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18)화 (118/234)

20. 재회

나는 꽤 오랫동안 안개 속에 있었다. 아니, 실은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대체 제나스의 목적이 뭘까. 그가 실험자든 아니든, 이 섬에 그토록 오래 남아 있는 목적이나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제나스의 오두막에서 있었던 일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대체 이 X 같은 안개는 뭐야!’

한참을 그렇게 안개 속을 헤매고 있을 때, 어디선가 쇠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캬악!

나는 순간 놀라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잠시 눈살을 찌푸렸다.

“제기랄.”

상처가 벌어졌는지 거즈에 피가 살짝 배어 나왔다.

스르르르르- 사아아아아-

뒤이어 들리는 소리는 어쩐지 뱀의 울음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설마…….’

“은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은지의 이름을 불렀을 때,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꼬물꼬물 움직이는 게 보였다.

이윽고 머리를 들이밀며 등장한 새하얀 뱀이 날 발견하고는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은지야!”

바닥을 빠르게 기어온 녀석이 내 주위를 정신없이 빙글빙글 돌았다.

어쩐지 전보다 더 커진 것 같은 게, 이러다 정말 나중엔 아나콘다 마물들처럼 거대해지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마거릿.”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등을 돌렸다.

어느덧 안개는 완전히 걷혀 있었고 나는 초목이 왕성하게 자란 숲속에 앉아 있었다.

‘뭐야, 여긴 어디지?’

그리고 그 사이로 흑발을 가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들고 서 있는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온통 검붉은 피로 범벅이 된 모습이었다. 난 그의 너덜너덜한 옷가지와 상처로 가득한 몸뚱어리를 보고 몹시 놀랐다.

잠깐, 상처? 피?

나는 순간 그가 발작 상태인 건 아닌지 놀라서 주춤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는 이성이 있는 상태였다.

커다란 키와 다부진 어깨, 말랑한 곳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견고한 풍채를 가졌음에도, 나를 보는 그는 아릿하게 지워질 듯 희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곧 무너지기라도 할 듯이. 피칠갑한 남자가 지을 법한 얼굴은 아니었다.

“에녹?”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바닥에 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에녹이 한걸음에 내게 다가왔다.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숨을 쉬기가 버거울 정도로 꽉.

나는 그의 어깨 상처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에녹, 괜찮아요?!”

그러나 에녹은 그저 나를 세게 끌어안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한참 뒤에야 나를 놔준 그가 내 양 뺨을 잡고는 안색을 살폈다.

조금 전까지 지워질 듯 아련한 분위기를 풍기던 남자는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그제야 생기가 흘렀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나는 그대가…….”

에녹은 채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고개를 내리다가 내 배 위에서 시선이 딱 멈췄기 때문이다.

나는 그제야 조금 전 놀라서 바닥에 주저앉은 탓에 거즈에 피가 배어 나온 걸 떠올렸다.

“아, 에녹. 이건…….”

“하……. 이번에도 지켜주지 못했군. 미안하다.”

에녹이 찬찬히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조금 당황해서 양 팔을 뻗어 배를 슬며시 가렸다.

나를 보던 에녹의 눈썹이 못마땅한 듯이 치켜 올라갔다. 나는 설마 그가 피를 보고 발작하는 건가 싶어 얼른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그가 당황한 듯 한숨을 내쉬고는 이마를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에, 에녹? 괜찮아요?”

에녹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에녹?”

내가 재차 그를 부르자 그제야 그가 입을 열었다.

“괜찮다, 폭주는. 이젠 완벽히 통제할 수 있어.”

“……그게 정말이에요?”

에녹이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 속에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이 짙게 깔려 있었다.

“고맙다.”

“네?”

“살아 있어 줘서.”

간단한 말이지만, 그 말의 무게가 상당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댔다.

“마거릿, 그대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대를 대신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래서 극복할 수 있었다. 모두 그대 덕분이야.”

언젠가 카이든도 비슷한 말을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어떻게 그가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운 건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그도 더는 고통스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거잖아.

그가 다시 천천히 팔을 뻗어 이번엔 조금 부드럽게 나를 끌어안았다. 내 뒷목을 잡고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가 긴장이 풀린 듯이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보고 싶었다.”

항상 애매한 말로 돌려 말하던 그가, 이번엔 정말로 확고하게 자신의 감정을 내게 말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꿈인가? 그럴지도 몰랐다.

조금 전까지 난 분명 제나스의 오두막에 있었는데, 갑자기 안개가 끼지 않나, 거기다가 현실감 없게 에녹까지 이렇게 바로 등장하다니.

“저 어떻게 찾았어요? 물살이 굉장히 빨라서 꽤 멀리 떠내려 왔는데.”

“그대가 어디 있든, 이 섬을 전부 뒤져서라도 찾아냈을 거야.”

얌전히 안겨 있던 난 천천히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어디 있든 나를 찾았을 거라고…….’

내가 그들을 직접 찾아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내가 처음 세웠던 계획처럼 벙커로 도망치거나 섬 어딘가에 숨어버리면, 그대로 끝날 관계라고 생각했으니까.

지금껏 나는 그들이 먼저 나를 찾아올 거라는 가능성은 완벽히 배제하고 있었다.

그건 내가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기대 본 적 없는 삶을 살아서겠지?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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