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수상한 꽃은 함부로 만지면 안 되니, 내려놓으시죠.”
디에고가 잠시 꽃과 카이든을 번갈아 보더니 얌전히 꽃을 바닥에 내려놨다.
“역시 마법사라서 그런지 로드께서는 아는 게 많으시네요.”
“이 정도는 상식입니다.”
유안나가 아쉬운 얼굴로 바닥에 버려진 꽃을 보며 중얼거렸다. 카이든이 잔뜩 성가시단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대꾸했다.
그리고 그때, 갑작스레 불어온 바람에 오두막 주변으로 피어있던 상당히 많은 양의 노란 꽃가루가 흩날렸다.
“에취!”
꽃가루를 정통으로 뒤집어쓴 유안나가 재채기를 했다. 디에고도 남은 잔해를 들이마셨는지 꽃을 떨어뜨리고는 코를 틀어막았다.
카이든은 두 사람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유안나와 디에고의 목덜미가 서서히 붉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안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목을 움켜쥐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녀가 연신 마른기침을 했다.
디에고는 괴로운 얼굴로 셔츠 앞섬을 움켜잡았는데 어찌나 강하게 당겼는지 윗단추 서너 개가 뜯겨나갔다.
‘젠장, 뭐야. 꽃가루에 독성이 있는 건가?’
모든 독에 내성이 있는 카이든만이 유일하게 멀쩡했다.
두 사람은 상당히 고통스러운 모양인지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아서 되레 카이든이 곤란해졌다.
게다가 유안나와 디에고는 말라 가는 꽃처럼 얼굴빛이 시들해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초점 없이 흐려진 눈과 거친 숨소리, 갈증을 해소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 바닥을 더듬는 그들의 손짓은 무척 탐욕스럽게 느껴졌다.
당혹스러운 상황이었다.
조금 전에 마물도 마주친 마당에, 밖에다가 그들을 내버려 둘 수도 없다.
결국 카이든은 두 사람을 오두막으로 옮기기로 했다. 괴롭게 발버둥치는 이들을 옮기는 것만 해도 상당히 애를 먹었다.
“내가 이래서 단체 생활이 싫다는 거야,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데 그걸 왜 건드려서는……! X발!!”
카이든은 기어코 욕설을 뱉었다.
아무래도 문제없이 돌아가서 마거릿에게 칭찬받겠단 계획은 포기해야 할 모양이다.
* * *
간밤에 사라졌던 은지는 텐타티오넴을 전부 먹어 치우고 있었다.
에녹과 나는 오두막에서 나오자마자 은지가 무서운 속도로 그 꽃을 뜯어 먹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분명 몇 송이 피어있지 않았던 것 같은데, 하룻밤 새에 오두막 주변을 붉은 꽃이 빼곡하게 메우고 있었다.
“은지야!”
놀라서 녀석을 불렀는데, 그제야 나를 돌아본 은지가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했다.
내게 다가오고 싶어 눈을 반짝이고 망설이던 녀석은 기어코 남은 텐타티오넴까지 다 먹어 치운 뒤에야 우리가 있는 오두막 덱 앞으로 힘겹게 기어 왔다.
아무리 그래도 텐타티오넴은 독성이 강한 꽃이었다. 거기다가 그 많은 양을 한 번에 다 먹어치우다니…….
은지는 내 앞까지 기어와서는 힘없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기절한 은지를 보고 깜짝 놀라 녀석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렸다. 손바닥 위에 녀석이 축 늘어졌다.
그래도 다행인 건, 숨을 고르게 쉬는 걸 보아 단순히 잠든 게 분명하단 사실이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마물이 그대와 동화되었다고 했던가?”
에녹이 기절하듯이 잠든 은지를 보며 물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이 녀석이 느끼는 감정을 얼추 예상할 수 있거든요. 이 녀석도 제 말을 알아듣는 것 같고요. 카이든의 말로는 이 녀석이 제게 각인을 했기 때문이래요.”
“확실히 일반적인 경우는 아닌 것 같군.”
내 말을 들은 에녹이 중얼거렸다.
나는 전에 은지가 내게 각인을 한 것을 두고 모두와 이야기했던 내용을 떠올렸다.
마물은 인간을 상위 포식자로 인식하지 않으며, 아나콘다는 이미 그 자체가 상위 포식자라 다른 각인 개체를 찾기가 어렵다고.
그런 중에 방대한 양의 마력을 가진 나를 만난 거라면, 각인을 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를 했었지.
‘내가 생각해도 미스터리긴 해.’
나는 은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에녹과 함께 다시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루제프는 피곤했는지 기절하듯이 잠들어 있었고, 주방 식탁 앞에 앉아 아스달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마물치고는 머리가 좋아.”
아스달이 내 손에 안겨 온 은지를 보며 말했다. 그도 은지가 밤새 텐타티오넴을 먹어 치운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텐타티오넴이 은지 몸에 안 좋을 걸 뻔히 알면서도 그대로 뒀단 말인가? 나는 어이가 없어서 그를 쏘아보았다.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어.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 주고 있었잖아.”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아스달이 태평하게 대답했다.
나는 은지를 푹신한 간이침대 위에 내려놓고 보살폈다. 혹시나 싶어 걱정했는데, 녀석은 편안한 얼굴로 고롱고롱거리며 코까지 골았다.
다행히도 문제는 없는 모양이다. 그제야 나는 안심하고 식사 준비를 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에녹이 다가와서 나를 슬쩍 밀어냈다.
“마거릿, 그대는 좀 쉬도록 해. 식사 준비는 내가 하지.”
역시 날 챙겨주는 건 에녹뿐이다. 나는 어쩐지 에녹이 의식을 잃은 동안 아스달의 수발을 든 것이 서러워져 눈물이 나올 뻔했다.
턱을 괴고 앉아서 에녹이 하는 양을 지켜보던 아스달이 기가 차단 얼굴을 했다.
“아무리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에녹 황태자가 저렇게까지 변하다니.”
“원래 사람은 변하는 법이에요.”
“그런 것 같군. ‘그’ 마거릿 로즈 플로네도 변했는데, 반황이라고 변하지 않으리란 법이 있나.”
아스달이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무릎을 탁 치더니 내 손목을 잡았다.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말이야. 해변을 오가면서 지나가는 선박이 없나 살피는 것보다 효율적인 건 뗏목을 만드는 거 아닌가?”
아스달의 말에 나는 에녹을 돕겠다던 생각도 잊고 그를 돌아봤다.
그제야 그가 오두막에서 지내며 구조 요청 방법도 생각해 보자고 말했던 일이 떠올랐다.
“생각해 봐. 영애가 마도구로 불꽃을 하늘에 날린 게 여러 번인데, 지금껏 아무도 섬에 접근하지 않았어. 구조를 기다리기보단 우리가 직접 탈출을 시도하는 게 빠를 거라는 거지.”
아스달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회유하듯 내게 말했다. 이건 필시 나더러 에녹을 설득해서 같이 뗏목을 만들라는 소리다.
하지만 나는 이 섬이 다른 시공간에 존재한다는 걸 안다. 뗏목을 타고 나가는 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소리다.
아마 섬 주변만 빙글빙글 돌다가 원위치로 돌아오게 되겠지.
“……우선 성녀님 일행이 돌아온 뒤에 생각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난 아스달이 나를 설득하려는 것만큼이나 나긋나긋하게 회유하는 어투로 그를 설득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손이 모자란데 에너지를 거기에 소모하다가 마물이라도 들이닥치면 어떡해요?”
내 반문에 얌전히 식사 준비를 하던 에녹이 우리를 흘끗 보며 입을 열었다.
“마거릿의 말이 맞다. 우선은 성녀 일행의 복귀를 기다리도록 하지.”
에녹의 말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아스달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다. 우리 반황이 그렇다면야.”
“이제 그만 반황 소리는 집어치워라. 결투를 신청하기 전에.”
에녹이 기어코 들고 있던 돌칼을 날려 버렸다. 날이 잔뜩 선 돌칼은 정확히 아스달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거실 중앙 기둥에 딱 꽂혔다.
“이런, 반황……. 큼. 황태자의 결투 신청을 받으면 난 살아남기 어려울 테니 몸 사려야겠군.”
아스달이 양손을 들어 보이며 익살스럽게 항복한다는 제스처를 보였다. 에녹이 경멸 가득한 시선을 던지자 아스달이 상처받았다는 얼굴로 가슴을 움켜잡는다.
정말 아이러니한 점은, 늘 반황이라며 에녹을 비하하는 아스달이 우리 중 에녹을 가장 신뢰한다는 사실이었다.
서로 썩 좋은 사이는 아니긴 했어도 학창 시절의 정 같은 게 있는 걸까?
“아무튼 마력이 통하기만 했어도 마물의 움직임이나 패턴을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아스달이 중얼거렸다.
나뭇잎을 모아 만든 방석에서 잠든 은지를 옮기던 나는 그 말을 듣고 그를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물음에 아스달이 자신의 눈을 톡톡 두드리면서 씨익, 웃음을 지었다.
“뭐, 예전에도 한번 얘기했던 건데. 내가 마력안을 갖고 있거든. 이건 헤스티아 왕실 핏줄을 통해 대대로 내려오는 능력인데, 외부엔 전해지지 않은 왕실의 비밀이지. 상황이 이러니 특별히 알려주는 거야.”
“네……? 그 마력안이라는 게 뭔데요?”
“마력의 흐름을 읽는 능력이야. 마력이나 신력과 같은 다양한 힘의 모양을 감별해 낼 수도 있지.”
그의 말대로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헤스티아 왕국의 비밀정보라 마거릿의 기억을 다 뒤져 봐도 나오는 건 없었다.
“영애가 가진 마력 보유량이 엄청나긴 해.”
“근데 제 마력 보유량을 저하께서 어떻게 알아요?”
“내가 그런 걸 보는 눈을 가졌거든.”
그가 전에 했던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굉장한 힘이네요.”
“맞아. 그리고 왕실에 딱 필요한 힘이기도 하지. 우린 이 힘을 이용해 인재를 등용해 왔다.”
숨기고 있는 힘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다면, 인재 등용에 정말 유용할 게 틀림없었다.
아스달은 식탁 위에 올린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이것도 마력에 기반한 힘이라 이 섬에 온 뒤로 마력안을 사용할 수가 없어.”
“그건 좀 아쉽네요. 엄청난 전력이 됐을 텐데.”
“힘을 쓸 수 없어서 아쉬운 건 모두 마찬가지 아닌가. 영애도 그렇고.”
“……저 궁금한데, 저하께선 진짜로 제 마력 보유량이 얼마나 되는지 본 거예요? 헤스티아 왕국에서 제가 전하를 본 건 아주 잠깐이었어요.”
아스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이어도 눈을 마주 봤다면 대부분 파악 가능해. 의외긴 했지. 그렇게 많은 마력을 가졌는데도 알려지지 않았다니……. 뭐, 영애가 아카데미에서 테스트 구슬을 박살내고도 반황 때문에 재시험을 치르지 않았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예상은 했다만.”
아스달의 말에 좋아해야 하는 건지, 기분 나빠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맞아요. 제 힘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제가 능력을 발휘하지 않아서겠죠. 연습 같은 건 딱 질색이라서요. 아시겠지만, 당시 제가 관심 있는 거라곤 에녹밖에 없었고.”
그때, 얌전히 식사 준비를 하던 에녹이 내심 뿌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자 아스달이 못마땅한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영애다운 결말이로군.”
“네. 그래서 저는 이 섬에서 마력을 못 쓰는 게 딱히 아쉽지 않아요. 마력을 사용할 줄도 모르는걸요.”
턱을 괴고 있던 아스달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뭔가 고민하는 얼굴을 하더니, 내게 손짓했다.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그럼 내가 특별히 영애에게 선물을 주도록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