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심을 굳히고, 나는 천천히 계단을 밟고 내려갔다.
계단은 깊지 않았다. 몇 걸음 내려가지 않고 금방 문에 도달했다.
바로 지하실인 것이 아니라, 지하실 문을 열고 들어가야 비로소 지하실에 당도할 수 있는 모양이다.
등 뒤로 열린 문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고, 그 덕에 나는 지하실 문에 적힌 팻말을 읽을 수 있었다.
<문>
“문?”
당연히 문이겠지. 보통은 지하실이라든지, 창고라든지 그런 단어가 적혀 있지 않나?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조용히 문고리를 돌렸다.
달칵, 달칵.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제나스에게 물어봐야 하나? 아마 알려 주지 않을 테지만, 그가 귀가하면 시도라도 해봐야겠다.
나는 조용히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혹여나 제나스가 예상보다 빨리 올까 봐 주변을 살피고 창밖을 한번 확인한 뒤,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역시나 악취가 지독했다. 나는 코를 틀어막고 2층 복도를 걸었다. 2층 끝자락에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긴장된 얼굴로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아침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시간임에도 2층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복도에 난 창문이 두 개 뿐이었고 그마저도 굉장히 작았기 때문이다.
어제 살펴봤던 대로 방문은 모두 열려 있었고,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다.
그렇게 3층으로 올라왔는데, 계단을 오르자마자 계단 옆에 있는 이상한 문 하나를 발견했다.
“뭐지?”
그곳에서는 강한 악취가 풍겨 왔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 문을 여는 게 과연 옳은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사실 무서웠다.
‘호러는 딱 질색이라고.’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손바닥에 차오른 땀을 옷에 대충 닦았다. 그리고선 잔뜩 긴장한 얼굴로 천천히 문고리를 잡았다.
달칵, 달칵.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그게 왜 이렇게 안심이 되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가 방문에 적힌 팻말을 발견했다. 먼지가 가득해서 나는 손으로 대충 먼지를 훑어 냈다.
<안식의 방> 봉인
문에 적힌 팻말엔 그런 글자가 적혀 있었다.
“안식의 방? 봉인?”
굉장히 수상쩍다.
“여긴 왜 이렇게 수상한 게 많지.”
나는 괜히 오싹해져서 재빨리 몸을 돌리고선 3층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3층은 2층보다 훨씬 밝았다. 복도의 창문 수가 많고 큼직해서 햇살이 고스란히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시야가 밝다고 해서 섬뜩한 분위기가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어쩐지 3층은 2층보다 더 추운 것 같았다. 이 열대 기후에서 추위를 느끼다니. 그것도 해가 뜬 시각에 말이다.
어쩐지 솜털이 쭈뼛 설 정도로 소름 돋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침착하게 복도를 훑었다. 3층 역시 2층과 마찬가지로 바닥에 쓰레기가 가득했고 몹시 지저분했다.
“제기랄, 여긴 방문이 다 닫혀 있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닫힌 문을 여는 데엔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다. 안에서 뭐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문은 총 네 개였다.
첫 번째 방은 침대도, 옷장도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안도감이 밀려오는 한편, 이러다가 쓸 만한 정보를 하나도 얻지 못하는 건 아닌가 걱정도 됐다.
“뭐라도 정보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두 번째 방문 앞에서 잠시 심호흡을 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쿵.
문안에서 들려온 소리에 나는 동작을 멈췄다. 제기랄, 이게 무슨 소리야.
나는 문고리에서 조용히 손을 뗐다. 도저히 이 문은 못 열겠다. 결국 두 번째 방은 건너뛰기로 했다.
그리고 세 번째 방문을 열고 안에 별 게 없음을 확인하고 있을 때였다.
콰앙!
“아, XX! X나 깜짝이야!!”
두 번째 방문이 거칠게 열렸고, 나는 화들짝 놀라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심장이 무사한지 확인하며 잠시 심호흡을 했다.
두 번째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나는 순간 온몸이 그대로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공포감이 정신을 압도했고 몸이 덜덜 떨려 왔다.
왜 공포 영화 주인공들이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바로 도망치지 못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XX, 무서워!!’
하지만 다행히도 열린 방문을 통해 뭔가가 튀어나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싸한 공기만이 복도 중을 맴돌았고,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한 바람이 불어서 문이 열린 것 같다. 그냥 그렇다고 믿는 게 정신 건강에 이로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방 안을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
난 손에 나무칼을 단단히 움켜쥐고 천천히 두 번째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문밖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안을 살폈다.
방 안엔 침대 하나, 옷장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창문 앞에 책상도 하나 놓여 있었다. 방 안에도 창문이 있어서 어둡지는 않았는데, 굉장히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여타 다른 방들이 쓰레기가 가득해 지저분했던 반면에, 이 방은 굉장히 깔끔했다. 먼지만 좀 앉았을 뿐, 누군가가 지내던 방처럼 보였다.
안을 둘러보던 난 책상 앞에 뭔가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공책처럼 보였다. 방금 전에 들렸던 소음은 저게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난 듯했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나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갔다. 햇살이 비추고 있어서 방 안이 환했는데도 공기가 서늘하고 스산했다.
“일기인가?”
천천히 노트를 들어 펼쳤다. 흙먼지가 가득해서 손으로 대충 먼지를 쓸어내리고는 적힌 내용을 훑었다.
노트 안에는 누군가의 유려한 필체로 적힌 메모가 가득했다. 그리고 알아볼 수 없는 글씨들 사이에 명확히 눈에 들어온 문장이 있었다.
죽어야겠다.
나는 순간 섬뜩해서 페이지를 넘기다가 멈칫했다. 그 밑에 또 다른 글이 쓰여 있었다.
모두가 죽었다. 나는 살아야만 할까. 섬에서 탈출할 수 없을 것 같다. 영원히. 이건 사는 게 아니다.
누가 쓴 글일까. 제나스가 쓴 글일까? 아니면 제나스가 말한 그의 죽은 일행? 나는 조용히 일기를 넘겼다.
점점 나를 잃어 가는 것 같다. 그래서 기록을 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일들을.
내가 읽고 있는 이 일기가 필자가 말하는 기록용 노트는 아닌 것 같다. 기록을 한 책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조용히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제나스 덕분에 독은 완전히 치료가 됐다. 그동안 우리가 미쳐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 붉은 꽃. 텐타티오넴 때문이었다고 한다.
툭.
나는 들고 있던 노트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떨어진 노트를 멍하니 노려봤다.
잘못 본 게 아니다. 일단 이 글의 필자가 제나스가 아닌 것은 확실해졌다. 그리고 필자는 분명 텐타티오넴에 중독되어 있었다고 언급했다.
이상하게도 자꾸만 원작 소설이 생각난다.
필자는 ‘우리가 미쳐 있었던 이유가 텐타티오넴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분명 원작 소설에서도 유안나가 비슷한 어투로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가 미쳐 있었던 건, 모두 이 꽃 때문이야.-
그런 대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왜 그게 생각났는지 모르겠지만, 그래서인지 노트에 적힌 문장이 묘한 기시감을 느끼게 했다.
나는 다시 천천히 노트를 주워 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그녀가 모든 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줬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열쇠를 받았다.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라고 했다.
‘그녀? 그녀가 누구지?’
열쇠란 혹시 유안나가 가진 바로 그 열쇠와 같은 걸까?
자꾸만 유안나가 연상된다. 이상하게도.
나는 황급히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오늘 그녀가 알려 준 장소를 찾아 떠나려고 한다. 그곳에서 안식을 취할 예정이다. 기록용으로 쓰고 있는 책도 아마 그곳에서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다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생존보다 중요한 건, 내가 나임을 잊지 않는 거다. 나는 그녀가 내게 해 줬던 그 말을 가슴에 깊이 새겼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만 노트를 든 채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생존보다 중요한 것’.
이진주 시절, 내가 길에서 주웠던 소설책의 제목이었다. 이게 정말 우연일까?
‘필자가 언급한 그녀는 또 누구지?’
정황은 있지만, 이 노트의 주인이 유안나라고 확정 지을 만한 확실한 단서는 없었다.
‘일단 시간이 없으니까 이건 챙겨 놓자.’
나는 노트를 크로스백 안으로 구겨 넣었다. 그리고 등을 돌렸는데, 열려 있는 문 사이로 누군가의 옷깃이 스쳐 지나가는 게 보였다.
‘……X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