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11)화 (111/234)

내 물음에 또다시 그가 나무늘보처럼 느리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네.”

“누나라고 하지 마.”

“……왜?”

“열두 살이라고 왜 거짓말했어? 너 그거 사기야. 사기죄로 잡혀가고 싶니? 아니, 싶습니까, 어르신? 아니, 할아버지? 조상님인가?”

나를 보는 제나스의 표정이 해괴하게 일그러졌다. 그를 만난 이래로 처음 보는 표정다운 표정이었다.

“외관은 누나가 누나야.”

“시끄러. 아니, 시끄러워요, 할아버지.”

내 말에 제나스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볼에 빵빵하게 바람을 불었다. 천 살이나 먹은 게 귀여운 척을 하는데 미소년이라서 그런지 무진장 귀여웠다. 제길.

“그거 싫어.”

“그럼 뭐라고 불러? 아니, 불러요?”

“……제나스? 제니?”

“천 년이나 사신 조상님을 감히 이름으로 부르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게다가 설마 지금 본인 입으로 본인을 제니라고 한 거야?”

“…….”

“그럼 제니 할배는? 제니라고 불러 달라면서.”

“누나. 싫다고.”

제나스가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섬뜩하게 말했다. 하지만 마력도 못 쓰는 섬에서 날 어떻게 죽이겠는가.

“농담이야. 제니라고 부를게.”

어쩐지 애늙은이처럼 차분하더라니. 천 년이나 살아서 그랬던 거구나.

‘천 년이나…….’

사실 제나스가 하는 말들이 현실 같진 않았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냥 이 섬에 우리보다 먼저 도착했고 오랜 시간 지나다보니, 아이가 착각한 건 아닐까?

이런저런 추측을 하다가도 다시금 절망감이 밀려왔다.

“우리 영원히 이 섬에서 못 나가는 걸까?”

내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자니, 제나스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나무랐다.

“……바보 같아.”

“기분 나쁘니까 바보라고는 하지 말아 줄래?”

“못 나가.”

“뭐?”

잘 못 들은 것 같아서 반문했다.

“이 섬에서 못 나간다고.”

하지만 제나스가 쐐기를 박듯이 한 번 더 말했다.

그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하고는 인생 다 산 할아버지처럼 고단한 한숨을 내쉬었다. 인생 다 산 할아버지는 맞을지도.

“내가 천 년이나 이 섬에 있었다고 한 얘기 코로 들었으니까, 누난 바보야.”

“나, 너보다 천년 연하야. 누나라고 하지 마.”

“그럼…….”

제나스가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더니 고민 어린 얼굴을 했다.

“메그라고 부를게.”

아직 에녹도 나를 메그라고 안 부르는데…….

“그냥 마거릿이라고 불러.”

“메그.”

“하, 됐다. 천년 산 할아버지랑 유치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해가 졌는데 얼른 움직일까? 자세한 얘기는 일단 오두막 가서 하자.”

정말로 하늘이 짙은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제나스에게 천년 동안 이 섬에서 알아낸 게 뭐가 있는지, 그동안 뭘 하고 살았는지, 일행은 어떻게 된 건지는 오두막에서 물어봐야겠다.

물론 여전히 그에 대한 경계도 놓지 않은 채였다. 천년 살았다는 얘기를 들으니까 더더욱 수상쩍잖아. 농담을 계속 하며 가벼운 태도를 보이고 긴장감 없는 모습을 보여준 것도 반쯤은 그를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도 우리는 얼마 가지 않아 오두막에 금방 도착했다.

유안나 일행과 함께 지냈던 오두막은 산속 깊이 있었는데, 여기는 넓은 강이 한눈에 보이는 장소에 있었다.

거기다가 크기도 엄청나게 컸다. 3층 높이였고, 최소 열 사람은 지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랬다.

“와. 이걸 누가 만들었을까?”

나는 오두막을 찬찬히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제나스는 코코넛을 내려놓고 총총총 나를 따라오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박수를 쳤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제스처를 하니까 좀 무서운데.

“왜 그래?”

“상처.”

그의 말에 나는 지속된 통증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하고 조심스레 배 위에 손을 얹었다. 여전히 피가 배어 나온다.

“지혈부터 하고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다.”

내 말에 제나스가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구급 약통을 품에 안고 다가왔다. 내가 발견했던 구급 약통과 생김새는 똑같았다.

그가 나를 부축해서 천천히 자리에 앉힌 뒤, 구급 약통에서 소독약과 밴드를 꺼냈다.

“지혈은 내가 직접 할게. 드레스라서 상처를 보려면 다 벗어야 하거든.”

내 말에 제나스가 약간 민망한 얼굴로 내게 약통을 넘기고는 물러났다.

“난 그럼 옷 찾으러…….”

그러고는 빠르게 2층으로 사라졌다. 저럴 때는 꼭 진짜 열두 살 아이 같기도 했다.

나는 우선 드레스를 벗고 슈미즈의 치맛단을 올려 상처 주변을 닦아 낸 뒤, 소독했다. 그리고 거즈를 붙이고 두꺼운 붕대로 배를 돌돌 감으며 간단히 지혈을 끝냈다.

때마침 제나스가 1층으로 내려왔다. 그의 품에 옷더미가 한가득했다.

“오두막에 있던 거야.”

내 의문 가득한 표정을 본 제나스가 작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내던 오두막에도 현대 물건이 있었으니 이곳에 이런 게 있다고 해서 특별히 이상할 건 없었다.

나는 그가 바닥에 내려 둔 옷들을 살폈다. 치마도 있었고 바지도 여러 벌 있었다. 티셔츠는 많지 않았다. 거기다가 사이즈도 다 내게 맞는 건 아니었고.

“아, 이건 나한테 맞겠다.”

나는 검정색 카고 바지를 하나 들었다.

‘사이즈 딱 맞겠다. 티셔츠는 없나?’

동묘 시장 매대에 깔린 구제 옷들을 살피는 소비자처럼 깐깐한 눈을 하고 나는 옷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카고 바지에 이어서 내게 딱 맞을 것 같은 흰색 무지 티셔츠를 찾았다.

이것 말고도 괜찮은 옷들이 많았는데, 사이즈가 맞아 보이는 옷은 얼마 없었고 이 야생에서 입기 적당한 옷도 몇 벌 없었다.

“신발도 있네.”

나는 옷 밑에 깔려 있던 신발 몇 켤레를 살폈다. 검정 워커가 있었다. 사이즈도 얼추 맞을 것 같았다.

“워커 잘못 신으면 발 아플 텐데.”

새것은 아니었고 누군가가 오래 신어서 조금 닳아 있어 괜찮을 것 같기도 했지만, 그래도 물집이 잡히는 건 사양이다.

‘나중에 양말이라도 구하면 신어야겠어.’

나는 일단 워커는 따로 빼 두고 방금 고른 옷가지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얌전히 서서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던 제나스가 멍하니 나를 쳐다봤다.

“끝났어?”

“응. 2층에서 갈아입고 올게.”

내 말에 제나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가 한마디 덧붙였다.

“2층만 다녀와.”

굉장히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2층만?”

“3층은 가지 마.”

“왜?”

“거기엔 내 방이 있어.”

“그게 이유야?”

“사생활 존중.”

그가 깔끔한 문장으로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저렇게 말하면 더 올라가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라는 걸 모르나?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그리고 천천히 2층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그래도 소독과 지혈을 했다고 어쩐지 상처가 덜 아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럴 거면 그냥 아까처럼 내가 1층에 있고 제나스더러 2층에 올라가 있으라고 할걸.’

그 생각을 못 했다. 그렇게 후회를 하며 나는 2층을 코앞에 두고 걸음을 멈췄다.

‘혹시 2층에 마물 같은 게 나오는 건 아니겠지?’

의심해서 나쁠 건 없다. 이전에 거미가 마물로 진화해 버린 걸 본 적도 있지 않나.

나는 어깨에 메고 있던 젖은 크로스백이 잘 있는지 확인하고는 천천히 2층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2층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더러워.’

바닥에 널브러진 쓰레기들이 가득했다. 나는 조용히 코를 틀어막았다. 악취가 풍기는 것 같았다.

‘곰팡이 냄새에 음식물 쓰레기 냄새도 섞인 것 같고.’

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식된 것들이 많았고, 그중에선 내가 익히 아는 현대 물건들도 있었다.

나는 쓰레기장 같은 바닥을 살피며 복도를 걸었다. 2층에는 총 네 개의 방이 있었고 나는 그중 가장 멀쩡해 보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덩그러니 나무 침대 하나만 놓여 있는 방이었다. 나는 문을 닫자마자 물에 젖은 드레스를 벗어 던졌다.

“하. 살 것 같다.”

슈미즈 안에 입고 있던 드로어즈만 남기고 벗었다가 문득 상의 속옷이 없다는 걸 깨닫고 곧장 슈미즈를 반으로 찢어 다시 입었다.

‘슈미즈는 얇은 천 소재라 금방 마를 테니 괜찮겠지.’

우선 드로어즈 위에 카고 바지를 입고 슈미즈 위에 흰색 티셔츠를 껴입었다.

“와, 진짜 눈물 나올 것 같아.”

실제로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이렇게 편한 옷을 입을 수 있다니, 너무 감동적이어서.

찢어진 드레스는 챙길까 하다가 그냥 버리기로 했다. 짐이기도 하고, 천 대용으로 쓸 만한 건 아까 제나스가 가져온 옷더미들 중에서 골라도 충분할 거다.

나는 다시 2층 복도로 나왔다. 쓰레기들 중에 쓸 만한 게 있을지 골라 보려고 했는데, 왜 바닥에 굴러다니는지 알 것만 같은 물건들밖에 없었다.

‘하긴, 괜찮은 물건이면 제나스가 바닥에 굴러다니게 두지는 않았겠지.’

제나스에겐 천 년의 지혜 같은 게 있지 않을까. 거기다가 카이든보다 더 대단한 마법사인 것 같고. 물론 카이든도 천 년쯤 살면 그런 마법사가 될 것 같지만.

나는 3층으로 올라가는 길을 보고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더 늦어지면 제나스가 의심할 것 같아서 일단은 얌전히 내려가기로 했다.

1층으로 내려가니 제나스가 벽난로 앞에 만들어진 해먹에 누워서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러고는 조용히 엄지를 치켜든다.

“잘 어울려.”

“엄청 편해.”

나는 그의 옆에 조심조심 앉아 벽난로를 쳐다봤다. 내가 옷을 갈아입는 사이, 그가 불을 피워 둔 모양이다.

얌전히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불씨를 바라봤다. 제나스의 정체가 무엇이든, 일단 지금의 그는 내게 지나칠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그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산더미였는데, 안정을 찾고 나자 그보다는 일행들에 대한 걱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들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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