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99)화 (99/234)

그녀의 물음에 디에고가 참담한 얼굴을 했다.

“그게, 성녀님께서…….”

그가 사실대로 털어놓을 기미를 보여서 카이든이 빠르게 그의 말을 가로챘다.

“성녀님. 별말 안 했는데. 하나도 기억 안 나?”

유안나가 환각에 시달리며 했던 말들은 언뜻 흘려듣기에도 트라우마처럼 보였다.

그녀 또한 전혀 기억을 못 하는 상황에서 구태여 기억을 상기시켜 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그 이상한 꽃이 제 발목을 감은 뒤부터 딱 끊겼어요.”

그녀의 말에 카이든은 한숨을 내쉬며 디에고와 유안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 붉은 꽃은 로하데 가문에서 비밀리에 실험하고 개발한 텐타티오넴이라는 특이 독화야.”

두 사람이 놀란 눈을 하고 카이든을 쳐다봤다. 카이든은 개의치 않고 설명을 이어 갔다.

“텐타티오넴 꽃에서 나오는 독의 중독성은 만성보다는 급성 성질이 강해. 그래서 이 독에 중독되면 충동적으로 흥분과 환각 같은 정신 질환이 발생하고, 일시적으로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는 거지.”

“흥분과 환각이라……. 지난밤 저와 디에고 경이 겪었던 증상이네요.”

유안나가 초췌한 얼굴을 하고 대답하자 카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인간의 신경 전달 물질 중에 뇌에 흥분을 일으키는 역할을 하는 게 있거든. 이 꽃에서 나오는 중독성 물질도 바로 그런 종류야. 중독되지 않은 사람의 낮은 체온만이 이 물질의 기능을 저하시키지. 내가 아는 건 딱 여기까지야.”

카이든의 설명을 듣던 디에고가 심각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로하데 가문에서는 대체 왜 이런 꽃을 만든 겁니까? 무얼 하려고? 그리고 로하데 가문에서 개발한 꽃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그건 나도 몰라. 내가 가문 사람들하고는 별로 안 친해서. 그런데 확실히 수상쩍긴 해.”

“그리고 로드, 이제 존대는 버리신 겁니까?”

디에고가 눈살을 찌푸리고 다소 불만스러운 듯이 물었다. 카이든은 황당하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지금 그게 중요하냐는 투로 대답했다.

“지난밤 당신네들이 날 생고생시킨 거 생각하면 존대 같은 건 바라지 말지?”

카이든의 말에 디에고가 결국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 섬과 로하데 가문이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네요.”

유안나의 말에 카이든이 동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추측이긴 하지만, 그럴 가능성도 있겠어.”

“보아하니, 로드께선 독에 중독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

디에고의 물음에 카이든은 턱을 괴고 기억을 더듬었다.

“기억은 이제 가물가물하지만, 어릴 때 실험을 당했거든. 그 덕에 독에 내성이 생겼어.”

“대체 무슨 실험을 당했기에…….”

“디에고 경. 그런 걸 직접적으로 묻는 건 실례예요.”

유안나가 디에고를 나무랐다. 그러자 디에고가 민망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유안나에게 물었다.

“성녀님께선 괜찮으십니까?”

카이든은 혀를 차며 디에고를 쳐다봤다. 그는 유안나를 챙기기에 여념이 없어 보였다. 뻐근한 뒷목을 매만지며 가만히 그 모습을 보던 카이든이 물었다.

“그런데 디에고 경은 성녀님을 왜 그렇게까지 챙기는 거야? 좋아해?”

“로드가 플로네 영애께 하는 행동들에 비해선 양호한 편 아닌가?”

그리고 어느새 본래의 컨디션으로 돌아온 유안나가 넉살좋게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말에 카이든은 할 말이 없어져서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디에고 경이 날 챙기는 거? 별 거 아니에요. 아스달 저하와 경께서 내게 죄책감을 갖고 있어서 그래요. 이런 건 별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상황이 상황이니…….”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일을 얘기하듯 덤덤하게 말했다.

디에고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묵묵히 유안나의 너저분한 옷가지를 정돈했다.

‘뭔가 성가신 얘기가 얽힌 것 같은데.’

카이든은 괜히 캐물은 걸 내심 후회하며 얌전히 그녀의 설명을 들었다.

“마물들에게 공격당했을 때, 두 사람이 나를 버렸어요.”

“버린 것은 아닙니다. 타란툴라 마물에게 공격을 당한 채로 절벽에서 떨어졌으니, 즉사하셨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살았죠.”

디에고가 곧장 반박하자 유안나가 양손을 들며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 말을 듣고 카이든은 잠시 감탄했다.

‘……절벽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는 일이 흔한 건가?’

진지하게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녀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도 저희는 마물들을 상대하는 중이었습니다. 찾으러 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네. 이해해요.”

디에고의 계속되는 반박에 유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빈정거리는 투가 아니라 정말로 디에고를 이해한다는 얼굴이었다.

카이든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두 사람의 설전을 지켜봤다.

“그래서 제 목숨을 바쳐 성녀님을 지켜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난 진짜 괜찮은데.”

유안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카이든에게 동의를 구하는 얼굴로 디에고를 가리켰다.

“보셨죠? 저는 이해한다고 하는데도 저래요. 애초에 나를 구할 생각이 없었던 거겠죠. 그렇지 않고서야 저 정도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는 없잖아.”

유안나가 진절머리 난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카이든도 혀를 찼다.

유안나가 터프한 손짓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성가시다는 듯이 귀를 후비며 디에고를 내려다봤다.

상당히 거친 그녀의 모습에 제아무리 카이든이라도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행동거지는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자신과 비슷하게 경박스러웠다.

“하아, 귀찮아, 진짜. 나 정말 원망하는 거 아니에요. 나라도 그랬을 거니까. 우린 그때 모두 초면이었다고.”

유안나가 한숨을 내쉬며 디에고를 쳐다봤다.

카이든은 그녀가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하긴 해도, 당시 상황은 보다 심각했음을 직감했다.

잠시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던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벌써 시간이 꽤 흘렀다. 예정된 시간 안에 목적지에 다녀올 수 있긴 한 걸까?

카이든은 적당히 대화의 흐름을 끊으려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디에고를 쳐다봤다.

“근데 어차피 경의 기사도 정신엔 하자가 좀 많지 않아? 목욕하는 마거릿의 드레스도 훔쳤잖아.”

오두막에서 마거릿이 디에고의 옷을 훔치며 복수했던 일로 모두가 알게된 사건이었다. 유안나도 그를 감싸줄 생각은 없는지 어깨를 으쓱이며 뒤로 물러났다.

디에고가 괴로운 얼굴로 그들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맞습니다. 전 기사도 정신이 부족합니다. 당시 저는 성녀님에게 가진 죄책감을 덜고 싶었습니다. 설사 그것이 옳지 못한 방법이더라도.”

디에고의 뺨을 타고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턱 끝에 맺힌 눈물방울이 무릎 위에 놓인 그의 주먹에 떨어졌다.

누가 보면 기사도의 화신이라고 할 만한 곧은 태도였다.

그러나 카이든이 느끼는 디에고의 반응은 조금 오묘했다. 단순히 죄책감 때문에 그녀를 챙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뭔가 더 사적인 감정이 섞인 것 같기도 하고.’

유안나는 대체 저 머저리 같은 놈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단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카이든 역시 몹시 피곤해져서 디에고를 내려다봤다.

디에고는 제 신념에 반하는 짓을 저지른 데 대한 죄책감과 유안나를 향한 알 수 없는 감정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인 듯했다.

아무래도 이리저리 뒤엉킨 여러 감정이 감당되지 않아 정신 줄을 놓은 것처럼 보였다.

‘가만 생각해 보면, 여기 안 미친 놈은 없는 것 같은데. 나 정도면 평범한 거 아닌가?’

카이든은 턱을 괴고 곰곰이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녀 쪽에서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도 알아냈겠다, 이 정도면 마거릿에게 잘했다고 칭찬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마 후, 카이든 일행은 드디어 유안나가 처음 깨어났다는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은 앞으로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는 자갈밭이었다.

“저와 왕세자 저하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깨어났습니다.”

자갈밭을 둘러보던 중에 디에고가 말했다. 카이든은 커다란 바위 위에 서서 자갈밭을 내려다보며 턱을 괴었다.

“열쇠는 그냥 바닥에 떨어져 있었어요. 손에 닿는 곳에. 이상하지…… 정말로 특별한 건 없어 보이는데.”

유안나는 자신이 처음 쓰러져 있던 위치에 서서 주변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멀리까지 나가서 간단히 주변을 훑고 온 디에고가 그들 곁으로 돌아와 상황을 보고했다.

“저쪽도 돌아봤는데 별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때 물가에 서서 물속을 들여다보던 유안나가 허리를 숙였다. 그녀가 물속으로 손을 집어넣고는 뭔가를 꺼냈다.

“아? 별게 있긴 하네요?”

“응?”

유안나가 주운 건 웬 얇은 천이었다. 그리고 천에는 그림과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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