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94)화 (94/234)

그러고는 내 손목을 잡아끌어 손에 뭔가를 쥐어 주었다.

그에게 잡힌 손을 빼서 손바닥을 펼쳐 보니 새끼손톱만 한 에메랄드가 박힌 반지가 있었다.

“이건 뭐예요?”

“물고기 잡아 준 보답.”

오. 양심이라곤 쥐뿔도 없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최소한의 염치 정도는 있었던 모양이다.

“예쁘네요.”

“마력 보조 반지로군.”

내가 들고 있는 반지를 흘끔 본 에녹이 말했다. 그러자 아스달이 박수를 치고서 역시 반황은 똑똑하다며 좋아했다.

“이게 보석처럼 보이지만, 순도 100% 마력석이거든. 마력을 제어하기도 하고 방출을 도와주기도 하는 보조구지.”

반지에 박힌 게 에메랄드가 아니라 마력석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귀한 걸 제게 왜 주시는 거예요? 저는 어차피 마력을 쓸 줄도 모르고 필요도 없어요.”

반지를 다시 돌려주려고 손을 내밀었지만, 아스달은 고개를 저으며 받지 않았다.

“됐어. 사용 안 해도 그냥 받아만 주게. 내가 능력을 가진 이들이 그걸 썩히는 걸 보면 매우 심기가 불편한 사람이라서.”

별로 가지고 싶지 않았지만 왠지 아스달을 상대로 여기서 더 버텼다간 상당히 귀찮은 상황을 맞닥뜨릴 것 같아서 얌전히 반지를 받아두기로 했다.

“이 섬에서 반지의 힘을 바로 시험해 볼 수 없는 게 아쉽군. 보조구라는 건 결국엔 마력을 주입시켜서 발동시키는 물건이니까.”

아스달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은 나는 이 반지가 카이든의 귀걸이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는 걸 깨달았다.

섬에서 마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건, 우리 안의 마력이 완전히 소멸됐기 때문이 아니다. 쉽게 말해 모두의 마력은 몸 안에 ‘봉인’된 상태에 가까웠다.

“껴 보게.”

아스달이 내가 들고 있는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요, 됐어요. 어차피 이 섬에선 쓸모가 없다면서요. 탈출하면 시험해 볼게요.”

“어차피 작동도 안 되는데, 그냥 껴 봐. 예쁘긴 하잖나.”

아스달이 재차 권유했다. 더 거절하면 또 귀찮아지겠지 싶어 나는 하는 수 없이 반지를 슬그머니 검지에 끼워 넣었다.

파앗.

그때, 갑자기 몸 안에 흐르던 기운이 요동을 치더니 손가락으로 점차 몰리기 시작했다.

“잠깐, 어?”

아스달이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도 깜짝 놀라서 기운들이 모여드는 손가락을 쳐다봤는데 갑자기 반지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뭐…….”

아스달이 깜짝 놀라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내 손을 잡자마자 그의 푸른 눈이 짙은 초록빛으로 반짝였다.

놀란 에녹이 나를 걱정하며 달려왔다.

“마거릿! 괜찮은가.”

에녹이 놀란 듯 내 양 뺨을 감싸고 안색을 살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스달을 다시 돌아봤다.

아스달은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고 나를 쳐다봤다.

“방금 영애의 손을 잡자마자 영애의 마력이 내게로 흘러 들어왔어.”

“네……?”

그게 무슨 소리지? 나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어서 눈만 깜빡였다. 방금 반지 낀 내 손을 잡자마자 그의 눈 색이 변한 게 그것 때문일까?

그러고 보니 이 반지가 마력을 제어하기도 하고 ‘방출’을 도와주기도 하는 보조구라고 했었지.

“이 반지가 작동하려면 마력을 주입해야 하는데……. 이 섬에선 다들 마력을 사용 못하는 것 아니었나? 왜 영애만 마력이 봉인되지 않은 거지?”

나도 의아해서 검지에 낀 반지를 내려다 봤다.

왜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마력을 밖으로 방출할 수 있는 걸까?

“저하께서 주신 이 마력 보조구 때문일까요?”

“아니, 말하지 않았나. 마력을 불어 넣어야 한다고. 나는 마력이 지금 막혀 있는 상태라 사용할 수 없어. 지금 보아하니 영애는 애초에 마력이 막힌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나는 그제야 은지가 나보다 더 많은 마력을 가진 카이든을 두고도 굳이 내게 각인한 이유를 깨달았다.

카이든은 마력이 막혀 있어서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인간이었고, 나는 애초에 마력이 막힌 적이 없으니 방대한 마력을 가진 상위 개체로 인식이 된 게 아닐까.

“왜 마력이 봉인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지?”

아스달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하고 내 얼굴을 낱낱이 살폈다. 에녹이 아스달을 경계하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에녹의 등 뒤에서 고개만 살짝 내밀고는 작게 항변했다.

“몰랐으니까요.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마력을 사용할 줄도 모른다고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아스달의 눈을 쳐다봤다. 그의 눈은 조금 전과 달리 원래의 푸른빛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방금 제 손을 잡았을 때 저하의 눈 색이 바뀌었었어요. 이 에메랄드 빛으로요.”

내 질문에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던 아스달이 고개를 들었다.

“내가 마력안을 사용할 땐, 눈 색이 변해. 초록빛으로. 방금 영애가 나한테 준 마력으로 내가 내 마력안을 사용한 거야.”

“……잠깐만요. 제 마력을 저하께서 사용하신다고요? 그게 가능해요?”

“이 마력석이 조금 특별해. 내가 아무렴 아무 물건이나 영애에게 선물했을까 봐?”

아스달의 대답에 에녹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마력의 방출을 돕는 보조구라니, 특이한 물건이긴 하군.”

나는 에녹을 흘끔 올려다보고는 다시 아스달에게 물었다.

“그럼 제 마력을 방출해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면 그 사람이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가요?”

한마디로 내가 이들의 마력 충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인 거다.

아스달은 내 말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은데? 마력을 제어하는 기능 때문에 선물을 한 건데, 방출용으로 사용하게 되다니. 나도 그런 식의 마력 운용은 해 본 적이 없지만……. 방금 내게 했던 것, 황태자에게도 해 보겠나?”

“괜찮아요?”

아스달의 제안에 나는 에녹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에녹이 잠시 아스달을 빤히 바라보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검기 사용이 가능한지 보면 되겠군.”

마법과 검기는 모두 마력을 근원으로 하는 힘이기 때문에 아마 사용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에녹이 허리춤에 달린 검집에서 검을 빼어 들었다. 나는 반지를 낀 손으로 에녹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노란빛의 번개 같은 빛이 번쩍이며 에녹의 검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걸로 확실해졌네. 이 섬에서 마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플로네 영애뿐이라는 거.”

아스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자 에녹이 다시금 바짝 긴장한 얼굴로 검을 쥔 채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스달은 아랑곳없이 팔짱을 낀 채로 느긋하게 우리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건 참…… 이상한 일이네요.”

안 그래도 제일 의심받던 내가 이번 일로 더욱 수상쩍어졌다. 하지만 마거릿의 몸 안에 다른 영혼이 들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우리 모두에게 공통점이 있었다. 다들 어마어마한 마력과 신력을 보유한 사람들이라는 것.

혹시 누군가 우리의 힘을 실험해 보기 위해 이 섬에 가둔 걸까? 그렇다면 왜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막아 놓은 걸까?

그리고 이들 중에 나만 마력 사용이 가능한 건, 역시 ‘이진주’라는 이질적인 영혼이 마거릿의 몸에 빙의했기 때문이겠지?

그것밖에 이유가 없기는 했다.

아스달은 내 속내를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살폈다.

“이상하지. 의심스러운 상황이긴 해. 물론 전처럼 다짜고짜 이 상황의 범인으로 영애를 몰아갈 생각은 없어. 지금까지 보아 온 바로는 영애도 끌려온 쪽 같았으니까. 게다가 우리 중 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희망적인 일이고.”

가만히 아스달을 보던 에녹은 그가 날 위협할 마음이 없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검을 도로 넣었다. 그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마력은 얼마나 쓴 것 같은가? 조금 전보다 힘들어졌다든지.”

에녹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힘든 건 잘 모르겠는데요. 아까랑 비교해서 별 차이는 없는 것 같고. 애초에 마력을 어떻게 느끼는지도 모르겠는데…….”

내 대답을 들은 아스달이 기쁜 얼굴을 하고 박수를 쳤다. 그는 마치 삶의 의욕을 되찾은 것만 같은 눈빛을 하고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저 인간은 능력을 가진 이들이 그걸 썩히는 것만 봐도 심기가 불편하다던 인간이었지.

“역시, 마력 보유량이 대단하니 이 정도로는 마력을 방출한 것 같지도 않은가 보군. 마력을 느끼는 방법 정도야 내가 지금부터 알려 주도록 하지. 영애의 마력을 다른 사람이 나눠 사용하면 좋지 않겠나.”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크게 불만은 없었다.

짧은 시간 안에 내가 직접 마법을 배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니 차라리 내 마력을 방출해서 다른 이들이 마력을 사용할 수 있게끔 보조 역할을 해 주는 게, 지금 상황에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겠지.

아스달이 거실에 잠들어 있는 루제프를 가리켰다.

“루제프 주교가 깨어나면 신력에도 통하는 건지 확인해 보는 게 좋겠어.”

아무리 그래도 내가 가진 건 마력인데 신력하고는 무관하지 않을까? 정말 그런 거라면 이럴 때조차 루제프는 쓸모가 없는 거고……. 참 슬픈 일이다.

아마 이 힘을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건, 역시 마법사인 카이든일 테다.

* * *

“XX, 망할 놈들!”

카이든은 오두막 안에 디에고와 유안나를 꽁꽁 묶어 두고 그 옆에 드러누웠다.

“으윽. 이거 놔줘.”

유안나의 간드러진 음성이 카이든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는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유안나의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콰앙.

그리고 그때, 오두막 안에 묶여 발버둥을 치던 디에고가 기어코 오두막을 부수고 말았다.

“뭐야 저, XX XX가!”

카이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유안나를 안고 오두막에서 황급히 뛰어나왔다.

부서진 잔해 사이로 디에고가 서 있었다. 그는 안면을 일그러뜨린 채, 자신의 옷깃 앞섬을 쥐어뜯으며 뜨거운 숨을 토해 냈다.

그때, 유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드, 나 몸이 너무 뜨거워요.”

카이든의 품에 안겨 있던 유안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목을 조급하게 끌어안았다.

여린 손이 그의 맨 어깨를 느릿하게 매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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