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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16)화 (116/234)

* * *

대낮부터 시작된 마물과의 전투는 노을이 질 때까지도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더군다나 에녹과 카이든은 강을 등지고 포위되어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탓에 전의도 한풀 꺾인 상태였다.

카이든은 피를 뒤집어쓴 에녹을 흘끗 보고는 불안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괜찮으신 겁니까, 전하.”

카이든이 어떤 의미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에녹은 단번에 알아들었다. 그가 혹여나 발작 증세를 보이며 폭주를 하진 않을까 하는 우려가 담긴 물음이었다.

“괜찮아.”

에녹은 턱에 튄 핏자국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내며 대답했다.

“제어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해야만 했다.

마거릿의 생사 여부조차 확인되지 않은 급박한 상황이다.

게다가 지난번 마물 소탕을 위해 의도적으로 폭주를 한 뒤 어떻게 되었는가. 그녀가 다칠 뻔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마거릿이 안전하다는 걸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가 이성을 잃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반드시 극복해야만 한다. 자괴감에 젖어 정신 줄을 놓아버리는 걸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가 없다.

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그 여파로 떨리는 손등에 울긋불긋 핏줄이 섰다.

그들을 둘러싼 마물들은 그동안 본 적 없는 괴상한 모습들을 하고 있었다. 남섬에서 보아온 마물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그중 하나가 제 무리를 가르고 빠르게 달려왔다. 다리가 있는 물고기 형태의 괴상한 마물이었다.

캬악!

그것이 카이든을 향해 뛰어들며 거대한 입을 벌렸다.

날카롭고 촘촘한 이빨을 보며 카이든은 반 바퀴 돌아 등을 맞댄 에녹에게 공격권을 넘겼다. 에녹이 곧장 물고기의 주둥이 아래서부터 위로 장검을 꽂아 올렸다.

물고기 마물의 공격을 시작으로 눈치를 보던 마물들이 다시금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크와아악!

카아악!

노을이 지고 어느덧 짙은 밤이 왔지만, 전투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포위된 상태로 마물들이 계속해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제기랄, 모양 빠지지만, 그냥 도망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카이든이 벅찬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피칠갑을 한 채 마물들을 향해 검을 겨누고 있던 에녹이 고단한 숨을 뱉었다. 그리고는 마물을 차분하게 훑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는 게 좋겠군.”

하지만 그들을 에워싼 마물들의 수가 상당했다. 도망칠 틈을 찾기도 어려워 보이는 상황이었다. 상황은 계속해서 그들이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그 순간 에녹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가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른다. 마거릿을 찾지도 못한 채.

“망할 놈들! 빠져나갈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카이든이 잔뜩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에녹은 섬뜩하리만치 표정 없는 얼굴로 달려드는 마물을 다시 한번 거뜬히 베어낸 뒤 카이든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아주 찰나, 긴장이 풀렸다.

그 순간 에녹은 곧바로 발작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런 XX! 아무래도 한쪽만 공략을 해서 길을 뚫는 건……, 전하?!”

카이든의 고함 소리가 아득히 멀어졌다.

에녹의 귓가엔 본인의 거대한 심장박동 소리, 그리고 뜨거운 숨소리만 가득 찼다.

하아, 쓰읍, 하아.

시야가 핏빛으로 붉었다. 에녹은 환각처럼 붉게 물든 핏빛 말고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격동하던 감정들이 차차 가라앉으며 편안해진다. 점차 스스로에 대한 제어력을 잃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무력하게 무의식에 지배되며, 그 자신이 누구였는지 자각조차 희미해져 수면 밑으로 사라질 때 즈음이었다.

‘절 지킬 생각하지 마시고 본인 걱정부터 하세요. 저 없으면 이 섬에서 하루도 못 버티실 거잖아요.’

‘미안하단 말은 그만 해요. 당신 잘못 아닌 거 아니까.’

맑고 청량한 여자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어른거렸다.

‘에녹. 저는 살고 싶어요. 당신도 살아남았으면 좋겠고. 이건 진심이에요.’

마거릿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리는 순간, 온통 핏빛으로 붉어졌던 에녹의 시야가 천천히 본래의 색을 찾아 돌아오기 시작했다.

제어해야만 한다.

폭주를 하면 마물을 전부 죽일 수 있을지언정, 트라우마를 진정으로 극복하는 것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겠지.

그렇게 되면 당장의 위험으로부턴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겠지만, 언젠가 그로 인해 마거릿이 위협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된다.

차라리 마물에게 물어 뜯겨 죽더라도, 이성을 가진 채로 마거릿을 생각하다 죽는 편이 좋았다.

또렷하게 초점이 잡히며 흐릿했던 정신이 돌아왔다.

그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는 폭주를 통제하는 게 가능했다. 완벽하게.

에녹이 온전하게 정신을 차리자마자 발견한 건, 강가 끝자락까지 카이든을 몰아세운 마물 두 마리가 그를 향해 달려드는 장면이었다.

에녹은 곧장 그에게로 달려갔다. 달려드는 마물 하나를 빠르게 검으로 베어내고는 카이든을 거칠게 밀어냈다.

그때 카이든을 향해 달려들던 다른 마물 한 마리가 에녹의 어깨를 물었다.

“제기랄!! 전하!!”

카이든의 단말마 같은 비명을 끝으로 에녹은 마물과 함께 날아가 강 속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마물과 함께 강 속 깊이 처박혔다. 하지만 지지 않고 마물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놈의 몸에 검을 쑤셔 넣었다.

에녹은 명을 달리한 마물을 팽개치고는 곧장 물 위를 향해 헤엄쳐 올라갔다. 일렁이는 수면 너머로 거센 불길이 휘몰아치는 게 보였다.

푸하.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자마자 어두컴컴한 하늘을 가르고 거대한 불길이 분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화아아아악-

하늘 높이 치솟은 불길은 강가 앞에 카이든을 포위하고 있는 마물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크와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마물들의 괴성이 공기 중에 난무했다. 고막을 찢을 듯한 소음에 카이든이 귀를 잠시 틀어막고 주변을 훑었다.

그 사이 에녹은 어깨에 커다란 상흔을 남긴 채로 피를 뚝뚝 떨어트리며 강가에서 걸어 나왔다.

“XX, 무사했네. 그럴 줄 알았지만, 어떨 때 보면 전하께서 저 마물보다 더 무섭습니다?”

카이든이 그를 발견하고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에녹은 검에 묻은 물기를 한번 털어낸 뒤, 카이든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불길 덕분에 마물들 사이로 틈이 생긴 것이다.

“로드, 이쪽으로.”

카이든과 에녹이 그 사이를 빠져나오자 멀리서 불을 내뿜고 있는 은색 뱀이 보였다.

“역시 너일 줄 알았어. 야, 은지.”

카이든이 그를 부르자 용케도 자신의 이름을 알아들은 뱀이 그들을 흘끔 곁눈질로 보았다. 곁눈질로 흘끔거린 이유는 마물들을 불에 태워버리는 작업이 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왁!!

그러나 워낙에 마물의 수가 많아서 은지 혼자서는 모든 마물을 죽일 수 없었다.

에녹과 카이든은 결국 은지에게 달려갔다. 제게로 달려온 두 남자를 올려다 본 은지가 입을 다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바람에 불길이 멎었다.

카이든은 어리둥절해하는 은지를 단숨에 안아들고는 에녹과 함께 달렸다.

카아악! 크와악!

등 뒤로 마물들의 괴성과 함께 그들의 뒤를 쫓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든은 은지를 안고 뛰다가 슬며시 녀석을 내려다봤다.

“너 어디 갔었냐?”

그의 물음에도 은지는 눈만 깜빡이며 영문을 모르겠단 듯이 안겨만 있었다.

그 순진무구한 얼굴을 보며 카이든은 혀를 찼다. 애초에 마거릿이 없으면 녀석이 뭘 원하는지도 알 수가 없으니 의사소통은 빠르게 포기했다.

“로드, 잠깐.”

한참 가파른 숨을 뱉으며 뛰고 있을 때, 에녹이 카이든의 앞을 막아섰다.

막다른 길이었다. 등 뒤로 들리는 마물들의 괴성이 점차 가까워지고 지고 있었다.

“제길.”

카이든이 욕설을 중얼거리는 사이 그의 손목을 타고 내려온 은지가 바닥에 투두둑, 하고 떨어졌다.

“어? 야!”

카이든이 놀라서 손을 뻗었다. 은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어디론가 꼬물꼬물 기어가더니 그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은지를 보던 에녹이 말했다.

“따라오라고 하는 것 같군.”

그제야 카이든은 은지가 마거릿에게 각인한 상태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은 부화하기 전부터 마거릿을 따라다니던 놈이었지.”

알일 때도 그녀를 귀신같이 쫓아다녔으니, 아마 멀리 떨어져 있다 해도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에녹이 가까워지는 마물들을 보며 카이든에게 다시 고갯짓을 했다.

“가지.”

에녹의 말에 카이든은 들고 있던 단검을 고쳐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그들은 그렇게 은지를 따라 움직였다.

* * *

내 허리를 휘감은 마물이 뭔지 도무지 정체를 모르겠다. 코끼리처럼 기다린 코를 가지고 있었는데 눈은 보이지 않고 날카로운 이빨만이 시야에 어른거렸다.

나는 3층 높이에서 거꾸로 매달린 상태로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3층 창문으로 몸을 내민 제나스가 내게 말을 걸었다.

“참, 메그 일행 중에 성녀가 있던데.”

“XX, 뭐?”

“욕 잘하네.”

제나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냐?

“잘 지켜봐.”

“알아듣게 말해! 이거 풀어주고!”

“나는 마물의 눈을 빌리는 것뿐이지, 조종하는 게 아냐. 걔들이 그냥 널 좋아하는 거야.”

제나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마물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마물에 의해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상태로 제나스에게 소리쳤다.

“마물이 날 왜 좋아해?”

“메그한테서 맛있는 냄새가 나나 보지. 다른 사람하고는 다른.”

어쨌든 별미로 생각한다는 거잖아!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제기랄.

제나스는 그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는 듯한 얼굴로 창문에 기대 나를 구경 중이었다.

“성녀를 잘 지켜보란 건, 무슨 말인데?”

“그냥, 그 성녀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뭘?”

“직접 물어봐. 나도 궁금하네.”

망할 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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