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98)화 (98/234)

* * *

유안나와 디에고는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문제는 붉은 꽃의 소름끼치는 번식 능력이었다.

정비를 하고 다시 길을 떠나려는 그들의 뒤로 붉은 꽃이 마치 눈밭에 찍힌 발자국처럼 개체수를 늘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이건 좀 무서운데요.”

유안나가 소름끼친단 얼굴로 붉은 꽃을 돌아봤다.

“말하지 말고 코 단단히 막으시죠.”

카이든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즉시 코를 꽉 막았다.

하지만 기이한 현상은 그때 벌어졌다.

일행은 카이든, 유안나, 디에고 순으로 이동 중이었는데,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피어난 꽃들이 디에고를 지나쳐 유안나의 발목까지 따라왔다.

그리고 유안나의 발목에 뿌리가 감기더니 이내 줄기까지 자라며 붉은 꽃이 피어났다.

“꺄악! 이게 뭐야! 악!”

“자, 잠시만 가만히 계십시오!”

디에고가 그녀의 발목을 휘감은 꽃을 떼 내려다가 꽃 향을 맡고 다시 중독되고 말았다.

카이든이 유안나의 발목을 붙잡고 간신히 꽃을 떼어 냈지만, 이미 유안나도 중독된 후였다.

“XX, 이게 대체 뭐야!”

놀랍게도 붉은 꽃은 그들이 중독되는 순간 개체수 늘리는 걸 멈췄다.

마치 누군가가 그들을 지켜보며 상황을 조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지난밤과는 상태가 다소 달랐다.

디에고는 초점 없는 눈을 하고 넋이 나가 있었고, 유안나는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카이든은 우선 디에고와 유안나를 각각 한 손으로 들쳐 업고 꽃밭을 벗어났다. 역시나 붉은 꽃들은 할 일을 다 한 것처럼 따라오지 않았다.

“아아. 아아아아아.”

그의 오른쪽 어깨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유안나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상한 신음을 뱉었다.

“뭐야, 왜 그래요. 참아.”

카이든은 황급히 뛰었다. 디에고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게 무척 불안했다. 그리고 드디어 거대한 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리 붉은 꽃이라 할지라도 이런 자갈밭까지는 따라오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든은 우선 두 사람을 자갈밭 위에 내려놨다.

향을 상대적으로 덜 맡았는지 생각보다 디에고는 멀쩡했다. 아직 이성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는 자갈밭에 내려오자마자 카이든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사람과 접촉을 해야만 숨 쉬기가 편안해지는 것 같습니다.”

디에고의 말을 이해는 했으나, 카이든은 그와 체온을 맞대고 싶지는 않아서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하지만 그의 손목을 다시 움켜쥔 디에고는 애처로운 눈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부탁드립니다…… 로드. 살려 주십시오.”

“환장하겠네.”

카이든은 탐탁지 않은 얼굴로 디에고를 보다가 유안나의 상태를 살폈다. 유안나 쪽은 상황이 다소 심각해 보였다.

“이봐, 성녀님. 괜찮아요?”

카이든이 결국 디에고에게 한쪽 팔을 내준 채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유안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이 조급하게 손을 뻗어 카이든의 양 뺨에 손을 얹었다.

이윽고 그의 뺨을 부드럽게 매만진다. 마치 잃어버린 애인을 대하듯 애처롭게.

“……마. ……지……마.”

그녀는 어딘가에 홀린 사람처럼 빠르게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카이든은 성가시단 얼굴로 그녀의 손을 떼어 내고 미간을 좁힌 채, 귀를 기울였다.

“뭐?”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아 XX, 깜짝이야!”

“성녀님.”

듣고 있던 디에고가 화들짝 놀라서 카이든의 손을 놓고 유안나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성녀님! 정신 차려 보십시오!”

“아아아악!!”

유안나가 어깨를 움츠리고는 두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질러 댔다. 그러자 디에고가 당황한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하지 마. 죽지 마. 혼자 살고 싶지 않아…….”

그녀가 엉엉 울음을 터뜨리며 소리를 질렀다. 카이든조차 당황해서 멍하니 그녀를 쳐다봤다.

유안나는 환각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의 깊은 트라우마를 건드리기라도 한 모양이다.

“아, 혹시 아까 그 꽃. 텐타티오넴인가?”

카이든의 중얼거림에 디에고가 다급한 얼굴로 그를 돌아봤다.

“텐타티오넴이 뭡니까? 아는 꽃입니까? 성녀님을 어떻게 좀 해 주십시오!”

“로하데 가문에서 개발한 꽃입니다. 생김새야 꽃이 다 거기서 거기니까 분간이 어려운데, 증상을 보니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그건 자연적으로는 피어날 수 없는 꽃인데…….”

“치료 방법이 있습니까?!”

디에고의 물음에 카이든이 고개를 저었다.

“해독제를 만들려면 장비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선 만들 수 없죠. 그래도 신체 접촉을 하고 있으면 일정 시간 후에 증상이 사라집니다.”

카이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디에고가 유안나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는 곧 울상을 지으며 카이든을 올려다봤다.

“뭐요, 왜.”

카이든이 팔짱을 낀 채로 되묻자 디에고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도 중독자여서 그런지 효과가 없는 것 같습니다. 로드의 손을 잡았을 때는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는데, 그런 느낌이 전혀 없어요.”

디에고의 말대로 유안나는 여전히 엉엉 울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카이든은 잠시 아랫입술을 짓이겨 씹었다. 그가 제 몸을 내어 주면 되는 문제라는 걸 알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로드.”

디에고가 한숨을 내쉬며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립니다. 부디 저희의 손을 잡아 주십시오.”

눈 딱 감고 그들에게 몸을 내어 주면 앞으로가 편해질 거다. 그래야 마거릿에게도 할 말이 있고.

카이든은 잠시간의 고민 끝에 결국 그들에게 자신의 양손을 빌려주기로 했다.

* * *

나는 커다란 나무 바구니에 숫돌을 담그고는 열린 문틈으로 오두막 밖을 내다봤다.

“돌아오기로 한 예정일이 많이 지났죠?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저희가 가 봐야 하는 건 아니에요?”

내 옆에 가만히 앉아 지켜보던 에녹을 향해 물었다.

늦어도 닷새면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했던 유안나 일행은 일주일이 되도록 소식이 없었다.

“많이 늦긴 하는군.”

에녹은 성의 없는 투로 대답한 뒤,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마라. 디에고 경의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로드 또한 만만찮은 괴력을 갖고 있으니.”

하긴 유안나도 보통 성격은 아니고. 나는 에녹의 말에 동의하며 물에 담근 숫돌을 꺼내어 바닥에 내려놨다.

바닥에 천을 깔고 숫돌이 움직이지 않게끔 고정한 다음 에녹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검 줘 보세요.”

나는 에녹의 허리춤에 꽂힌 검을 보며 말했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순순히 내게 검을 건넸다.

난 숫돌에 한 번 더 물을 뿌려준 뒤, 왼손으로 검날을 누르고 오른손으로 날의 각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검날을 갈았다.

그때 오두막 밖을 정찰한 뒤 돌아온 루제프와 아스달이 신기해하며 내게로 모여들었다.

“맙소사, 플로네 영애는 섬에서 탈출하면 대장간에서 일해도 되겠군.”

또 시작이네.

아스달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턱을 괴고는 내가 하는 양을 지켜봤다.

“귀족 영애에게 대장간에서 일하라니, 그게 무슨 무례한 말입니까.”

아스달의 말을 들은 루제프가 그를 나무랐다. 그러자 아스달이 황당하단 얼굴로 나를 가리켰다.

“아니, 농담도 못 하나? 대장간 일도 나라에 이바지하는 나름 고귀한 일이야.”

궤변이었지만 대꾸할 말이 없었는지 루제프가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아스달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 플로네 영애한테 씌었어.”

“입조심하지.”

에녹의 목소리가 지독하게 낮았다. 그가 잔뜩 화가 나 있다는 뜻이다.

“그러게 말이에요. 저 지금 칼 들고 있거든요? 원래 칼 든 사람 심기는 건드리는 거 아닙니다. 입조심하시죠, 왕세자 저하.”

나는 검날을 날카롭게 갈다가 아스달을 향해 검을 들어 보였다.

뒷짐을 지고 물러난 아스달이 웃으며 말했다.

“플로네 영애, 오해하지 말게. 분명 칭찬이었어.”

“칭찬이 아닌 건 알아요.”

“역시 내 편은 없군.”

내가 냉정하게 말하자 아스달은 흐르지도 않는 눈물을 닦는 시늉을 했다. 매번 먼저 시비를 걸고서 꼬리 말기 지겹지도 않나.

아무튼 나는 에녹의 무딘 검날을 날카롭게 갈아 준 뒤, 나무칼과 돌칼도 갈고는 자리를 정돈했다.

* * *

유안나와 디에고가 정신을 차린 건 태양이 머리 위로 떠올랐을 때즈음이었다.

뜨거운 한낮,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디에고가 카이든의 팔을 집어 던지듯 놓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릎 꿇고 빌 땐 언제고, 경은 은혜도 모르는군?”

기가 찬단 얼굴로 카이든이 비아냥 대자, 디에고가 옷가지를 정돈하며 태평하게 대답했다.

“손잡아 주신 건 감사했습니다.”

전혀 고맙지 않은 얼굴로 전하는 무미건조한 감사 인사였다.

그리고 그때, 유안나도 정신이 들었는지 화들짝 놀라듯이 카이든의 팔을 치워 냈다.

“하, 이것들이…….”

카이든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며 이번엔 유안나를 노려봤다.

그녀는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기억 안 나십니까?”

디에고가 그녀에게 다가가 안색을 살폈다. 카이든은 그러거나 말거나 피곤한 얼굴로 미간을 문질렀다.

디에고에게서 상황 설명을 들은 유안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나, 무슨 이상한 말 했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