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에고가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가방에서 무거워 보이는 짐을 덜어 내 자신이 메고 있는 나뭇잎 가방에 옮겨 담았다. 대부분은 그릇, 나무칼 등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이었다.
“됐습니까?”
디에고가 다소 가벼워진 가방을 루제프에게 건넸다. 루제프가 조금 멋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디에고는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앞서 걸었다.
“성녀님과 왕세자 저하께서는 따라오시겠지요?”
루제프가 중얼거리자 디에고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스달 저하께서 무기를 갖고 계시니 괜찮을 겁니다.”
그들은 흔들 다리가 끊어진 뒤에 마거릿, 에녹, 카이든이 차례로 사라지자 그야말로 혼란에 빠졌다.
남섬까지는 거리가 상당했기에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은 물론, 다른 방법으로도 의사소통이 어려웠다.
하지만 곧 남섬에 있던 아스달이 거대한 나뭇잎을 잘라 별 표시를 만들어 보이고서야 디에고와 루제프는 아스달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아차렸다. 처음 목적 그대로 별 표시가 그려진 장소에서 보자는 뜻이었다.
하지만 나침반도, 지도도 없는 디에고와 루제프가 길을 나서기엔 심히 문제가 많았다.
결국 갑론을박 끝에 왔던 길을 표시해 두고 길을 잃었을 시엔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 결정을 내린 뒤에야 그들은 북섬의 서쪽 방향을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솔직히 의외였습니다. 바로 성녀님을 찾으러 가실 줄 알았는데.”
루제프의 말에 디에고가 묵묵히 길을 걸으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성녀님은 보기보다 나약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플로네 영애의 생사를 알아보는 게 더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디에고가 슬쩍 루제프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게 어쩐지 ‘네 걱정이나 해라’라는 듯이 들려서 루제프는 불만스레 입매를 비틀었다.
“플로네 영애도 그렇게 나약한 분은 아닙니다. 분명 살아 계실 겁니다.”
그녀를 향한 신뢰는 견고했으나, 실은 루제프도 불안했다. 속에서 들끓고 있는 불안감을 애써 잠재우며 그녀가 무사할 거라고 끊임없이 되새김질했다.
“솔직히, 다른 분들의 부재보다 플로네 영애의 부재가 가장 크다는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디에고가 그런 뜻밖의 말을 꺼냈다.
“누가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천만한 섬인데, 왜인지 영애만은 무사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사라질 거라곤…….”
“플로네 영애께선 아무래도 그런 믿음을 주는 분이시긴 하죠.”
루제프는 씁쓸하게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나. 이렇게 생사도 알지 못하게 되었는데.
디에고가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진심입니다.”
* * *
은지는 위치 추적기를 붙인 것처럼 내가 있는 곳은 잘만 찾아오면서 다른 사람들의 위치 같은 건 몰랐다.
나는 주섬주섬 크로스백을 뒤적거렸다.
“카이든 물건 같은 거 없나? 냄새 좀 맡으면 은지가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 녀석을 진짜 개라고 생각하는 건가.”
에녹의 반문에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가방을 내려놨다. 은지가 혀를 내민 채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은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결국 에녹과 함께 발로 뛰어 카이든을 찾으러 다녔다.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린 적이 없었다.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숲속을 헤맸지만, 카이든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안개는 완전히 걷혔는데, 우리가 숲의 어디쯤에 있는지는 여전히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제나스의 오두막 근처인 것 같은데. 대체 오두막은 어디 간 거지?”
아우우우우!
어디선가 들리는 늑대 울음소리에 에녹이 검을 빼어 들고는 주변을 살폈다.
“일단 하룻밤 몸을 숨길 곳을 찾아봐야겠군.”
나는 제나스에게서 받은 조명탄을 꺼내 장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마물이 낮에도 돌아다니는 거라면, 아침을 기다리는 것도 답이 아니란 거잖아요.”
“그렇지. 숲속이나 강가 주변도 마물에게 포위당할 위험이 있다.”
에녹의 말을 들으며 나는 찬찬히 숲속을 둘러보았다.
마침 우리가 있는 숲속은 뿌리가 단단하고 상당히 두꺼운 나무들이 모여 있는 밀림 같은 곳이었다.
나는 에녹을 다시 돌아봤다.
“나무 위로 올라가죠.”
에녹이 나를 따라 나무 위를 올려다봤다. 나무를 타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방법은 이것뿐이었다.
“떨어질 위험이 있을 것 같은데.”
에녹의 중얼거림에 나는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정글에는 밧줄을 대신할 만한 질기고 두터운 나무줄기들이 많은 법이니까.
“몸을 묶어 두면 될 것 같아요. 자다가 몸이 기울어도 바로 추락하지는 않을 테니, 낙상을 대비할 수 있고요.”
나는 적당한 나무줄기들을 골라 에녹에게 내밀었다.
“그 검으로 잘라 주실래요?”
나는 에녹이 긴 장검으로 나무줄기를 쳐내는 걸 얌전히 지켜봤다.
팔에 감겨 있던 은지가 눈치를 보더니 얌전히 어깨 위로 올라가 목덜미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그간 눈치가 쌓였는지, 곧 내가 팔을 사용할 것 같으니 어깨 위로 피신을 한 모양이다.
‘귀엽기는.’
에녹은 상당히 많은 양의 나무줄기를 가볍게 한 팔로 들더니 옆구리에 끼고는 나를 돌아봤다.
나는 올라갈 나무를 눈대중으로 고르고 있었는데,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마거릿.”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그리고 고요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대가 정말로 다른 사람일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긴 했다. 그것도 꽤 자주.”
“네? 그게 무슨…….”
나는 놀라서 말을 끝맺지 못하고 얼어붙은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동요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도 헷갈리지는 않아. 내가 좋아한 건 지금의 그대거든. 그건 알아줬으면 해.”
낮은 음성이 귓가를 간질거린다. 그가 무슨 의도로 내게 이런 말을 한 건지 몰라 나는 그저 입만 벙긋거렸다. 이대로 심장이 멎어버리는 건 아닐까.
그러자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에녹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서 조금 떨어졌다.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니, 아무 말도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군.”
나는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한 건 지금의 그대’라니. 그 말이 귓가에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이건 헷갈릴 수조차 없는 완벽한 고백이다.
예기치 못한 고백을 들어서인지, 문득 그와 처음 만났을 적이 떠올랐다.
처음의 나는 그에게서 도망칠 생각뿐이었다. 그가 무서웠다. 언제 날 죽일지 몰라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가 언제든 돌변해서 나를 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처받지 않기 위해 그를 피했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살아남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마음은 아니겠지만, 내 마음 역시 이전과는 달랐다.
“마거릿.”
멀어지던 에녹이 나를 돌아보며 불렀다. 따라오지 않고 뭐 하고 있냐는 얼굴이다.
나는 상념을 접었다. 그가 아무것도 내게 강요하지 않고, 아무것도 묻지 않아 줘서 고마웠다.
나는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함께 하룻밤을 지낼 나무를 골랐다.
에녹의 어깨를 밟고 내가 먼저 나무에 올라갔고 뒤이어 에녹이 올라왔다. 바지를 입고 있어서 나무를 타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다.
우리는 상당히 높은 위치의 나뭇가지 위에 자리를 잡았다. 올라오면서 배에 난 상처가 굉장히 쓰라리고 아팠지만, 최대한 내색하지 않았다.
그때, 에녹이 먼저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앉더니 자신의 다리 사이로 손을 두드렸다.
“이리 와.”
“어……. 꼭 그래야만 할까요?”
나는 그를 마주 보고 앉아서 곤란한 얼굴로 물었다. 내 물음에 에녹은 외려 이상하단 듯이 되물었다.
“그쪽에는 등을 기댈 만한 곳이 없지 않나. 그렇다고 덩치가 큰 내가 그대 앞에 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가 휑하니 뚫려 있는 내 등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슬쩍 뒤를 돌아봤다가 할 말이 없어서 침묵했다. 그러곤 조금 망설이다가 슬금슬금 그에게로 다가갔다.
나는 그의 눈치를 잠시 보다가 슬며시 그의 앞에 앉았다. 그와 살을 맞대는 건 어색해서 나도 모르게 뻣뻣하게 등을 곧추세우게 되었다. 등 뒤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몸을 묶어야 하니까, 편히 기대도록. 그러고 잘 건 아니지 않나.”
“그야 그렇지만…….”
그와 스킨십을 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냥 포옹하는 것과 백 허그는 조금 다르지 않나?
‘어색한데.’
나는 쭈뼛쭈뼛 살며시 등을 기댔다. 어깨에 있던 은지가 내려와 내 무릎 위에 앉았다. 긴장이 돼서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아씨, 어깨가 좀 결리는 것 같은데. 이미 자세를 잡았는데 여기서 다시 움직이는 건 민망하고.’
불편한 자세에 고통스러워하며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고민하던 와중이었다.
“실례하지.”
지독히도 낮은 음성이 귓가에 꽂혔다. 뭐라 반문할 새도 없이 허리로 두터운 팔이 감겼다.
“어?”
그가 나를 살짝 들어 자신의 앞에 바짝 끌어당겨 오더니 그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도록 했다.
자세가 한결 편안해졌다. 다만 그와 바짝 밀착한 탓에 굉장히 민망했고 잠깐 움직였다고 상처가 쓰라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거즈에 피가 밴 채로 상처 치료를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상비약은, 가방에 있나?”
귀신같이 내 상태를 알아차린 에녹이 내게 물었다. 뚜껑을 단단히 닫아둬서 물에 빠졌어도 상비약은 쓸 만할 거다. 아마도?
“아…… 네.”
나는 아까부터 고장 난 로봇처럼 멍청한 대답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가 내 어깨에 턱을 올렸다.
귓가에 숨결이 스쳤다. 긴장으로 머리카락이 바짝 서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