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100)화 (100/234)

“섬의 지도 같습니다.”

디에고의 말에 유안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천을 크게 펼쳤다.

커다란 섬 가운데 흐르는 강, 그리고 강을 기점으로 서북단에 별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섬의 곳곳에 란그리드 제국어로 ‘보급’이라고 적힌 글자가 있었다.

“이 별 표시는 뭘까요? 그리고 보급? 이건 뭐지?”

유안나의 물음에 카이든도 디에고도 영문을 몰라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다시금 지도를 찬찬히 눈으로 훑으며 중얼거렸다.

“음…… 이게 정말 섬의 지도라면, 상당히 중요한 걸 주운 것 같은데. 보급이라니, 뭘 보급한다는 건지 모르겠네.”

그녀 옆에 서서 지도를 유심히 보던 카이든이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이런 지도는 누가 만든 거지?”

“그러게요. 오두막을 만든 사람과 같은 사람일까요? 섬에 누군가 살았거나, 아니면 지금도 살고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 섬에 우리를 데려온 사람이거나.”

유안나의 추리가 그럴듯해서 카이든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셋 다 맞을 수도?”

그리고 그는 주머니에서 마거릿이 그려 준 지도를 꺼냈다.

“그건 뭡니까?”

“아, 마거릿이 그려 준 지도.”

디에고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한 그가 유안나의 손에 들린 지도와 비교했다.

“뭐야, 꽤 정확하게 그렸잖아?”

마거릿이 산 정상에서 보고 직접 그린 것이라고 했는데, 지형이 놀라울 정도로 조금 전 주운 지도와 흡사했다.

물론 여러 가지 기호가 함께 표시되어 있는 이 지도와 달리, 마거릿의 것에는 지형 외 다른 정보는 없었지만.

“누군가 여기서 열쇠와 지도를 떨어뜨린 거겠죠?”

유안나는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그것을 빤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여기서 깨어났을 당시에, 더 기억나는 거 없어?”

카이든의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없어요. 그냥 깨어나 보니 머리맡에 열쇠가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거든요.”

“딱히 의미 있는 장소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특별한 것도 없고.”

하다못해 마물들에게 공격당한 흔적도 없었다. 누군가 급하게 도망치다가 실수로 떨어뜨린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단 거다.

카이든은 찬찬히 유안나 주변을 맴돌며 머리를 굴려 봤지만, 답이 나오질 않았다.

“이거 다리 아닙니까? 이곳에서 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유안나가 주운 지도를 보고 있던 디에고가 의아한 얼굴로 그들에게 말했다.

각기 다른 곳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카이든과 유안나가 디에고의 손에 들린 지도 앞으로 모였다.

그의 말대로 지도 가운데 남섬과 북섬을 잇는 다리 표시가 하나 있었다.

“아, 그러네요. 아깐 보급 표시만 보느라 이건 못 봤네.”

유안나가 중얼거릴 때, 디에고가 동쪽 방향을 가리키며 물었다.

“성녀님, 저기 보이십니까?”

유안나를 따라 카이든도 디에고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멀리 있지만, 시야에 언뜻 강 사이를 가로지르는 다리 같은 게 보였다.

“북쪽 섬으로 넘어가는 다리 같은데요?”

그들은 모두 다리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저 다리는 또 누가 만들었는지 의문입니다. 오두막을 만든 사람이랑 동일 인물일까요?”

디에고의 물음에 카이든과 유안나가 동시에 어깨를 으쓱였다.

“지도 보니까, 여기가 딱 중간 지점인 것 같던데. 북섬으로 넘어가려면 동쪽 끝까지 가야 하니 여기에 다리를 만든 게 아닌가 싶어요.”

유안나의 말에 카이든이 동의했다.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은데, 북섬에 뭐가 있나?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것 같은데.”

“북섬에도 보급이라고 쓰여 있는 장소가 있던데요. 별 표시도 북섬에 있었고. 아마도 그것 때문 아닐까요?”

유안나의 말을 들으며 유심히 다리를 살피던 카이든이 디에고를 돌아봤다.

“건너 볼래?”

“폭이 좁아 한 명씩 건너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디에고 경, 먼저 다녀와 보는 게 어때?”

“제가 실험용입니까?”

“나 실험이란 단어 싫어해. 그런 거 아니야.”

“뭐가 됐든 사양합니다.”

디에고는 아무런 동요 없는 얼굴로 딱 잘라 거절한 뒤, 입을 다물었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살피던 카이든이 깍지를 끼고 뒷머리를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주교랑 다르게 재미가 없어.”

카이든의 중얼거림에 디에고가 혐오스럽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변탭니까?”

“경이 재미없는 건 사실인데, 왜 날 변태 취급하지?”

“사람 괴롭히는 데 즐거움을 느끼시는 것 같아 변태라고 한 것뿐입니다.”

“오. 제법 재미있게 말하네.”

“그것 보십시오, 당신은 변태입니다.”

“뭐야, 경이 내 주치의야? 나는 변태가 아니라 미친놈이거든.”

디에고가 다시 한번 경멸 가득한 시선을 카이든에게 던졌다. 그러자 카이든은 정말로 미친 사람처럼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디에고가 다소 열이 받은 얼굴로 검집 위로 손을 올리자 유안나가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지금 다리를 건너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요. 일단 돌아가기로 한 날짜보다 많이 늦어졌잖아요?”

유안나의 물음에 두 남자 모두 동의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는 굉장히 낡고 불안정해 보였고, 한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매우 좁았다. 괜히 건너려 시도했다가 오두막 일행에게 소식을 전하지도 못하고 명을 달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 우선 오두막에서 기다리는 일행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함께 오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디에고의 대답에 유안나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바로 그거예요.”

카이든이 유안나를 따라 디에고를 향해 쌍 엄지를 들어 보였다.

“좋은 생각이야.”

그리고 오두막으로 떠나기 전에 카이든이 유안나와 디에고를 향해 당부했다.

“텐타티오넴 꽃이 또 우리가 지나갈 때 번식을 해서 개체를 늘릴지도 모르거든? 그것들은 사람 체온이 닿으면 미친 듯이 번식을 해. 그러니 최대한 몸이 안 닿도록 오두막까지 뛰어가는 게 좋겠어.”

유안나와 디에고가 결의에 찬 얼굴로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한나절 내내 달렸고, 텐타티오넴 꽃과 마주치며 몇 번의 고비가 있었지만 다행히 무사했다.

그리고 밤에는 거대한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 가지에 몸을 묶은 다음 잠을 청했다. 그렇게 험난한 이틀을 보낸 일행은 마침내 오두막으로 복귀했다.

* * *

에녹은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었고, 루제프는 저녁잠을 자고 있었다.

은지는 중간중간 눈을 뜨기는 했으나, 텐타티오넴을 먹은 뒤로는 계속 잠만 잤다.

나는 벽난로 앞에 누워 고롱고롱 자고 있는 은지의 배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은지는 텐타티오넴을 먹고 난 뒤로 훌쩍 자랐다.

내 한쪽 팔을 다 감고도 남을 정도로 두껍고 길쭉해진 것이다.

‘귀여움은 조금 사라졌나?’

나는 잠든 은지를 빤히 쳐다봤다. 은지는 잠든 와중에도 내 토닥거림이 좋았는지 꼬리를 살랑살랑 움직였다.

‘귀엽긴 하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는 사이, 아스달이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영애, 잠깐 손 좀 줘 보게. 마력안을 좀 쓰고 싶은데.”

“마력안은 왜요?”

“뭔가 불길해서.”

불길하다니. 뭐가 불길하단 걸까.

아스달은 마력안을 쓰지 않을 때에도 그 영향을 받는지 오감만으로 무언가를 예측하곤 했다. 그러니 그가 뭔가를 느꼈다면, 정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반지 낀 손을 얌전히 그에게 내밀었다. 그가 내 손을 잡자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초록빛으로 반짝인다.

손끝을 타고 빠져나가는 마력의 흐름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딱히 힘들이지 않고 가만히 아스달에게 마력을 주입하고 있는데 그가 돌연 나를 쳐다봤다.

“일행이 오면 상황 정리를 한번 하고 바로 떠나는 게 좋겠어.”

“왜요? 뭐가 보였어요?”

“마물들의 움직임이 이상해. 꼭 이 오두막으로 모이는 것 같단 말이지.”

“하지만, 어차피 이 오두막 안으로는 들어오지 못하잖아요.”

오두막 주변엔 결계가 있으니까.

“그래도 느낌이 영 좋지 않아. 어차피 떠나긴 해야 하지 않나. 섬의 비밀을 찾으려면.”

아스달의 말이 맞다. 오두막에서 평생 지낼 건 아니니까. 섬 전체를 둘러보기로 했었고.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자네가 본 마력의 흐름이 그렇다면, 맞겠지. 정찰 멤버가 돌아오면 이곳을 정리하는 게 좋겠군.”

식사 준비를 끝낸 에녹이 마른 천으로 돌칼을 닦아내며 말했다. 아스달의 실력에 대한 신뢰가 묻어나는 대사였다.

아무튼 우리는 결국 오두막을 떠나기로 합의하고는 필요한 짐을 대충 정리했다.

‘카이든이 얼른 무사히 돌아와야 할 텐데.’

카이든이 오면 마력도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는 마력 그 자체를 사용하는 마법사니까 아마 더 시너지가 크지 않을까?

한참 카이든을 떠올리고 있을 때, 귀신같은 타이밍으로 카이든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어라? 다들 굉장히 한가롭다?”

황급히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두막 문을 열고 카이든과 유안나, 디에고가 차례로 들어오고 있었다.

“무사했구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에게 달려갔다. 카이든의 상태를 먼저 살핀 뒤, 유안나와 디에고의 상태도 살폈다.

다행히도 모두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다들 괜찮아요?”

내 물음에 카이든의 얼굴이 뭐 씹은 것처럼 사납게 일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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