓여 있었다. 문이 닫힘과 동시에 그 양초에 불이 붙은 듯했다.
의자에 앉은 사람은 은발을 한 여성이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기절한 상태인 건지 미동도 없다.
“이봐.”
카이든이 의아한 얼굴로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순간.
잊혀져 있었던 기억들이 일순 되살아나 그의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 * *
교황청 깊숙한 곳, 지하 실험실.
바닥에는 기하학적인 형태의 기호들이 빼곡이 새겨져 있다. 그 위에 어린 카이든이 누워 있다.
기호들과 함께 카이든을 둘러싸고 양초가 타오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