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02)화 (102/234)

그는 내 질문을 곱씹는 듯 잠시 말이 없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나야 모르지? 난 실험을 싫어해서 가문 사람들이랑 친하지 않거든. 그 꽃은 가문 내에서도 취급 주의되던 개발 품목이라 내게도 접근 권한이 없었어 하지만 연관이 아예 없다고는 못 하겠네.”

“응?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데 텐타티오넴에 대해선 어떻게 알았어?”

“접근 불가 따위는 내겐 무의미하지. 제국 최고의 마법사가 그런 것쯤 못 알아낼까 봐? 접근하지 말라니까, 더 알아보고 싶더라고.”

카이든이 으스대며 웃었다. 카이든도 참 겸손이란 걸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 할 말은 없었다.

“로하데 가문이 이 섬과 연관이 있다면, 이해가 가능한 부분은 있군. 어지간히 마법 실험에 미쳐 있는 가문 아닌가.”

아스달의 말에 카이든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작자들, 보통 미친 작자들이 아니지. 미친 정신머리는 로하데 가문 대대로 이어지는 거야. 그런데, 이 섬이 실험하고 무슨 상관인데?”

나는 카이든의 마지막 질문에는 미처 답하지 못하고 아스달에게 말했다.

“하지만 아무리 실험에 미쳐 있다 해도 납치 대상이 다들 너무 거물이잖아요. 제가 생각하기엔 로하데가 직접 진두지휘를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얽혀 있는 정도가 아닌가 싶어요.”

로하데 가문은 고작 후작 가문이었고 이건 황실이라고 해도 스케일이 커지는 사건이었다.

내 추론에 다들 어느 정도 납득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로하데 가문과 연관이 있을 만한 이가 누군지를 추측해 봐야겠군. 로드, 뭐 짐작 가는 것 없나? 가문과 연관이 있는, 우리를 납치했을 만한 그런 인물 말이다.”

에녹의 물음에 카이든은 고개를 저었다.

“말했잖습니까. 가문 사람들이랑 안 친하다고.”

결국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저마다 생각에 잠겨 침묵하는 사이, 눈치를 보던 유안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텐타티오넴과 관련한 의문점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된 것 같은데, 이 즈음에서 정찰 결과도 공유해야겠죠?”

유안나가 주머니에서 천 조각을 하나 꺼내 바닥에 펼쳤다. 나는 그 지도가 다소 낯익다는 걸 알아차렸다.

“열쇠에 대한 건 알아내지 못했고, 대신에 이런 걸 주웠어요.”

“이건…… 섬의 지도로군.”

에녹이 중얼거렸다.

나는 에녹 옆에 앉아 얌전히 지도를 눈으로 훑었다.

이건 내가 주웠던 벙커 지도와 같은 재질의 천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벙커 지도와는 조금 달랐다.

내가 가진 지도에선 북쪽 섬의 산을 기준으로 동쪽 방향에 벙커 표시가 있었다.

그러나 유안나가 가져온 지도엔 벙커 표시는 없고 북쪽 섬의 산 서쪽 방향에 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지도 끄트머리에 연도 표기 같은 것도 없이 깔끔했고.

또한 남섬에 두 군데, 북섬에 세 군데 장소에 ‘보급’이라는 단어가 란그리드 제국어로 적혀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보급’이란 보급품일 것이다. 원작에서도 분명 언급된 적이 있었다. 유안나가 발견했지만 아무도 물건의 사용법을 몰라 써 보지도 못한 그 보급품들 말이다.

‘그래. 보급품이 숨겨진 위치를 알려 주는 지도인 것 같은데, 이 별은 뭐지……?’

내가 가진 벙커 지도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별도의 지도 같았다.

나는 가만히 지도를 노려보다가 문득 남쪽 섬에 적힌 보급품의 위치가 이곳에서 멀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는 이미 우리가 지나온 장소였다.

“성녀님. 혹시 보급품이 든 상자를 주운 적 있으세요?”

분명, 아나콘다형 마물과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나와 에녹은 빈 보급품 상자를 발견했었다.

“글쎄요, 우리는 그런 거 주운 적 없어요.”

유안나가 부인했다. 아스달도 팔짱을 끼고 앉아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면, 그 보급품 상자 안에 든 물건은 누가 가져간 거지?’

당연히 유안나 일행이 가져갔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아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때 내 상태를 알아차린 건지 옆에 앉아 있던 에녹이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괜찮나.”

그의 물음에 나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지도를 노려보다가 아나콘다형 마물과 마주쳤던, 강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표시된 보급품 상자, 저랑 에녹이 발견했었거든요. 저희가 발견했을 땐 이미 누군가가 내용물을 가져가고 상자는 비어 있었어요.”

“그렇다는 건…….”

아스달이 턱을 매만지며 말끝을 흐렸다. 에녹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섬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지. 뭐, 그건 이 오두막을 발견한 순간부터 예견했던 것 아니겠나.”

에녹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는 별다른 동요가 없어 보였다. 그는 늘 그랬다. 쉽게 당황하는 법이 없다.

그의 담담함 덕분인지, 나는 널뛰는 심장을 금세 진정시킬 수 있었다.

“이건 무슨 표시일까요?”

나는 이번엔 지도에 적힌 별 표시를 가리키며 의문을 표했다. 그러자 유안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가 봐야 알 것 같은데.”

“탈출구가 있는 장소거나, 아니면 함정이겠지. 이 섬의 이름이 ‘주사위 놀이’라고 하지 않았나. 우리를 갖고 노는 게 분명해.”

아스달이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에녹 또한 심각한 얼굴로 지도를 보다가 유안나에게 물었다.

“그 외에 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나?”

에녹의 물음에 유안나가 지도의 강 부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북쪽 섬으로 건너가는 다리를 발견했어요. 이즈음에서.”

유안나가 주운 지도에도 내가 주운 지도와 같이 강 사이에 다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주사위 놀이라는 건 무슨 말입니까?”

디에고가 내게 물었다. 그제서야 정찰 멤버에게 알레아의 의미에 대한 설명을 아직 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나는 정찰 멤버에게 며칠 전에, 오두막 일행과 나누었던 대화에 관해 설명했다.

“알레아란 단어가 동대륙 소수 민족 언어로 주사위 놀이를 의미하거든요. 그래서 이게 사람 이름이 아니라 섬의 이름일 것이란 게 제 추측이에요.”

양반 다리를 하고 앉은 아스달이 한쪽 팔꿈치를 다리에 기대어 턱을 괴고는 내 말을 받아서 설명했다.

“그럼 주사위 놀이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이 결정되는 걸 뜻하는 거다. 그러니까, 우리가 누군가에게 납치됐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는 얘기야. 그것도 실험용으로 말이지.”

“아까 실험 얘기가 그 소리였어? 어떤 X 같은 새끼가 감히 우릴 실험한단 말입니까?!”

지금까지 얌전히 있던 카이든의 분노 어린 목소리에 아스달이 박수까지 치며 좋아했다.

“역시 로드는 화끈해. 속 시원하게 말한단 말이지.”

“아스달, 자네는 짐작 가는 사람 없나.”

잠자코 생각에 잠겨 있던 에녹이 아스달에게 물었다. 아스달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짐작 가는 게 너무 많아서 오히려 모르겠군. 자네는?”

“마찬가지다. 짐작 가는 사람은 많지만, 한 사람도 아니고 이 많은 제국과 왕국의 주요 인사들을 한꺼번에 납치할 만한 세력은 떠오르지 않는군.”

에녹과 아스달조차도 짐작하지 못할 정도라니.

하긴, 원작을 읽은 나도 도저히 감이 오질 않았다.

애초에 <생존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랄 게 없었는걸. 사랑하고 또 사랑하다가 서로를 상처 입히고 끝내는 서로 죽이는, 그런 피폐물일 뿐이었다. 게다가 소설을 끝까지 읽지도 않았고.

“그런데 그것 참 이상하지 않나? 그 빈 보급품 상자라는 것도 그렇고 마도구들도 그렇고…… 꼭 플로네 영애 눈에만 띄는 게 말이야.”

그때 아스달이 다시금 의문을 표했다.

“플로네 영애, 말해 봐. 또 뭐 숨기는 거 없나?”

‘벙커 지도에 관해서 얘기를 해야 하나?’

하지만 내가 벙커 지도를 오늘 주웠다고 거짓말한들, 아스달의 채근 끝에 마지못해 내놓는 그림은 좋지 않았다.

나는 결국 벙커 지도 이야기는 보류하기로 마음먹었다.

‘역시 벙커는 보험으로 갖고 있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아스달이 대답을 종용하듯 나를 불렀다.

“영애. 응? 뭐라도 말해 봐.”

“……숨기는 거 없어요. 그냥 우연이에요. 자꾸 그런 게 제 눈에 띄는 데 그럼 어떡해요?”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는 거야, 왜 영애한테만 그런 우연이 겹쳐?”

“제가 어떻게 알아요?”

“알아야지, 의심 받기 싫으면.”

그렇게 말한 아스달이 나를 향해 손을 뻗으려고 했을 때였다.

탁!

스릉.

오두막 중앙의 빈 바닥에 카이든이 던진 단검이 꽂혔고, 에녹이 뽑아 든 장검이 아스달을 겨누고 있었다.

디에고가 바로 에녹의 검을 견제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는 얌전히 앉아 상황을 관망했다.

“적당히 좀 하시죠? 마거릿이 겁먹었잖습니까.”

“마거릿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죽인다.”

두 남자가 살벌하게 읊조리자 아스달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항복하는 제스처를 했다.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웃음을 지었다.

“추궁하는 건 아니었어. 나는 해야 할 질문을 했을 뿐이야.”

“그런 것치곤 너무 몰아세우긴 하셨죠.”

“그간 마거릿의 도움은 있는 대로 다 받아 놓고, 왕세자 저하께선 의외로 양심이 없으십니다.”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던 유안나가 피곤한 얼굴로 말을 얹었고, 그 뒤를 이어 루제프 주교가 쐐기를 박았다.

“모두의 신뢰가 대단하군. 나도 영애를 의심하고 싶지 않아. 변한 플로네 영애는 볼수록 마음에 들거든.”

속에 구렁이가 백 마리쯤 있는 거 아닐까. 도무지 속을 알 수가 없다. 아스달은 정말로 노련한 여우 같았다.

그가 조금 전 일은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이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뭐, 그건 일단 넘어가지. 그리고 성녀가 오면 말하려고 했는데, 우린 이 오두막을 떠나야 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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