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10)화 (110/234)

사람이 더 있었다니. 우리보다 먼저 온 걸까? 아니면 더 늦게? 그 사람들도 제국인이었을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하는 제나스의 심정은 얼마나 참담했을지 모르겠어서.

나는 잠시 말을 골랐다.

그런데 내가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전에 제나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르겠어.”

“아…….”

“처음엔 날짜를 센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놓쳐 버렸어.”

제나스가 코코넛을 품에 잔뜩 안고 높낮이 없는 아주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구나.”

그럼 언제 왔는지 물어봐도 우리가 깨어난 날짜와 정확히 대조를 해 보는 건 어렵겠다.

“누나도 혼자 왔어?”

“나도 일행이 있었어. 지금 강물에 떠밀려 와서 일행과 헤어진 상태고. 우리도 너처럼 눈을 떠 보니 이 섬이었거든.”

“누나는 이름이 뭐야?”

“아, 소개가 늦었지? 마거릿 로즈 플로네, 마거릿이라고 불러도 돼. 란그리드 제국 사람이야. 플로네 공작 가문의 귀족이고.”

“귀족…….”

제나스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귀족 처음 보나? 나는 제나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당황했다.

‘황태자와 왕세자를 보면 기절초풍하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잠시 다른 일행들을 떠올렸다.

‘다들 무사할까? 무사해야 할 텐데.’

섬이 꽤 넓었던 것 같은데, 만나려다가 길이 엇갈리기라도 하면 어떡해. 역시 흔들 다리 근처로 가 보는 게 좋으려나?

내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남 걱정이나 하고 있다니.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제나스에게도 딱히 무기랄 건 없어 보였다. 우선 안전한 곳에서 상황 파악을 한 뒤, 카이든과 에녹을 찾을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누나, 내가 지내던 오두막이 있는데, 갈래?”

“여기 오두막이 있어?”

“응.”

제나스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오두막은 남섬에서 우리가 지내던 것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믿어도 될까?’

하지만 이 어린 소년이 섬의 비밀과 뭔가 연관이 있는 거라면, 그게 뭔지 확인을 해야 했다.

더구나 일단 해가 저물면 어디든 위험했다.

“누나 상처. 치료해 줄 수 있어.”

소년이 내 상처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오두막에 약이 있거든.”

“약? 그게 정말이야? 상처를 치료하는 약이 있는 거 맞아?”

내 물음에 그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쳐다본다. 부연설명을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래, 가자.”

약이 있다는 소리에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상처를 이대로 놔뒀다가 염증이 생기면 큰일이다.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어린아이가 우리 모두를 납치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물론 계속 긴장하고는 있어야겠지만.

나는 물기를 말리기 위해 자갈밭 위에 널어 둔 물건들을 쳐다봤다. 내 시선을 따라 그쪽을 함께 쳐다본 제나스가 말했다.

“신기한 거 많다.”

“네가 입고 있는 옷도 특이해.”

내 말에 제나스가 고개를 내려 멍하니 자신의 옷을 훑었다.

“오두막에서 찾았어. 편해.”

오두막에서 찾았다니, 내가 오두막에서 가방과 운동화를 주운 것처럼 제나스의 오두막에도 그런 현대 물건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 다른 옷도 있어.”

그렇게 말한 제나스가 잠시 내 차림새를 노골적으로 훑었다. 순간 부끄러워졌다.

종아리가 훤히 드러난 드레스는 아주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드레스의 소맷단에 달린 피슈도 다 찢어져 있었고, 네크라인에 달린 리본과 보석은 뜯어져 있었다.

게다가 물에 젖어 축축했고, 냄새는 나지 않았지만 매우 찝찝했다.

제나스가 내 너덜너덜한 드레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나도 갈아입자.”

“오두막은 여기서 가까워?”

“여기서 조금만 들어가면 돼.”

제나스의 말에 나는 바닥에 떨어진 크로스백을 챙기려고 허리를 숙였다가 밀려오는 고통에 비명을 내질렀다.

“허억, 으윽.”

내 모습을 보던 제나스가 한숨을 내쉬고는 나를 대신해 크로스백 안에 물건들을 담고 내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응. 갈까?”

나는 조용히 제나스의 뒤를 따라 섬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을 둘러보며 위치를 파악해 보려고 했는데, 역시 그냥 봐서는 잘 모르겠다.

‘숲이 다 비슷하게 생겨서 말이지.’

아무래도 내일 해가 뜨자마자 높은 산에 올라가서 다시 위치를 살펴봐야 할 것 같다. 조명탄이 멀쩡했으면 하늘에 쏘아 올려서 위치를 알릴 텐데 아쉽다.

‘내 위치를 어떻게 알리는 게 좋을까?’

그런 고민을 하다가 나는 다시 제나스의 뒤통수를 쳐다봤다.

“넌 어떻게 살아남았어? 여기 굉장히 위험하잖아. 마물도 나오고.”

내 물음에 제나스가 나를 흘끗 돌아보더니 생각하는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도망치는 거나 숨는 걸 잘해.”

“나랑 비슷하네.”

“식량은 구할 필요 없었어.”

“어? 왜? 오두막에 식량이 많아?”

나는 조금 희망을 가지고 그에게 물었다.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굉장히 뜻밖이었다.

“나는 마법사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어.”

그래서 후드 티 위에 마법사 로브를 두르고 있었구나.

그런데 그보다 의문인 건, 제나스가 마법사라고 고백한 뒤에 붙인 말이었다.

“사람이 먹지 않고 어떻게 살아? 마법사는 원래 다 그래? 내가 아는 마법사는 안 그런데?”

“체질을 바꿨어. 다른 사람은 못 할걸.”

제나스는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 너무 단호해서 자신감이 대단해 보일 정도로.

나는 바짝 긴장한 채로 주변을 경계하고 걸으며 그에게 물었다.

“체질이랑은 상관이 없을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한 일이야……? 내가 아는 대마법사는 배고프면 죽으려고 하는데. 아, 걔도 대륙에서 손꼽히는 마법사야.”

내 물음에 제나스가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누나, 나는 천재야.”

오, 생각보다 자신감이 대단하다.

“걔도 천재야.”

나는 제나스의 말에 반박하며 카이든을 변호했다. 카이든은 최연소 대마법사에 최연소 마탑주였는걸. 성격이 조금 많이 이상하지만, 그런 애가 천재가 아니면 뭐겠어?

“체질 바꾸는 것도 못 한다면서. 그럼 천재가 아닌 거지.”

아, 그렇지. 그렇긴 하지. 이런 어린아이도 가능한 걸 카이든은 못 하니까.

“그런가……? 그런데 이 섬에서 마력은 못 쓰잖아.”

“이미 왕국에 있을 때 바꾼 체질이라 상관이 없어.”

“그런 거야?”

마법에 대해 모르니까 그가 그렇다고 한들 알 수가 없다. 이건 나중에 카이든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런데 왕국 출신이야? 헤스티아 왕국?”

“아니, 잉그람.”

“……응?”

나는 제나스의 말에 놀라서 잠시 굳었다가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걸음을 멈췄다.

덕분에 배에 부담이 가서 통증이 엄청났는데, 지금 통증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잠깐, 뭐? 잉그람 왕국?”

제나스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한다.

“왜?”

“잉그람 왕조는 천 년 전에 멸망했잖아. 잉그림 왕국이 란그리드 제국으로 건국된 지가 언젠데.”

“아…….”

제나스가 그제야 이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동요 없는 얼굴이다.

“너 설마…….”

“벌써 천 년이 됐네.”

나는 할 말을 잃고 눈앞의 예쁜 소년을 쳐다만 봤다.

복잡한 생각들이 파도처럼 떠밀려온다. 천년을 살았다니. 혹시 진짜로 얘가 우릴 납치한 놈일까? 거기다가 마법사라고 했잖아. 그것도 천재 마법사.

제나스는 가만히 나를 쳐다보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기 있으면 시간 감각이 둔해져.”

“천 년은 시간 감각이 둔한 정도로 설명이 안 되는 기간 아니야? 윽.”

흥분해서 목소리를 높였다가 상처가 벌어진 듯 통증이 밀려왔다. 제길, 얼른 상처를 치료해야할 것 같다.

“괜찮아?”

제나스가 영혼 없는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 또한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실은 괜찮지 않았다.

상처도 아픈 데다 정신적 충격까지 받아 사고가 멈춘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나는 제나스를 만나기 직전에 세웠던 황당한 가설을 떠올렸다. 지박령설 말이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무한으로 반복해 살아가는, 지박령 말이다.

“설마…….”

나는 충격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간판에 머리를 맞고 죽은 것도 어이없는데, 마거릿의 몸으로 한 번 더 죽은 건가? 대체 언제?

“내가 죽었다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걸 스스로도 인지는 하고 있는데, 좀처럼 그 감정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웠다.

그렇게 한참을 절망하고 있을 때, 제나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누나 안 죽었어.”

나는 머리를 쥐어뜯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나스가 팔짱을 끼고는 한심하단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나도 안 죽었고.”

“천 년이나 여기 살았다며.”

“그건 그렇지만, 안 죽었어.”

“그걸 어떻게 그렇게 자신해?”

“죽은 적이 없으니까.”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한 제나스가 나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누나도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 안 나지? 안 죽었으니까 그래.”

“지박령은 원래 자기가 죽고도 죽은 걸 기억 못 해.”

“지박……… 뭐?”

제나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미간을 좁히고는 되물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지박령설은 뒤로 밀어 두고 그에게 물었다.

“죽은 게 아니라면, 너는 그냥 탈출을 못 한 거야?”

내 물음에 잠시 시선을 돌리며 고민을 하는가 싶던 제나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뭐. 그렇지.”

“뭐야, 그 찜찜한 대답은.”

내 물음에도 제나스는 대답 없이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했다. 더 이상의 대답은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민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불현듯 그의 나이를 떠올렸다.

“잠깐……, 너 그럼 천 살이 넘었다는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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