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04)화 (104/234)

18. 북섬과 남섬

내 마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역시 카이든이었다.

그래서 오두막을 떠나기 전에 나는 카이든과 함께 다양한 방법으로 마력을 주입하는 훈련을 하기로 했다.

카이든은 오두막 앞 공터에 서서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고 있었다.

“너는 마법진 같은 거 그리지 않아도 마법 쓸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마력이 불안정할 때는 직접 그리는 것보다 확실한 게 없지.”

그러나 미처 그의 힘을 시험해 볼 새도 없었다.

쿠웅! 쿵!

아주 먼 곳에서부터 둔중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나와 카이든은 놀라서 동작을 멈췄다.

“이거 설마…….”

발밑에 있던 은지가 요란 법석을 떨었다. 녀석이 수풀 방향을 잔뜩 경계하며 손가락만 한 불을 자꾸 뿜어 댔다.

그때 오두막 문을 열고 짐을 챙긴 일행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그 심상찮은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은지의 모습을 본 일행은 불길한 얼굴로 조용한 수풀 너머를 바라봤다.

“타란툴라 마물이 낼 법한 소리는 아니야.”

“아나콘다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럼 늑대 마물인가?”

카이든, 루제프, 유안나가 차례로 말했다. 그럼 뭐지? 나는 의아해져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아스달이 나를 쳐다봤다.

“늑대 마물의 서식지는 이쪽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그러니 그놈은 아니겠지.”

“아니요. 마물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열쇠를 찾은 장소로 가다가 늑대형 마물들을 발견했거든요.”

아스달의 의문을 카이든이 해결해 줬다.

마물들이 영역을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추론은 사실 추론이 아니라 기정사실이다. 진화도 시작했는데 영역쯤이야 벗어나지 못할 게 뭔가.

나와 카이든은 늑대형 마물들이 서식하는 곳에서 오랑우탄 마물과 마주친 전적도 있었다.

“아니면 오랑우탄 마물일 수도 있고. 오랑우탄 마물이 맞다면, 그놈이 늑대보다 더 파괴력이 강해서 큰일이긴 한데…….”

카이든의 중얼거림에 모두가 심각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솔직히 마물들이 몰려오더라도 반황만 있으면 걱정 없는 것 아닌가?”

아스달의 말에 모두가 에녹을 쳐다봤다. 에녹도 검집 홀더를 허리에 채우다가 고개를 들었다.

한 치 동요도 없는 에녹의 모습을 보는 아스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여유로운 것 좀 보게. 봐 봐. 반황이 폭주해 버리면 마물이 떼로 몰려온다 한들 무슨 걱정인가. 반황에게 전쟁귀라는 별칭이 괜히 붙은 건 아니란 말이지.”

물론 그의 말에 나는 찬성하지 않았다.

“에녹을 폭주시키자고요? 마물을 썰다가 저희를 썰어 버릴 수도 있는데도요?”

“흠. 실언했군.”

아스달이 빠르게 실수를 인정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나를 끌어안고 있던 카이든이 아스달의 말에 힘을 보탰다.

“제어만 확실히 가능하다면, 그것도 좋은 방법일지 모르지. 마거릿 네가 제어 가능하잖아. 황태자 목줄 쥐고 있는 거 아니었어?”

“목줄이라니, 에녹이 개도 아니고.”

“저번에 하는 거 보니까 비슷하던데?”

에녹을 두고 설전이 계속되자 기어코 에녹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뱉었다.

“……다들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주 잘 알겠군. 그리고 폭주하지 않더라도 마물 소탕은 가능해. 시간은 걸리겠지만. 그대들이 다치지 않고 내 눈에만 띄지 않는다면 폭주할 일도 없어.”

“역시 에녹.”

“역시 반황.”

“역시 황태자.”

나와 아스달, 카이든이 차례로 에녹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에녹은 명실상부한 이 세계관 최강자다. 그래, 괜히 메인 남주가 아니지.

“우리는 전하께서 마물들의 발을 잡고 있을 때, 빠르게 몸을 피하는 게 좋겠군요.”

얌전히 대화를 듣던 유안나가 입을 열었다.

“아,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는데 들어 보실래요? 성녀로 재직하던 중에도 마물 토벌하러 파견을 많이 나갔던지라 이런 일에는 익숙한 편이에요.”

성녀로 재직이라니. 괴상한 표현이었지만, 유안나는 본인이 ‘성녀’라는 걸 무척 싫어했으니 그러려니 넘어갔다.

“무리를 지어서 나오는 마물들은 일종의 패턴이라는 게 있거든요.”

유안나의 말에는 어떤 힘이 있었다. 자신의 발언이 꼭 필요한 순간을 제대로 알고 있어서일까.

“보통은 그 무리에 우두머리 격인 마물이 존재하죠. 우두머리 녀석을 파악하고 제거하면 균열이 무너져서 나머지 마물들도 손쉽게 처리할 수 있어요.”

“흠, 확실히 그렇겠군. 나는 인간의 전쟁에는 익숙하지만, 마물의 습성은 잘 모르고 있었다.”

유안나의 말에 에녹이 일리가 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히 대화를 듣던 아스달도 동의한다는 얼굴을 했다.

“나는 마물 토벌단을 지휘해 본 적 있어. 성녀가 하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군.”

“문제는 무리를 짓지 않는 마물이 나타날 경우인데. 이런 놈들은 하는 수 없죠. 각개 전투로 물리치는 수밖에.”

“그 경우는 최악이겠군요.”

내 말에 유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잠시 루제프를 돌아봤다. 루제프가 구급 약통을 품에 안은 채 의아한 얼굴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일찍이 피신해 있다가 지원을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주교님과 저는 상처 치료에 힘을 쓸게요. 성녀님께서는 발이 빠르시고 나무를 잘 타시니까 상황 보고를 맡아 주세요.”

“맡겨만 줘요.”

유안나는 청초한 얼굴로 싱긋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소싯적 능력-소매치기 하던 시절의-을 써 보겠다며 좋아하기까지 했다.

“저는 상황을 보다가 무기를 사용할게요.”

나는 조명탄을 꺼내 탄알을 채워 넣었다.

조명탄과 폭탄이 있다고 해도, 마물 무리에게 기습 공격을 받기 십상이니 먼 곳으로 피신해 있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보조 역할을 하면 제격일 것 같다.

마력을 보내기도 그편이 손쉬울 것 같고.

그간 아스달 몰래 마력 운용을 해 본 결과 굳이 신체적 접촉이 아니더라도 상대에게 내 마력을 주입시킬 수가 있었다.

물론 그 경우엔 정밀도가 떨어져서 중간에 흩어지는 마력의 양이 꽤 되었지만.

호스를 끼우고 물통에 물을 채울 것인가, 아니면 손으로 물을 모아 옮겨 물통을 채울 것인가. 대략 그런 원리라고 보면 됐다.

“그래, 은지 녀석도 있으니 걱정 없겠지.”

카이든이 든든하다며 웃었다. 하지만 저렇게 말해도 정작 내가 전투에 앞장선다고 말하면 뜯어말릴 인간이었다.

안전하게 뒤로 빠져 있겠다고 하니까 저렇게 안심하는 거겠지.

에녹이 재킷을 벗어 던지고 셔츠의 커프스단추를 풀어 소매를 접어 올리며 우리를 흘끗 봤다.

“그럼 그렇게 정리하고, 내가 전투 지휘를 하겠다. 아스달, 자네는 마물의 행동 패턴 분석을 맡아.”

에녹의 말에 아스달이 엄지를 치켜들며 웃었다.

“좋은 생각이야. 플로네 영애, 내게 마력을 주입해 주겠어? 마력의 흐름을 파악해서 마물들의 움직임을 읽어 볼게.”

아스달의 요청에 나는 반지를 낀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그의 파란색 눈동자가 초록빛으로 화려하게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속도가 빠르고 수가 많은 걸 보아하니, 늑대형 마물 같은데.”

아스달의 말에 에녹과 디에고, 카이든이 차례로 검을 빼어 들고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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