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97)화 (97/234)

에녹은 의외로 얌전히 아스달을 보조하며 나를 도왔다.

“잠재력은 많은데, 재능은 없다는 게 이런 건가 보군.”

한참 동안 나를 가리키던 아스달이 한숨을 내쉬며 아주 신랄하고 냉정하게 내 힘을 평가했다.

하루 종일 나한테 붙어서 마력 운용법을 설명해 주던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매우 민망했다. 그렇다고 단숨에 마력을 잘 다루는 모습을 보여 줄 생각은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래요. 연습하다 보면 잘 되겠죠.”

내 대답에도 아스달은 회의적인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나.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영애뿐인 걸. 방법이 없으니 계속 연습하도록 해.”

아스달의 말에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토라진 루제프가 2층에서 내려와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까지 마력 운용법을 계속해서 연습했다.

* * *

내가 설치해 뒀던 덫에 다람쥐가 여러 마리 걸렸고, 덕분에 저녁은 적당히 때울 수 있었다.

우리는 벽난로 앞에 옹기종기 앉아 고기를 뜯었다. 입맛이 없는지 깨작거리며 먹던 루제프가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만약 누군가 이 섬에 우리를 의도적으로 가둔 거라면, 목적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이유를 모르겠더군요.”

루제프의 중얼거림에 우아하게 고기를 뜯던 아스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기를 내려놓은 그는 자신의 옷을 찢어 만든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고서 입을 열었다.

“그렇지, 마치 신의 장난처럼 여겨지기마저 하는군.”

장난, 신의 장난이라…….

그 말을 듣자 불현듯, 의식 저편에 숨어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주사위 놀이…….”

“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는데 그걸 들었는지 아스달이 반문했고, 에녹과 루제프가 나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런 시선 따위를 신경 쓸 정신은 없었다. 불현듯 체육학 시간에 공부했던 알레아란 단어의 의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는 깊게 생각에 잠겨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알레아가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이 섬의 이름일 수도 있겠어요.”

“알레아가, 이 섬의 이름이라고?”

내 말에 아스달이 반문했다. 나는 멍하니 고개를 들고 나를 보는 남자들을 훑었다.

“알레아란 단어가 동대륙 소수 민족 언어로 ‘주사위 놀이’를 의미하거든요. 주사위 놀이라는 게, 내 노력 여부와 상관없이 오로지 운명의 지배를 받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단어가 섬 곳곳에 새겨져 있다는 게, 무슨 의미겠어요?”

머릿속에 폭풍이 들이닥친 기분이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가만히 나를 보던 루제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영애 말은…….”

“아무래도 저희는 실험을 당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알레아가 이 섬의 이름이 아니라면, 어떤 실험의 이름일 수도 있겠죠.”

이번엔 아스달이 물었다.

“누가 감히, 우리를 실험하지?”

“그건 모르죠. 지금부터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상대방은 서대륙 공용어뿐 아니라 동대륙 언어까지 능숙하게 사용해요.”

정확히는 서대륙 공용어와 한국어, 영어겠지만. 이 섬을 설계한 설계자가 있다면, 그는 이쪽 세계의 언어와 저쪽 세계의 언어를 모두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만약 실험이라면 우리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섬 안에 있을 수도 있겠군.”

에녹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가능성이 가장 크죠.”

내 대답을 끝으로 꽤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모두들 각자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이 없었다.

각자 저를 실험 대상으로 삼고 싶어할 만한 누군가가 있는지 과거의 기억을 되짚어 보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 또한 원작 내용을 떠올려봤지만, 역시나 소설을 끝까지 읽은 게 아니어서 더 떠오르는 건 없었다.

그러다가 난 마거릿이 가진 마력에 대한 것으로 생각의 방향을 옮겼다.

“생각해 보면, 저희 모두 또 다른 공통점이 있지 않나요?”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다시금 내게로 향했다. 세 남자가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본다. 나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우리 모두 일반 사람들이 보유하고 있는 것의 몇 배에 달하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게 공통점이에요.”

모든 사람이 마력이나 신력을 갖고 태어나는 건 아니다.

마력은 정말 소수의 사람만 갖고 태어나며, 이 섬에 모인 이들은 그중에서도 아주 강력한 마력과 신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카이든은 말할 것도 없었고 에녹과 디에고는 마력에 기반한 검기를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검술 실력자들이다.

루제프는 엄청난 신력을 가진 최연소 대주교였고 유안나 역시 백 년 만에 나온 성력 보유자였다.

아스달의 마력 보유량은 크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헤스티아 왕국 아카데미 동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정도라서 원작 속 에녹이 언급하기도 했었다.

처음에는 사회적 지위와 신분 때문에 납치당다고 여겼으나, 사실 일부 고위 신분을 무인도에 모아보았자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없었다.

전쟁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납치된 이들이 각기 다른 기관, 다른 나라의 주요 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섬이 실험을 위한 섬이고, 납치범이 우리를 실험용으로 이 섬에 데려온 거라면 결국 마력 때문이라는 게 더 앞뒤가 맞을 것 같군.”

에녹이 내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실험을 위한 납치였다고 해도 어차피 각 나라에선 우리의 실종 이유를 알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농후했다.

그렇다면, 후자 역시 대륙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는 건 마찬가지겠지만.

“하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는 또 있습니다. 대륙 전쟁이 일어날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우리의 마력을 가지고 하려는 실험이 뭐냐는 거죠.”

루제프가 핵심을 짚었다.

그의 말을 듣다가 나는 문득 생각했다.

이 섬에 현대식 물건이 있는 것과 납치범이 한국어 및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게 뭔가 단서가 되지 않을까? 역시 우리를 납치한 사람이 지구 쪽 사람인 걸까?

만약 그렇다면 대륙 전쟁 따위를 그들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 신분 같은 걸 굳이 따지지 않고 무조건 보유한 마력이 가장 강한 사람들을 납치해 올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추론 역시 이들에게는 털어놓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라 나는 답답한 마음으로 입을 다물었다.

내가 이 사실을 이들에게 말하려면, 스스로 납득할 만한 확실한 증거가 나와야 했다.

어설프게 아는 정보로 언급했다간 간신히 쌓은 신뢰마저 무너질 수도 있다.

“우리의 공통점이 ‘강력한’ 마력이라고 한다면, 의문이 또 생깁니다. 왜 납치범은 강력한 마력을 가진 이들을 모아 놓고는 섬에서 그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건지, 또 왜 플로네 영애만은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지.”

이번에도 루제프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짚고 넘어간다.

“내가 봤을 땐, 마거릿의 마력을 남겨둔 건 어쩌면 실험자의 실수일 수도 있다. 그리고 마력을 봉인시킨 건 마력이 없는 상태에서의 우리의 한계점을 실험하는 느낌 같기도 하고.”

에녹이 짜증스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의 말도 제법 그럴듯하게 들렸다.

“마력이 없는 상태의 한계점을 실험하기 위함이라, 그럴싸한데? 사실 피실험자가 실험자의 목적을 정확히 파악하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긴 해.”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앉아 있던 아스달이 에녹의 말에 동의하며 말을 덧붙였다.

나는 그들이 추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알레아’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들에서 공통점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나를 보는 세 남자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오르는 걸 보고 나는 조명탄을 꺼내 왔다. 그리고 조명탄의 옆면에 새겨진 알레아란 글씨를 가리켰다.

“실험자의 손이 닿은 것들엔 알레아란 글씨가 새겨지는 것 같거든요.”

내 말에 다들 조명탄에 새겨진 알레아란 글씨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로드의 말에 따르면, 마물의 몸에도 알레아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했다.”

에녹의 말에 아스달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렇다면 실험자가 마물도 조종을 한다는 건가.”

“아, 2층 복도 창문에도 이 글자가 있었습니다.”

대화를 가만히 듣던 루제프가 말을 얹었다.

그제야 나는 아까 토라진 루제프가 2층으로 올라가버렸던 게 떠올랐다. 그때 발견한 글자인가 보다.

그렇다면, 이 오두막도 실험자의 손이 닿은 거란 소리다.

“만약 실험자의 손에 닿은 것들에 글자가 새겨지는 거라면, 과거의 물건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런 물건들이 생겨날지도 모르잖아요.”

“지금으로선 지켜보는 것밖에 답이 없겠군.”

내 말에 에녹이 대답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모두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터져 나왔다.

“정찰대가 돌아오면 열쇠에 대한 정보를 들어 보고 대책을 세우는 편이 좋겠어요.”

아무래도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려면 유안나 일행이 어서 돌아와야 해.

긴 회의가 마무리되자, 모두가 나를 쳐다봤다. 너무 동시에 나를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봐서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왜요?”

“반황이 왜 정찰대 멤버에 영애를 넣으려고 했는지 알 것 같군.”

아스달의 중얼거림에 에녹과 루제프가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뿌듯한 얼굴을 했다.

아, 그런 의미였어? 싱겁게. 나는 가슴께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기며 웃었다.

“제가 상황 파악도 좀 잘하고 결단력도 있는 편이죠.”

순순히 인정하고 그것을 과시하자 아스달이 짜게 식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에녹과 루제프는 잠시 시선을 회피했다.

뭐야, 요즘은 겸손을 떠는 것보단 진취적인 사람이 인기가 더 많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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