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두막 밖으로 나가 보도록 하지.”
에녹의 말에 나는 루제프와 유안나를 돌아봤다.
“저희는 얼른 짐을 챙겨서 피해 있도록 하죠.”
내 말에 루제프와 유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바닥을 빙글빙글 돌며 불안해하는 은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은지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타고 올라와 팔에 감겼다.
에녹 일행이 전투 대형을 갖춰 섰고, 아스달이 우리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그가 카이든이 만들어 준 활과 화살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나도 곧 따라 올라가지.”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루제프와 함께 오두막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경사진 언덕 위로 올라갔다.
유안나는 재빠르게 언덕과 오두막 공터 사이에 있는 나무 위로 올라갔다.
“온다. 반황, 준비.”
아스달이 에녹을 향해 말했다. 저 인간, 또 시작이네. 에녹이 포켓몬도 아니고.
그러나 에녹은 아스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얌전히 검을 들었다.
예상대로 수풀을 헤치고 등장한 무리는 늑대형 마물들이었다.
이 오두막은 신성불가침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믿음이 깨져 버렸다. 이젠 미련 없이 오두막을 버려도 되겠어.
나는 에녹이 검을 휘두를 준비를 하는 걸 보고 반지 낀 손을 들어 그 방향으로 마력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마물들을 향해 휘둘러진 에녹의 검에서 강력한 스파크가 튀었다. 검기였다.
옆에 앉아 있던 루제프가 놀라서 나를 돌아보는 게 보였다. 하나, 나는 그의 의문에 답을 할 시간이 없었다.
에녹은 이미 그게 내 짓이라는 걸 알아차린 것 같지만 나를 돌아보진 않았다.
파팟.
날카로운 검날을 감싸고 허공을 가른 스파크가 늑대 마물 무리 사이를 비집고 날아가 화려하게 번쩍였다.
쿠쿵!
순간 땅이 진동하며 거대한 연기가 피어올랐고 마물들의 괴성이 뒤섞여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피어오르던 연기가 걷히고 나니, 흙바닥에는 널브러진 마물들의 사체가 쌓여 있었다.
마물의 패턴 분석이고 뭐고 필요 없었다. 검기의 파워가 얼마나 강력하던지 내 몸에서 마력이 쑥쑥 빠져나가는 바람에 나는 잠시 휘청거렸다.
루제프가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들어 올렸다.
“마력 잘 다루지 못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루제프의 물음에 나는 그에게 매달리듯 안겨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놀라게 하려고 그랬죠.”
“확실히 놀라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상 쓰지 마세요. 쓰러질 것 같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부축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뭐야, 마거릿. 그 마력 나한테 줬어도 한 방에 해치울 수 있을 텐데.”
대체 언제 왔는지 카이든이 팔짱을 끼고 내 앞에 앉아 투덜거렸다.
“네가 중간에 흘린 마력을 주워 먹고 워프했어.”
그런 게 가능해? 나는 기겁하는 얼굴로 카이든을 돌아봤는데 그가 내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난 이 시대 최고의 마법사거든.”
그가 나를 향해 윙크를 하고는 뒤이어 말했다.
카이든이 그런 말을 하고 있을 때, 등 뒤로부터 스산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오, 오랑우탄 마물인 것 같습니다.”
루제프의 난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두막 앞 공터에선 다른 이들이 마물 사체를 정리하며,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아, 저 녀석은 나랑 천적인데.”
카이든이 짜증스레 중얼거렸다. 나는 카이든의 시선을 따라 찬찬히 고개를 돌렸다.
우리가 앉아 있던 언덕 뒤로 거대한 몸집의 오랑우탄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든이 오랑우탄 마물의 등장에 유감을 표한 건, 일전에 그에게 큰 부상을 입힌 마물이 바로 저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크로스백에서 조명탄을 꺼내 탄알을 재장전하고 해머를 당겨 내렸다.
“주교님, 카이든. 뒤로 살짝 물러나실래요?”
“역시, 우리 마거릿. 든든해.”
나는 느릿하게 한 발자국씩 다가오는 오랑우탄 마물을 향해 조명탄을 겨누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팔뚝에 매달려 있던 은지가 빙글빙글 돌아 조명탄 위로 머리를 드리우더니 오랑우탄 마물을 향해 입을 떡하니 벌렸다.
이윽고 은지의 입에서 조그만 불씨가 생기더니 거대한 불기둥이 되어 튀어나왔다.
불기둥을 직격으로 맞은 오랑우탄 마물이 멀리 날아가 절벽에 처박혔다.
이내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며 마물의 몸이 불타 들어갔다.
“뭐, 뭐야.”
너무 놀라서 나는 그만 굳어 버렸다. 은지가 콧김으로 불을 씩씩 뿜고는 우쭐해하며 나를 돌아봤다.
이 조그만 몸으로 엄청난 전력이 되고 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 다음부터였다.
“플로네 영애, 조심해요! 오랑우탄 마물들이 더 몰려와요! 아스달 저하! 그쪽으로도 늑대 마물들이 몰려오고 있어요!”
대체 언제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갔는지 모르겠지만, 유안나가 거의 5층 높이에 달하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 우리를 향해 소리쳤다.
아스달 역시 같은 나무 위에서 에녹과 디에고 방향으로 몰려드는 늑대형 마물들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그래. 여기서 끝이 아닐 줄 알았어.”
카이든은 생각보다도 한가롭게 중얼거렸다.
“너는 저쪽에 내려가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여긴 나랑 루제프만으로도 충분해.”
“저는 하는 게 없습니다, 영애.”
내 말에 루제프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하는 게 없어요. 나 다치면 바로 끌고 가서 치료해 줘야지. 가장 중요한 역할이잖아.”
내 말에 루제프가 입을 꾹 다물고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럴 시간이 있어?”
카이든이 훈훈한 분위기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단검을 꺼내 들었다.
“저쪽은 어차피 황태자 한 명만 있으면 문제없잖아.”
카이든의 말이 맞다. 게다가 디에고도 있었고 아스달도 장거리 공격으로 돕고 있으니 오히려 저쪽이 더 안정적인 구도라고 볼 수 있었다.
나는 멀리서 흙먼지를 폴폴 풍기며 걸어오는 거대한 인영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카이든, 그럼 이렇게 하자. 나는 장거리 공격을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고 너는 단거리 공격을 해야 하잖아. 폭탄하고 조명탄의 파급력이 강한 편이니까, 이걸 먼저 날린 다음에 단거리 공격을 진행하는 거야.”
멀리서 느릿하게 모여드는 오랑우탄을 보며 카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력은 더 사용 못 해? 마법 쓰면 한 방인데.”
“처음 해 본 거라 무리했어. 에녹한테 마력을 과다 주입해서 다 낭비해 버렸거든.”
이제 나는, 내 안에 남은 잔여 마력이 얼마만큼인지도 수월하게 파악할 경지에까지 올랐다.
“그래, 그럼 됐어. 네 말대로 할게.”
카이든이 단검을 꺼내 들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가 손안에서 단검을 현란하게 돌리더니 이내 단검의 손잡이를 턱 하니 잡고 자세를 취했다.
은지가 내 팔에 몸을 감고 꼬물거렸다.
“이번엔 가만히 있어. 언니가 다 계획이 있거든.”
내 말에 은지가 목을 빼꼼 내밀고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는 다음에 합을 맞춰 보자. 아무래도 너랑 나랑은 그게 좀 필요해.”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은지는 계속해서 혀를 내밀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튼 나는 한 손에 조명탄을 장전한 채, 다른 손으로 크로스백에서 화염 폭탄을 꺼내 들었다.
“내가 이거 던지면 모두 엎드리세요. 자칫 다칠 수 있어.”
내 말에 카이든이 몸을 낮췄고 루제프는 벌써부터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나는 이로 안전핀을 뽑은 다음 다가오는 마물들 사이로 폭탄을 던진 뒤 자리에 엎드렸다.
콰광! 쾅!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고 파란 피가 퍽 솟구쳤다. 마물들마다 피 색깔도 다른 모양이다.
나는 곧장 몸을 일으켜 조명탄의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오랑우탄 마물의 달리기 속도가 빨랐다.
쿵쿵쿵쿵-!
순식간에 가까워진 오랑우탄 마물 두 마리가 코앞에 다가왔다.
“X발.”
나는 놀라서 옆에 있던 루제프를 발로 밀어내고 카이든을 손으로 쳐 냈다.
그러고는 오랑우탄의 주먹질에 얻어맞고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윽.”
아파. 아파 죽겠다. 이번엔 진짜로 갈비뼈가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마거릿!”
분명 늑대 마물 무리 가운데서 검을 휘두르고 있던 에녹이 재빨리 언덕 아래로 달려와서 나를 받아 안았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기동력이 아닐 수 없었다.
“윽. 고마워요.”
하지만 정말 갈비뼈가 나간 건지 에녹의 품에 안길 때 받은 충격에 흉부의 고통이 더해졌다.
하지만, 부상을 입었다는 핑계로 안이하게 있을 새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