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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19)화 (119/234)

“이거 현실 맞죠?”

어쩐지 명치가 콱 막혀 체증이 생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에녹이 천천히 나를 품에서 떼어 냈다.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차분하고 잔잔한 금색 눈동자가 내 얼굴을 살폈다.

그가 천천히 손을 내려 내 손을 잡았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부드럽게 맨살에 감겼다. 흔들림 없는 고목처럼 완강한 얼굴로 나를 보던 그가 내게 말했다.

“현실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이 손을 놓을 생각은 없으니까.”

나는 가만히 맞잡은 손을 내려다봤다.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 에녹은 종이 활자 속의 인물이 아니다.

나는 문득 정말로 마거릿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휘어지는 법 없이 나만을 향해 뻗는, 이 단단하고도 곧은 나무 같은 남자의 손을 잡아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다시 고개를 들고 에녹의 고요한 시선과 마주했다. 그가 다른 손으로 내 뺨을 다정하게 매만졌다.

무언가가 발밑을 치대는 느낌에 고개를 내려 보니, 은지까지 내 무릎 위로 힘겹게 기어 올라와 저를 봐 달란 듯이 요란을 떨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에녹과 맞잡은 손을 풀고 은지의 몸통을 두 손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혀를 날름거리는 은지를 보다가 에녹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요?”

“다른 이들은 모르겠다. 로드와 나는 마거릿, 그대를 따라 곧장 강에 뛰어들었거든.”

“아아, 강에 뛰어 들었……. 네?!”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잠시 말문이 막혀서 입만 벙긋거리다가 결국 소리치듯 되묻고 말았다.

“제정신이에요?”

내 물음에 에녹이 건조한 웃음을 터뜨렸다. 자조적인 미소에 가까운 그런 웃음이었다.

“제정신이면, 그런 짓을 했겠나?”

너무 단호하게 인정을 해 버려서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에녹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동요 없는 얼굴로 은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녀석이 그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는 것 같더군. 그래서 로드와 함께 뒤따라오던 중이었고…….”

그러고는 난처한 얼굴로 대답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오두막을 본 것 같은데, 갑자기 숲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렸다. 그 뒤로 로드를 놓쳤어.”

“아, 오두막!”

나는 화들짝 놀라서 주변을 훑었다. 나와 에녹이 있는 곳은 안개가 걷힌 깊은 숲속이었는데, 오두막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현상이군. 분명 오두막의 크기가 제법 컸고.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는데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지다니.”

에녹이 나를 따라 주변을 훑으며 중얼거렸다.

“카이든도 얼른 찾아봐야겠네요.”

내가 그의 말에 대답하고 있을 때였다.

스스스스-

내 팔에 감겨 있던 은지가 팔을 감고 빙글빙글 돌며 관심을 요구했다. 에녹이 은지를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이 녀석이 네 위치를 알려 줬으니, 칭찬은 해 줘야겠군.”

은지가 고개를 스윽 내밀고는 나를 올려다보며 눈을 살며시 감았다. 쓰담쓰담 해 달라는 건가?

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녀석을 보다가 조심스레 녀석의 민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러자 내 팔에 몸을 감고 있던 녀석이 기분이 좋았는지 혀를 내밀고는 꼬리 끝을 살포시 흔들었다.

에녹은 나를 빤히 보다가 미간을 잠시 좁히더니, 입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그러고는 내 어깨에 둘러 주며 물었다.

“피가 밴 것 같은데, 괜찮나.”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내려 거즈를 붙인 배를 쳐다봤다. 다행히도 피는 아주 살짝만 배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 심각해 보이진 않았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래도 치료는 하는 게 좋겠군.”

“우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다음에요. 저보단 에녹의 상처가 더 심각해요.”

나는 찢어진 재킷과 곳곳에 난 그의 상처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엄청 아플 것 같은데 에녹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이 정도는 괜찮다. 그대 말대로 안전한 곳으로 먼저 이동하는 게 좋겠군.”

그렇게 말한 에녹이 차분한 눈으로 내 복장을 살폈다.

“그리고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이 옷.”

에녹이 내가 입은 바지와 티셔츠를 가리켰다. 그러고는 내 배를 다시 보더니 슬쩍 고개를 돌렸다.

몸에 딱 붙는 티셔츠였던 데다가 길이가 짧아서 제국민들이 보기에는 다소 남사스럽고 희한해 보이긴 할 것 같다.

에녹이 민망해하고 있으니, 괜스레 나도 민망해져서 어색하게 웃었다.

“옷이 굉장히 독특하군.”

에녹의 말에 나는 어쩐지 신이 나서 다리 한쪽을 들어 그에게 보여 줬다.

“바지 진짜 편해요. 이제야 살 것 같아요.”

단정하게 가다듬어진 에녹의 차분한 눈은 따뜻하고 다정한 색을 하고 있었다.

마거릿의 기억 속에 있는 에녹 황태자란 사람은, 신사적이지만 늘 어딘가 권태롭고 나른하며 감정이 없어 사람 같지 않은, 그런 남자였는데.

눈물점이 애달프게 찍힌 야한 눈으로 그렇게 바라보면 반칙이잖아. 나를 보는 그 시선에 담긴 신뢰가 어쩐지 간질거려서 나는 조용히 들었던 다리를 내렸다.

“그대가 편하다면, 그걸로 됐지.”

그는 의연한 표정으로 내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어떤 마법사가 절 거둬 주었어요. 다른 사람이 있더라고요. 이 옷은 그 사람이 준 거예요.”

당시엔 정신이 없어서 묻지 못했는데, 뒤늦게 나는 강에 빠진 나를 구한 게 제나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안개는, 아무래도 제나스의 짓인 것 같은데. 마법인가? 하지만, 이 섬에선 마력을 쓸 수 없는데…….’

잠깐.

“나도 이 몸으로는 제어당하고 있는 마력을, 그 사람은 어떻게 썼을까?”

제나스가 분명 그런 말을 했었는데. 그 말이 조금 이상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

‘이 몸으로는’이라니. 그렇다면 그의 원래 몸이 따로 있기라도 하단 걸까? 원래의 몸으로는 마력을 사용할 수가 있는 거고?

“다른 생존자라는 건 무슨 소리지?”

뒤이어 에녹의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정신을 차리고 그를 올려다봤다.

“아, 그 오두막에 사람이 살고 있었어요. 그가 저를 구해 줬거든요. 구해 주긴 구해 줬는데…….”

마지막엔 마물에 의해 죽을 뻔한 걸 방치했지.

“얘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우선 해가 지기 전에 카이든부터 찾는 게 어때요? 해가 지면 마물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녹의 피곤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물이 또 진화했다.”

“네?”

“어제 낮부터 로드와 마물들을 상대했다. 이제는 낮에도 안심할 수 없어. 그리고 더는 짐승의 형태가 아니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괴생명체가 되어 있더군.”

낮에도 마물이 나타난다니.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기분이다. 제나스와 나눴던 대화가 이렇게 빨리 현실이 되다니.

“우선 그대 말대로, 로드를 찾는 게 시급하겠군.”

에녹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어깨 위에 걸쳐진 재킷을 벗어 그에게 돌려주려고 했는데 그가 다소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괜찮겠나. 그 옷은…….”

에녹이 천천히 내가 벗은 재킷을 다시 어깨 위에 걸쳐 주며 말끝을 흐렸다.

그리고 무심결에 닿은 듯 내 티셔츠를 훑고 난 뒤, 놀란 듯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이를 악물고는 고개를 숙이더니 내 재킷을 꼭 쥐었다.

“옷, 입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가 너무 민망해하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재킷을 껴입었다. 그의 재킷도 너덜너덜했지만, 그래도 입는 게 낫겠지 뭐.

내가 얌전히 재킷을 입자 그가 그제야 안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폭주에 대한 불안감이 완전히 가신 상태의 에녹은 조금의 틈도 없이 완벽해 보였다.

그린 듯한 눈썹과 날카로운 콧날, 황홀할 정도로 깊고 진한 황금색 눈동자, 붉은 입술과 완강한 턱. 그의 얼굴엔 그 모든 게 조화롭고 완벽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잘생긴 건 생존에 쓸모가 없지만, 마음의 안정을 주는 것 같기는 했다. 나는 조금 전까지 제나스와 그가 만든 안개로 혼란스러웠던 가슴이 차차 진정이 되어 가는 걸 느꼈다.

안정이 되고 나자 어쩐지 머리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가만히 나를 보고 있던 에녹이 말했다.

“이제, 그만 로드를 찾으러 가 보지.”

그의 말에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죠.”

우선 카이든을 찾고 나서 제나스에 대한 얘기를 더 자세히 해 줘야겠다.

그리고 오두막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는지 또한 알아내야 했다.

* * *

루제프는 심각하게 무거운 카이든의 배낭을 메고 힘겹게 이동했다.

“도와주실 생각 없습니까?”

루제프가 디에고를 돌아보며 물었지만, 디에고는 아주 점잖은 얼굴로 거절의 뜻을 밝혔다.

“재차 말씀드리지만, 버릴 건 버리는 게 좋습니다.”

디에고의 냉정한 말에 루제프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게 당신 짐이어도 그런 소리를 쉽게 했겠습니까?”

“제 짐이었다면 외려 버린 것을 잘했다고 말씀드릴 것 같습니다. 버거운 짐을 안고 가다가 위험에 처하는 것보단 그게 현명한 선택입니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대체 이 무거운 걸 카이든은 어떻게 들고 다닌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방을 버릴 수는 없었다. 카이든이 들고 다니긴 했으나, 가방의 내용물은 모두 마거릿이 필요로 하는 것들뿐이었다.

루제프가 기어코 가방을 버리지 않고 낑낑거리며 걸어가자 디에고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서 가방을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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