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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06)화 (106/234)

나는 에녹의 품에서 황급히 내려와 언덕 아래로 달려오는 오랑우탄 두 마리를 향해 조명탄을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피융.

퍼벅! 퍽!

다소 둔탁한 효과음과 함께 오랑우탄 두 마리의 옆구리가 터져 나갔다.

나는 잠시 배를 움켜쥐고 몸을 숙였다. 진짜로 갈비뼈가 나가면 움직이는 것도 어렵다. 그래도 지금 나는 움직일 정도는 됐으니 심각한 부상은 아닌 모양이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언덕 위에서 세 마리의 오랑우탄을 상대하고 있는 카이든이 보였다.

‘그런데 은지는 어디 갔지?’

내 팔뚝을 휘감고 있던 은지가 보이질 않았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은지를 찾고 있던 와중에 언덕 위에서 불길이 치솟는 걸 보고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은지가 카이든의 어깨 위에 올라가 오랑우탄 마물들을 향해 불을 뿜고 있었다.

표정이랄 것이 없는 새끼 아나콘다지만, 뭔가 대단히 화가 난 것만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저 녀석도 기동력이 대단한데?’

언덕 위에서 눈치를 살피던 루제프가 구급 약통을 들고 황급히 내게로 달려왔다.

“마거릿. 괜찮나.”

에녹이 나를 부축했다.

“에녹은요? 다른 늑대 마물들은…….”

그 순간 나는 오두막 앞 공터에 산처럼 쌓여 있는 늑대 마물들의 사체를 발견했다.

디에고가 그 앞에서 살아 있는 놈은 없는지 확인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플로네 영애, 괜찮습니까?”

루제프가 내 안색을 살폈다.

“모르겠어요.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니 골절까지는 아닌 것 같고…… 갈비뼈에 금이 간 정도인 것 같아요. 허리 복대를 착용하면 좋을 것 같은데 여기서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참 곤란하네요.”

그때 아스달과 유안나가 나무에서 내려와 내게 달려왔다.

“플로네 영애, 괜찮아요?”

“영애, 괜찮나.”

나는 카이든 쪽으로는 아무도 달려가지 않는 걸 보고 당황했다.

“저기 안 도와줘도 돼요? 다들 왜 이리 와요?”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동시에 언덕 위에서 오랑우탄 두 마리와 고군분투 중인 카이든에게로 향했다.

“로드는…… 괜찮겠지.”

“맞아요. 알아서 잘하겠죠.”

“걱정 마십시오. 본인 입으로도 최고의 마법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스달과 유안나, 루제프가 차례로 대답했다.

때마침 카이든이 괴력으로 저보다 몸집이 두 배나 되는 오랑우탄을 들어 올리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

쿠웅!

다시금 모두의 시선이 카이든에게로 쏠렸다.

“거봐라.”

“잘하고 있네.”

“걱정할 건 없겠습니다.”

이번에도 아스달과 유안나, 루제프가 연이어 말했다. 에녹은 그쪽에는 관심도 없단 듯이 내 상태를 살피기 바빴다.

‘카이든…… 너 혹시 따돌림당하고 있는 거니……?’

루제프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영애, 허리 복대가 뭡니까?”

“배에 둘러서 허리를 고정해 주는 띠 같은 거예요. 얇은 천 말고 조금 단단한 두꺼운 천이 필요한데…….”

내 말을 들은 에녹이 갑자기 재킷을 벗더니 재킷의 밑단을 손으로 부욱 찢어 냈다. 저 두꺼운 재킷이 손으로 찢긴다는 것도 놀라운데 귀중한 황태자 제복을 찢는 데도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단숨에 그것을 내 허리에 둘러 주고는 붕대를 감을 때 썼던 핀을 꼽아 고정시켰다.

“괜찮나.”

에녹의 다정한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시 에녹과 있으면 보살핌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진통제는 필요 없습니까?”

가만히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루제프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참을 만해요.”

“뼈에 금이 간 거라면, 약도 없긴 합니다. 신력을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금으로선 안정을 취하면서 뼈가 잘 붙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거든요.”

아마 현대에 있는 병원에 가도 의사가 같은 말을 할 것이다. 나는 루제프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쿠웨에에엑!

쿠우우웅!

마물의 괴란한 비명소리와 함께 땅이 진동하는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카이든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오랑우탄 마물을 깔아뭉개고 그 위에 올라가 피곤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은지도 카이든의 목을 감싸고 머리 위로 올라가 호기로운 기세로 불을 뿜고 있었다.

“저거 영애의 애완 뱀 아닙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아나콘다 마물이지. 애완동물도 아니고 그냥 뱀도 아니에요.”

루제프가 의아한 얼굴로 내게 묻기에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뒤늦게 나와 눈이 마주친 은지가 뽈뽈뽈 기어서 언덕을 내려오더니 내 앞에서 기웃거렸다.

나는 녀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은지가 자연스럽게 내 팔을 휘감고 올라와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잘했어.”

은지의 비늘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있던 중에 카이든의 활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거릿! 나도 쓰다듬어 줘!”

카이든이 언덕 위를 뛰어 내려왔다. 물론 그는 에녹에게 곧장 제지당했다.

“서둘러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다들 짐은 챙겼나?”

에녹은 카이든을 밀어내고는 표정 없는 덤덤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카이든은 에녹을 향해 욕지거리를 퍼부으면서도 착실하게 오두막 앞에 내려 둔 배낭을 둘러멨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각자의 짐을 챙겨 들고 있었다.

“출발하도록 하지.”

얼추 정리가 된 듯 보이자 에녹이 말했다.

우리는 다 함께 오두막을 떠나 북쪽 섬으로 향했다.

“보급품을 먼저 찾을 거예요, 아니면 의문의 별 표시를 먼저 찾아볼 거예요?”

“북쪽 섬의 서북단으로 가는 길에 보급품이 있는 지역을 지나가거든. 보급품을 우선 확보한 뒤, 별 표시가 있는 장소로 향할 거야.”

유안나의 질문에 아스달이 성실히 답했다.

그러고 보니 정신이 없어서 목적지를 안 물어봤던 것 같은데, 아스달과 에녹은 이미 대화를 나누고 목적지 설정까지 끝마친 모양이다.

‘너희는 생각이 다 있구나? 그럴 줄 알았어.’

역시 나보다는 저들이 리더 타입이지.

어차피 북쪽 섬이 목적인 것 같으니, 얌전히 따라가다가 벙커 위치도 한 번 더 파악하면 딱이겠다.

우리는 맹그로브가 우거진 숲을 지나갔다. 이국적인 모양새를 갖춘 맹그로브 나무들을 보고 있자니 다시 한번 이곳이 낯선 섬이라는 걸 실감하고 만다.

나는 강물 위로 뿌리가 기괴하게 나와 있는 맹그로브 나무들을 흘끔 보며 강 옆길을 조용히 걸었다.

“대체 그 마물들은 어디서 그렇게 대규모로 나온 건지 모르겠군.”

내 앞에서 걷고 있던 에녹이 문득 입을 열었다.

“심지어 늑대 마물은 이쪽에서 서식하는 마물도 아니잖아요. 오랑우탄하고 합심이라도 한 것처럼 모여든 게 이상하긴 해요. 저는 당연히 타란툴라 마물들이 모여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마물이 공격을 해온다면, 당연히 타란툴라 마물일 거라 여겼다. 이쪽이 타란툴라 마물이 서식하는 구역이기도 했고, 죽은 동료의 잔해나 냄새를 맡고 등장한 거라면 당연히 그놈들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예상과 달리 나타난 것은 늑대 마물과 오랑우탄 마물이었다.

‘꼭 마치 오두막으로 좌표라도 찍고 온 것 같았단 말이지.’

진짜로 누군가가 놈들에게 오두막을 공격하게끔 조작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 덕분에 이 섬 안에서 안전지대는 없다는 걸 알게 됐으니, 다행이지 않습니까. 앞으론 계속 긴장을 놓지 않을 테니, 방심한 틈에 당할 일은 없겠지요.”

루제프가 조용히 내 말에 대꾸했다. 맞는 말이지만 어쩐지 서글퍼졌다. 이제는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는 소리잖아.

“그리고, 마거릿. 덕분에 검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장거리에서도 마력 주입이 가능한지 몰랐군.”

그때 에녹이 나를 돌아보면서 감사를 표했다. 뒤편에서 따라오던 유안나가 동조했다.

“저도 봤어요. 마력을 엄청 쓴 것 같던데. 타인에게 마력을 전달하는 게 장거리에서도 가능한 거였어요?”

“플로네 영애는 대체 정체가 뭘까. 로드, 말해 봐. 이게 가능한 일인가?”

아스달이 우리를 돌아보다가 내 바로 뒤에 서 있던 카이든을 향해 물었다.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다만 나 정도면 문제없지만, 숙달된 마법사들도 버거워하는 어려운 일이긴 하죠.”

카이든의 말에 어깨가 으쓱해진 나는 다소 과장된 동작으로 양손을 들어 보이며 으스댔다.

다들 나더러 대단하다고 하는데 이 정도 칭찬은 좀 즐겨도 되잖아.

“제가 그동안 미치광이라는 타이틀에 가려져 있어서 그렇지, 사실은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 대단한 재능을 황태자를 쫓아다니느라 방치하고 있었다니, 통탄을 금할 수 없군.”

내 대답에 아스달이 한탄 어린 말을 하고는 몸을 돌려 앞으로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나를 좋아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 아니다, 마거릿.”

에녹이 당장 딴죽을 걸었다.

“마거릿, 나는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뒤에 있던 카이든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쓸데없는 말들을 못 들은 체하고 에녹을 따라 전진했다.

조금 전까지 마물에게 죽을 뻔했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로웠다.

계속 이대로만 문제를 헤쳐 나가며 섬을 탈출하면 좋겠는데.

……물론 그런 희망은 잘 이뤄지지 않는 법이지.

* * *

‘금이 간 게 아니라 그냥 멍든 거였나?’

생각보다 다친 부위의 통증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이런 야생에서 크게 다치면 정말 답도 없을 텐데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무리하지 않기 위해 중간중간 휴식을 취했는데, 그 탓에 북쪽 섬으로 향하는 다리까지 가는 데 무려 나흘이나 걸렸다.

드디어 북쪽 섬으로 향하는 흔들 다리 앞에 멈춰 선 우리는 다리를 보고 제법 당황했다.

유안나가 말한 흔들 다리는 금방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노후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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