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다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찾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도 정말 신기할 정도긴 했다.
‘뭐, 나랑 카이든은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긴 했지.’
하지만 절벽에서 떨어질 땐 물살이 잔잔한 곳에 수직 낙하를 했었다. 섬 중앙을 흐르는 그런 큰 강도 아니었다.
‘이번에 흔들 다리가 끊어지면서 빠졌던 곳은 큰 강이었고 분명 물살이 빠른 지점 같았는데, 어떻게 살아 있는 걸까?’
하긴, 이 섬에서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여야지. 그간 추리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나는 다시금 제나스가 천 년을 살았다는 걸 떠올렸다. 설마 나도 앞으로 천 년을 버텨야 하는 건 아니겠지?
“천 년 동안 미치지 않느라 고생했어.”
벽난로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제나스를 격려했다. 제나스의 시선이 내 옆얼굴에 닿았다.
한동안 나를 빤히 보던 그가 내게 물었다.
“……그래 보여?”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속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렇게 보인다는 것도 대단한 거라고 생각해.”
그냥 보기에도 미쳐 보이는 카이든도 있는걸.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해먹에 누운 그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표정이랄 게 없는 미소년이 멍하니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천 년 동안 이 섬에서 뭐 하고 지냈어?”
내 물음에 제나스가 고민을 하는 듯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루할 틈은 없었어.”
뭐 했는지는 말을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나는 어쩐지 자꾸만 떠오르는 제나스에 대한 불길한 가정을 애써 꾸역꾸역 삼켜냈다.
“섬에 대해 알아낸 것 있어? 천 년을 여기 있었으면, 알아낸 게 있을 거 아니야. 우리가 왜 여기 납치되었는지, 탈출을 할 방법은 정말 없는지.”
“없어.”
“뭐?”
나는 제나스의 단호한 대답에 놀라서 인상을 와락 구겼다.
“없다고? 하나도?”
내 물음에 제나스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없어. 희망 갖지 마.”
그 말이 나는 조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섬에서는 1년마다 탈출 문이 열리는 것 아니었나?
그러나 그렇다고 정체 모를 사람에게 그 얘기를 직접적으로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조금 답답한 기분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그에게 말했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거잖아. 들어오는 길이 있었다면 나가는 길도 분명 있을 거야. 못 찾았을 뿐이지.”
그렇게 말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다소 감정이 격해졌다. 그래서 제나스를 향해 하나하나 따지고 들게 되었다.
“탈출할 방법이 없다고 이 섬에서 깨어나게 된 이유도 모르는 채로 다 포기해 버리는 건 너무 바보 같아. 넌 그렇게 안일하게 천 년을 보낸 거니?”
말하다 보니 울컥해서 목소리도 조금 높아졌다. 그런데 나를 보는 제나스는 여전히 차분했다. 그는 아주 덤덤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내가 천 년을 어떻게 보냈는지 너는 몰라.”
그의 말을 나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응, 몰라. 내가 천 년을 살아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어. 너한텐 우습게 들릴지 몰라도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나를 희한한 생물체 보듯 바라보는 제나스를 향해 재차 말했다.
“난 살고 싶어.”
내 말에 제나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도 살아 있어.”
“이 섬에 갇혀 있는 한, 나는 삶을 유보하고 있는 거지 살아 있는 게 아니야.”
그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봤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게 생겨났다.
곱게 눈꼬리가 휘어졌다. 나를 보며 그가 눈웃음을 지었다.
화려한 미소년이어서인지 예쁘게 웃는 얼굴에선 빛이 나는 것만 같았다.
“재미있는 말이다.”
제나스가 느릿하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멍하니 그의 웃음을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난 일행을 찾으러 가야 해. 내일 바로 떠나려고. 다들 날 찾고 있을 거야.”
“꼭 가야 해? 아프잖아.”
“응. 그래도 꼭 가야 해. 같이 갈래?”
“아니.”
제나스가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바라본 채 느긋하게 누워 버렸다. 나는 그런 그를 쳐다보다가 문득 벙커 지도를 떠올렸다.
에녹 일행에게 벙커에 대해 말하지 않은 건, 원작처럼 이야기가 전개될 경우 나를 위한 일종의 플랜 비로 남겨 두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제나스를 만난 지금, 그런 건 의미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 년을 이 섬에서 살았다면 그도 벙커에 대해 알고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벙커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라는 거다.
“너, 그럼 이 섬의 지리에 대해서는 잘 알겠네?”
그때, 제나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봤다. 그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럼…….”
나는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혹시 이 섬에 벙커 같은 게 있는 것도 알고 있어?”
제나스는 대수롭지 않은 질문을 받았다는 듯이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인다.
“응.”
그래,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다행이다. 그래도 쓸 만한 정보 하나 정도는 얻어 낼 수 있겠구나.
나는 젖은 크로스백에서 벙커 지도를 꺼냈다. 그러다가 지도 끄트머리에 적힌 날짜를 떠올렸다.
‘어? 잠깐, 그러고 보니…….’
잉그람 왕국력, 666년.
나는 벙커 지도 끄트머리에 적힌 연도 표기를 노려봤다.
천 년 전에 만들어진 것 같은 벙커 지도. 그리고 천 년을 살았다고 말하는 잉그람 왕국의 마법사.
‘뭐지……? 이 불길한 예감은.’
그때, 제나스가 흘끗 내 손에 들린 벙커 지도를 보며 말했다.
“주웠구나. 그건 못 봤네.”
‘뭐?’
나는 순간 올라온 반문을 삼켜 냈다. 반문 뒤에 이어질 그의 대답은 지금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마치 나를 그동안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은 말투였어.’
온몸에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카이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며칠 전에 정찰 나왔을 때, 나를 감시하는 마물을 본 적 있어.”
“보니까 늑대형 마물인 것 같더라고. 보통 그 녀석들, 우릴 보면 바로 공격하잖아. 근데 한참을 나를 쳐다만 보더니 그냥 가 버렸어. 꼭 내가 뭘 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것처럼.”
혹시. 우리를 감시하고 있던 게 제나스인가?
일단 내가 가진 정보는 최대한 공개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캐낼 수 있는 정보는 최대한 캐내야겠어.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는 집중을 하느라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척하며 태연하게 그에게 물었다.
“난 벙커에 가려고 하거든.”
나는 지도를 바닥에 펼쳐 놓고는 제나스를 올려다봤다.
“너는 여기가 섬의 어디쯤인지 알아?”
내 물음에 제나스가 느릿느릿 해먹에서 내려왔다. 몸집이 작은 데다가 행동이 느린 아이여서 그런지 한참이 걸렸다.
아, 그래. 아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지.
제나스가 지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지도를 빤히 노려봤다.
“여기.”
그러고는 그가 작은 손가락으로 어느 한 지점을 가리켰다. 섬의 북서부 끝쪽이었다. 벙커에서도 서부 방향으로 산을 넘어 한참 가야만 있는.
“내가 북섬으로 넘어오긴 했구나.”
그것도 유안나의 지도에서 봤던 별 표시가 그려진 지점이었다.
지도에서의 별 표시가 무얼 의미하는지 사실 아직 모른다.
그래서 제나스가 납치범인지, 아니면 공범일지, 그도 아니라면 정말로 우리와 같은 피해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섬의 비밀과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은 들었다.
“응. 여기. 북섬이야.”
제나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제나스를 올려다봤다.
“벙커에 가 봤어?”
“그 지도, 내가 만들었어.”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그래서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조금 답답한 마음으로 지도를 노려보았다. 실은 만날 때부터 그가 수상쩍기는 했지만, 일단 나를 어떻게 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는데…….
직접적으로 그에게 납치범인지 물어보려고 하다가, 그건 오히려 그를 자극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는 걸 상기했다.
“벙커에 뭐가 있어?”
“식량이랑 생필품……?”
“지금도 먹을 수 있는 것들이야? 부패되지 않았을까?”
“먹을 수 있을걸? 나는 음식이 필요 없어서 내버려 뒀어.”
제나스의 말에 나는 턱을 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에서도 벙커에 식량이나 보급품 박스가 가득했다는 언급이 있었지.
제나스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탈출 방법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했으니 물어 봤자 이득은 없을 테다.
그럼 또 뭘 물어야할까? 최대한 그를 의심하고 있다는 뉘앙스를 주지 않고 물어볼 만한 게…….
꼬르르르르륵.
그때, 내 배에서 엄청난 크기로 허기짐을 알렸다. 나는 너무 깜짝 놀라서 배를 움켜쥐었다.
제나스가 붉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꼬르륵! 하하!”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가 해맑은 얼굴로 아이처럼 웃었다, 사람 민망하게 XX.
그가 이렇게 강하게 감정을 내비치는 것도 만난 이래로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