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09)화 (109/234)

나는 한숨을 내쉬며 젖은 물건들을 자갈 위에 말려 두고 수첩을 살폈다. 수첩이 물에 젖는 바람에 메모해 둔 내용들이 다 번져 있었다.

“망할! 되는 게 없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벙커 지도가 그려진 천은 무사했다. 날염 인쇄한 건가? 현대 기술인지 마법 기술인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물에 젖어도 멀쩡하다니 다행이다.

“일단 움직여야 하는데.”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아랫배가 아니라 옆구리 쪽에 난 상처라서 그런지 조심만 하면 움직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빠졌던 것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강 건너편엔 빼곡하게 숲이 우거져 있었다.

당연히 일행들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내가 북섬에 있는 건지 남섬에 있는 건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아주 큰일이다.

나는 멍하니 자갈밭 위에 서서 코를 훌쩍였다. 다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혹시 나, 죽은 게 아닐까?”

죽어서 이 섬의 지박령이 되어 버린 거지. 지박령은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그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반복해 살아간다.

“설마. 아닐 거야. 일단 상처가 너무 아파.”

현실 같지 않은 일을 너무 많이 겪다 보니 상상력은 오히려 풍부해지고 사고와 판단력은 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내가 미쳐 가고 있는 걸지도.”

나는 멍하니 강물이 흐르는 모습만 바라봤다.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특히 에녹.

‘에녹은 내가 없으면 안 되는데.’

그러다가 에녹이 아스달, 유안나와 함께 남섬에 남겨졌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유안나가 에녹과 함께 있다면…… 괜찮을 수도 있겠다. 원작에선 유안나가 에녹의 발작을 사랑으로 해결해 줬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가슴이 욱신거리며 통증이 생겼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카이든도 걱정되고.’

다들 무사히 있을까.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참담하고 절망적인 심정이 터진 둑처럼 내부를 휩쓸었다.

‘힘들어.’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울음을 삼켜 냈다.

신이 있다면 대체 내게 원하는 게 뭘까?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나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그리고 지금도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는 애써 눈물을 삼키며 손등으로 눈두덩이를 꾹 눌러 냈다.

“어……. 죽은 줄 알았는데.”

그때 어디선가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더니, 섬 언덕 위에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어린 소년이 품에 코코넛을 잔뜩 안고 나를 보며 서 있었다.

나는 아주 한참 동안 소년을 빤히 쳐다봤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사람이에요?”

너무 놀라서 소년을 향해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럼 사람이지, 유령이겠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던 은발의 소년이 두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시간 뜸을 들인 소년이 나직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바보?”

“아니야!”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조금 전까지 우울감으로 땅을 파던 것도 잊고 뺨에 손등을 얹으며 화끈거리는 열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다시금 소년을 쳐다봤다.

목 언저리에서 찰랑거리는 단정한 단발머리를 한, 엄청난 미소년이었다. 그 애 또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내 얼굴에 표정이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죽은 줄 알았어.”

그렇게 말을 한 뒤에 또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아까는 숨을 안 쉬어서.”

하고 덧붙였다. 숨넘어가겠네.

나는 조금 전보다 차분하게 소년을 바라봤다. 이 험난한 섬에 혼자 있기에는 굉장히 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몇 살이니?”

내 물음에 소년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또 한참을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땅을 쳐다봤다가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며 생각하더니, 뒤늦게 입을 열었다.

“……열두 살?”

“네 나이 얘기를 하는데 왜 고민을 해?”

의아해서 물었더니, 소년이 미간을 좁히고는 또 한참을 고민한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어.”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는 건, 이 소년도 이 섬에 강제 이동당한 거고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는 얘기인 걸까?

원작에선 이 무인도에 주인공들 외에 다른 사람은 없었다.

‘원작이랑 맞는 게 없네.’

나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무리 어린 소년이라지만, 원작 속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인 이 아이를 믿어도 되는 걸까?

‘확실히 경계는 필요해.’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소년이 고개를 살포시 기울이고는 내게 물었다.

“누나는 몇 살이야?”

“스물두 살이야.”

내 대답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나이 많다.”

“이 정도면 어린 거야.”

스물두 살이면 청춘이다, 청춘!

그렇게 투덜거리다가 나는 아까보다 내 기분이 많이 나아졌음을 깨달았다.

소년이 나타나 준 덕분이다. 다른 생존자가 있었다니. 조금 전까지 홀로 이 냉혹한 외딴섬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절망에 빠져 있었는데, 희망이 약간 생긴 느낌이었다.

나는 문득 고개를 내렸다. 소년이 떨어뜨린 코코넛 중 하나가 내 발밑까지 굴러왔기 때문이다.

소년은 자신이 떨어뜨린 코코넛들을 주우며 내게 다가왔다. 발밑에 있는 코코넛을 주워 주고 싶었지만, 상처 때문에 허리를 숙일 수가 없었다.

소년이 내 발밑에 있는 코코넛을 마저 줍고는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상처 괜찮아?”

소년이 덤덤한 목소리로 피가 잔뜩 밴 드레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안 괜찮아.”

“그러게. 아파 보여.”

소년은 아무런 감흥이 없어 보이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나는 가만히 소년을 마주 보다가 찬찬히 행색을 살폈다. 소년의 차림새가 무척 독특했기 때문이다.

일단 소년은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그것도 발목까지 올라오는 하얀색 나X키 덩크 하이를. 무엇보다 놀라운 건 운동화가 때 한 점 없이 새하얬다는 거다.

나는 슬그머니 내 운동화를 내려다봤다. 오두막에서 주워 신은 운동화는 벌써 때가 잔뜩 껴 꼬질꼬질했다.

소년은 거기다가 반바지와 깔끔한 반팔 후드 티를 걸치고 있었다.

괴상한 건, 그 위에 제국식 마법사 로브를 두르고 있다는 거였다. 그것도 카이든의 것과 동일한 마탑에서 지급되는 로브였다.

‘굉장히 수상쩍네.’

하지만, 나처럼 운동화 같은 현대 물건들을 어디선가 주웠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소년은 분명 제국인이다. 지구상엔 은발에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넌 누구니? 여긴 어떻게 왔어? 혼자야?”

나는 일단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소년이 다시금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한참 있다 동문서답을 했다.

“누나 예쁘다.”

“질문에 대답좀 해 줄래? 내가 예쁜 건 나도 알아.”

내 대답에 소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나스 이그란.”

“그게 네 이름이야?”

내 물음에 그가 다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제나스 이그란. 중간 이름이 없는 걸 보아 귀족은 아닌 모양이다.

“여긴 어떻게 왔는데?”

“나도 몰라.”

그렇게 대답한 소년, 그러니까 제나스는 또다시 뜸을 들이고는,

“눈을 떠 보니 여기였어.”

라고 대답했다. 끊어서 말을 하는 게 습관인 모양이다.

‘전체적으로 행동이나 말이 느긋하네.’

눈을 떠 보니 여기였단 건, 우리의 상황과 비슷했다. 이렇게 어린아이까지 이 위험천만한 섬에 끌려오다니.

“다른 사람은? 계속 혼자였니?”

내 물음에 제나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혼자였어.”

그렇게 대답한 뒤, 잠시 고민하는 얼굴을 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말을 꺼낼지 말지 매우 고민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말해 봐, 뭔데?”

“함께 온 사람들은 다 죽었어. 그래서 혼자야.”

“……뭐?”

놀라운 이야기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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