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솟는 공포감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머저리처럼 앉아 있다가 방문이 닫혀 버리면 어떡해! 공포 영화 보면 꼭 그렇던데!
나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뛰쳐나왔다.
다행히 문이 닫혀 방 안에 갇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조금 전 보았던 검은 옷자락이 네 번째 방 안으로 사라지는 광경을 목격했다.
제기랄. 차라리 제나스가 얼른 오두막에 돌아와 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되다니.
“저거, 마치 저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것 같은데…….”
혹시 아는가. 두 번째 방에서 주운 노트 같은 걸 또 발견하게 될지. 이를테면 이 섬의 비밀에 조금 더 가까워질 만한 단서 같은 것 말이다.
그래. 조금이라도 오래 살아남기 위해선, 용기를 내야 한다.
나는 굳은 결심을 하고 세 번째 방을 지나 네 번째 방문 앞에 섰다. 3층의 가장 끝 방이었다. 잠시 심호흡을 한 뒤 문을 열었다.
하지만 우려했던 유령 같은 건 없었다. 생각보다 방은 깔끔했다. 침대에 책상, 그리고 옷장. 두 번째 방과 구조가 비슷했다.
비운 지 오래된 것 같았던 두 번째 방과 달리, 이곳은 조금 전까지도 누군가가 지냈던 것처럼 생필품 같은 것이 책상에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차분하게 방 안을 뒤졌다.
“별건 없어 보이는데.”
그러다가 책상 서랍에 글자들이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첫 번째 서랍에는 제국어로 ‘개조’라고 적혀 있었다.
개조?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슬그머니 서랍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 놓인 빨간 리볼버 권총처럼 생긴 조명탄을 발견했다.
“어? 뭐야, 내 거랑 같은 거네?”
조명탄 옆면에 ‘알레아’라고 적힌 것마저 내 것과 같았다.
탄알 주머니도 함께 놓여 있었는데, 안에 든 탄알은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넉넉하게 들어 있었다.
나는 크로스백에서 물먹은 조명탄을 꺼내서 서랍에 있던 것과 슬그머니 바꿔놓았다. 그런 다음 넉넉한 탄알 주머니도 챙겨 가방 안에 넣었다.
“이 방 주인이 직접 개조한 건가?”
아무래도 서랍에 적힌 ‘개조’라는 글자와 일반적이지 않은 조명탄의 생김새를 보면 내 추측이 맞을 것 같다.
두 번째 서랍에는 ‘생필품’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든 라이터를 꺼냈다. 그리고 내 물먹은 지포라이터를 내려놓고 새 라이터를 가방 안에 넣었다.
“혹시, 이 물건들은 다 제나스 건가?”
만약 그렇다면 다시 돌려놓아야 하나?
도덕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다. 하지만 목숨이 걸린 상황에선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민했다.
고민이 길어질 무렵 노트의 주인이 썼던 말이 문득 생각났다. 생존보다 중요한 건, 내가 나임을 잊지 않는 거라고.
‘역시 돌려놔야…….’
“맞아. 그거 내 거.”
“아아악!!”
갑자기 등 뒤로 들려온 목소리에 난 화들짝 놀라서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등을 돌리니 제나스가 문가에 기대서서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어, 언제 왔어?”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서 있던 미소년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방금.”
나는 제나스가 방 안을 찬찬히 둘러보는 걸 보고 입을 열었다.
“……그냥 궁금해서 올라와 본 거야. 함부로 들어와서 미안해.”
내가 옆방에서 일기장을 주웠다는 것까지는 모를 테니, 굳이 그 말은 하지 말아야겠다.
“사생활 존중해 달라니까.”
제나스가 다소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정 표현이 없던 사람이 저렇게 말한다는 건, 엄청 화났다는 거다.
제나스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나는 주춤주춤 그를 경계하며 뒤로 물러났다. 등 뒤에 책상이 부딪혔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다.
내게로 가까이 다가온 제나스가 내 손에 들린 조명탄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그건 가져.”
“이 조명탄, 네가 개조한 거야?”
“응. 개조라기보단 제작.”
제나스의 말에 나는 납득했다. 하긴 권총을 가지고 조명탄을 만들든, 조명탄을 가지고 권총을 만들든, 어느 쪽으로도 개조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아예 새로 제작했다고 하면 말이 되지.
“쓸 만하지 않았어?”
제나스가 고개를 슬쩍 기울이고는 내 손에 들린 조명탄을 가리켰다.
나는 문득 내가 이 조명탄을 산 정상에서 주웠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이 물건이 왜 거기 있었을까. 또 그뿐만이 아니라…….
나는 그에게 조명탄 옆면에 새겨진 알레아란 글자를 보여 줬다.
“이 글자도 네가 직접 새겨 넣었어?”
“응.”
“이게 무슨 뜻인데?”
“너도 알잖아.”
“모르는데.”
나는 일단 시치미를 떼고 봤다. 그러자 제나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 이쪽 언어가 아니지. 알레아, 이 섬의 이름이야.”
그는 분명 지구 사람이 아닌데, 영어를 읽을 줄 알았다.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잉그람 왕국 사람이 어떻게 영어를 알아……? 너무 이상한데?’
혹시, 이 섬에 있는 무수히 많은 현대 물건 중에 도서 같은 것도 포함이 되어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그가 천년 동안 이 섬에 살며 다른 언어를 학습했을 수도 있다.
“섬의 이름? 이쪽 언어가 아니라는 건 무슨 소리야?”
나는 일단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그러자 제나스가 곰곰이 고민하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답했다.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리고는 또다시 입을 다물고 뜸을 들인다. 나는 인내를 가지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참 뒤에야 그가 덧붙였다.
“우리 누나가 지은 이름이야.”
“누나가 있었어?”
너무 놀라서 반문했는데, 뒤늦게 그가 ‘함께 온 사람들은 다 죽었다’고 말했던 게 떠올라 아차 싶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는 누나는 지금 없다는 건데…….
걱정했던 것과 달리 제나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나타가 그 언어에 대해 공부했어.”
“이게 어느 나라 언어인데?”
그의 누이 이름이 아나타였던가 보다. 이번에도 짐짓 모르는 척 그를 떠보기 위해 물었는데, 제나스는 어깨만 으쓱했다.
“그건 아나타한테 물어봐.”
“너희 누나? 여기 계셔……?”
“아…….”
내 물음에 제나스가 그제야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인형 같던 얼굴에서 표정이 드러나니 정말 어린 소년처럼 보였다.
“그러네, 없네.”
제나스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전히 누나를 잊지 못하고 있는 건가.
누나가 얼마나 오래 살아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누나랑 있다가 혼자 남겨졌다면 그럴 만도 할 것 같다. 납치범은 혹시 사람들을 납치만 해오고 천년 동안 섬을 방치해 둔 걸까?
“그럼 나는 몰라.”
“그렇게 무책임한 답이 어디 있어. 궁금하게 만들었으면 책임을 져.”
“몰라.”
제나스는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더는 그것에 대해 묻지 말라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망할, 대체 뭐야. 궁금증을 늘 반만 해결해줘서 사람을 더욱 미치게 한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마거릿의 몸에 한국인인 내가 빙의해 있다는 건 제나스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는 사실이다.
‘얼른 에녹, 카이든과 이 일에 대해 상의를 하면 좋겠는데.’
“아, 그리고…….”
제나스가 갑자기 종종걸음으로 책상 앞으로 다가오더니 맨 아래 서랍을 뒤적였다. 내가 미처 열어보지 못한 서랍이었다.
그는 서랍 안에서 손전등과 망원경을 꺼내 내게 건넸다. 내가 밤낚시 할 때마다 애타게 찾았던 손전등이었다.
“이건 선물.”
나는 얌전히 그에게서 손전등을 받았다. 그리고 손에 들린 물건을 빤히 바라보다가 조용히 그에게 물었다.
“너 나랑 같이 안 갈 거라면서. 그런데 왜 이렇게 잘 챙겨줘?”
내 물음에 제나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난 메그가 살아남았으면 좋겠어.”
“왜?”
“다들 쉽게 죽어서 안타까웠거든.”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고 싶었는데, 원체 표정이 없는 아이라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제나스, 너 정도면 탈출할 방법을 찾았을 것 같은데 왜 탈출을 못 한 건지 난 이해가 안 돼.”
천년 동안 몇 번이고 문이 열렸을 텐데, 제나스 같은 천재 마법사가 탈출을 하지 못했다는 건 아무래도 납득하기 어렵지.
“탈출 못 하니까. 그리고 난 여기가 좋아.”
“여기가? 대체 뭐가 좋다는 거야, 위험하잖아.”
“그래서 재밌어.”
마물이 나오는 이 미친 섬이 재미있다고?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는데 역시 속은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이 미친 섬에서 천년을 살았는데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을 리가 없지.
“이 섬에 마물이 돌아다니는 건 알고 있지?”
내 물음에 제나스가 곰곰이 생각하는 얼굴로 천장을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 대답했다.
“걔들이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야.”
“……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 어쩜 이렇게 양파처럼 까도 까도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처음엔 다들 평범한 생명체였어. 그런데 점점 진화를 하더라.”
“마물이?”
“응.”
마물이 일반적인 생명체를 표본으로 하고 있던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인가 보다. 그리고 진화는 현재진행형인 거고.
“놈들이 노을 질 때부터 밤까지만 나타나던데, 그건 왜 그런지 알아?”
“원래는 안 그랬어.”
“원래는 안 그랬다니?”
“처음엔 새벽에만 나타났었어. 그 다음엔 밤에, 그리고 지금은 노을이 질 때 나타나. 근데 모르지, 점점 강해지고 태양에 대한 면역력도 생기는 것 같으니, 낮에도 나타날지.”
제나스의 말이 맞다면 이제는 낮에도 마물 걱정을 해야 하는 건가. 세상에, 정말 끔찍했다.
그때, 제나스가 갑자기 턱을 괴더니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게 있는데…….”
그의 붉은 눈동자가 내 안면을 샅샅이 훑는다. 섬뜩하도록 샅샅이.
“마물들이 메그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
그의 말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마물이 나를 왜 좋아하는데? 그리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아는데?’
나는 목 끝까지 올라온 질문들을 삼켜냈다. 제나스가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제나스는 내 반응 따위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메그 일행 중에 마력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던데.”
설마 지금, 오두막 앞에서 에녹이 마물들을 향해 검기를 사용했던 걸 얘기하는 걸까?
그건 내가 에녹에게 마력을 나눠준 건데, 마력을 쓰는 사람이 나인 것까지는 모르는 모양이다. 제나스가 심각하게 고민하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도 이 몸으로는 제어 당하고 있는 마력을 그 사람은 어떻게 썼을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마물의 눈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어. 다루기도 힘들고 마력을 못 써서 공격력도 없지만, 그 정도는 가능해.”
‘뭐? 마물의 눈?’
나는 그제야 카이든이 했던 말을 다시금 떠올렸다. 분명 늑대형 마물이 그를 감시하듯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는데. 설마 했지만, 진짜로 마물의 눈을 통해 누군가 지켜보고 있었다니!
“우리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왜?”
“계속 지켜봤던 건 아니야. 심심할 때만? 그리고 사람이 있으면 지켜보는 게 당연하지 않아?”
제나스의 반문에 나는 어디서부터 되짚어 지적을 해야 할지 몰라 넋을 놓았다.
“제니 할……, 아니, 제나스. 나 미치겠으니까 한꺼번에 말해주면 안 돼? 왜 이렇게 감질나게 하나씩 말하는 거야? 묻는 거에 제대로 답도 안 해주고?”
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이어 말했다.
“왜 지켜보기만 한 건데? 우리가 있는 줄 알았다면 우리를 만나러 올 수 있었잖아. 그리고 마력도 없는데 마물의 눈은 어떻게 빌렸어? 혹시 그동안 네가 마물을 조종한 거야? 마물의 진화와 네가 관련이 있는 거니?”
궁금한 게 너무 많았다. 너무.
그러자 제나스가 재미있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메그가 재미있어 보여서 알려주는 거야. 나, 원래 이렇게 친절하지 않아.”
재미있어 보인다고?
말문이 막힌 내 얼굴을 제나스가 빤히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상하게 너만 달라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제나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열린 방문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다시 나를 봤다.
“그런데, 마거릿.”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물었다.
“다 봤어?”
“……어? 뭘?”
“오두막 말이야. 다 둘러본 거냐고.”
“……아니?”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부정부터 하고 봤는데 제나스가 대뜸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하는 짓이 아주 웃긴다는 듯이.
한참을 그렇게 웃던 그가 웃음을 뚝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뭘 아니야. 지금 3층에 와 있으면서.”
나는 숨을 멈췄다. 제나스가 섬뜩한 붉은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내가 올라오지 말랬잖아.”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등 뒤로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솜털이 바짝 설 정도로 위압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어느덧 내 발 밑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지고 있었다. 등지고 선 창문 밖으로 나타난 무언가의 그림자였다.
나와 마주 보고 있던 제나스가 내 어깨너머를 바라보더니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안 도와줄 거야. 이건 네가 잘못했어.”
“그게 무슨 소……!”
챙그랑!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창문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랗고 두터운 무언가가 쑥 들어와서 내 허리를 휘어 감았다. 정체 모를 마물이다.
놀라서 제나스를 쳐다봤는데,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순식간에 창문 밖으로 끌려나갔다.
“아악! X 같은 마물! 여기 3층이라고!”
그것도 3층 밖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