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스달과 눈이 마주친 채로 허공에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어?”
의아할 새도 없이 머리에 깨질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망치로 두개골을 쪼갠 다음, 깃털로 뇌 속을 간질이는 느낌에 나는 내적 비명을 내질렀다. 엄청난 두통이다, 제기랄.
열이 점점 더 오르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 몸이 이대로 뜨겁게 타올라 폭발할지도 모르겠단 생각마저 들었다.
타는 듯한 갈증이 났다. 누군가와 닿고 싶었다. 만지고 싶었다. 다른 이와 접촉을 해야만 이 갈증이 해소될 것 같았다.
“조용히 자는 게 좋겠군.”
에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침대 위였다.
2층에 있는 유안나의 침실인 것 같았다. 마물 때문에 부서진 아스달의 침실과 다르게 유안나의 침실은 멀쩡했으니까.
나는 침대 맡에 서 있는 에녹을 보았다. 그는 상의를 탈의한 채였는데 온몸에 붕대가 감겨 있는 상태였다.
그도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러고 어떻게 자요?! 그냥 기절시켜 주는 건 어때요? 나 제발 기절시켜 줘, 이대로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아.”
나는 몸부림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몸이 너무 가려워.’
나는 그를 향해 다시 한번 애원했다.
“에녹, 저 너무 창피하니까, 이대로 기절만 시켜 줘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줄줄 흘렀다. 에녹이 곤란하단 얼굴을 했다.
그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내 인내심은 바닥을 보였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아 당겼다.
에녹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시야에 놀란 그의 얼굴이 가득 찼다. 코끝이 스쳤다. 나는 닿을락 말락 하는 그의 붉디붉은 입술을 갈급하게 쏘아봤다.
들뜬 숨결이 서로의 얼굴을 간질거렸고 나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기 직전이었다.
‘제발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좀처럼 몸이 따라주진 않았다.
이윽고 에녹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나를 노려봤다.
괴로운 얼굴로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그가 무언가를 단단히 참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밀어냈다.
“제기랄, 진짜 미치게 하는군.”
그가 이를 악물고는 중얼거렸다.
그에게 거부당하고 나자 밀려오는 안도감과 함께 어쩐지 더 서럽게 눈물이 났다.
“그냥 빨리 기절시켜줘요, 수치스러워서 죽을 것 같아요!”
에녹이 내게로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나는 침대 위에서 몸부림을 치다가 가까워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잠시 숨을 삼켰다. 그가 내 어깨를 밀어 옆으로 돌렸다.
퍽.
그러곤 목 뒤에 강한 통증이 느껴지곤 시야가 암전됐다.
다행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기절시켜 달라고 내 입으로 말하긴 했지만 정말로 남주한테 얻어맞을 줄은 몰랐다.
나는 역시 여주감은 아닌가 보다.
그래. 나한테 어울리는 건 서바이벌 스릴러지.
* * *
내가 정신이 들었을 땐 새벽녘이었던 것 같다. 침실 위에 있는 창문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은 시야가 어둑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가 나는 내 양팔이 침대 기둥에 묶여 있음을 깨달았다.
망할.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도로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가 침대 옆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에녹이 바닥에 앉아 침대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는 게 보였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명하게 떠올라 내적 비명을 질렀다.
‘젠장, 쪽팔려!’
홀로 창피한 지난밤의 역사를 되새김질하고 있자니 에녹이 눈을 떴다.
“……마거릿?”
나는 양손이 침대 기둥에 결박되어 있는 다소 민망한 모습으로 에녹과 눈이 마주쳤다.
“왜, 왠지 우리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요.”
에녹은 아무런 말도 없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나는 부담스러운 그 시선에 눈을 내리깔았다.
“손 좀 풀어 주시겠어요?”
나는 차마 에녹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잠시간의 침묵 후, 다소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얼굴 위로 그림자가 졌다. 에녹이 내게로 몸을 기울인 탓이다.
그가 결박하고 있는 끈을 풀어 주고서야 나는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침대에 앉아 손목을 매만지고 있자 에녹이 손을 뻗어 내 손목을 잡았다.
에녹이 미간을 좁히고는 부어오른 내 손목을 살피며 말했다.
“약을 발라야겠군.”
나는 차마 대답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에녹이 고개를 들고 나를 봤다.
“괜찮나.”
“……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에녹이 가만히 내 안색을 살피며 재차 물었다.
“몸은 이제 괜찮은지 물었어.”
“괜찮아요. 에녹은요?”
그가 내 이마 위에 손을 얹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몸이 개운했다.
“내가 괜찮냐고?”
그의 요상한 물음에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괜찮지 않은데.”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는 나른한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그가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게 만들잖아, 마거릿. 네가.”
나는 그의 말에 눈만 깜빡이며 그를 마주 봤다.
“그건 제가 할 소리인걸요.”
그렇게 반문했다가 나는 곧 말을 정정했다.
“아, 물론 간밤의 소동에 대해선 저도 할 말이 없기는 하지만…….”
물론 그는 내가 뭐라고 하든 크게 개의치 않아 하는 눈치였다.
“저…… 에녹? 어?”
한참 동안 말이 없는 그가 이상해서 이름을 불렀는데, 그가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에녹의 품은 따듯하고 단단했다. 그가 고개를 숙여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뜨거운 숨결이 어깨를 간질였다.
“네가 무사해서 다행이다.”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그가 고단한 목소리를 토해 냈다. 그 말의 무게가 상당해서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줘야 하지 않겠나, 마거릿.”
에녹이 내게서 조금 떨어지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그의 금안이 내 안색을 샅샅이 훑어 내린다.
“로드와 어디에 다녀온 거지?”
“말했다시피, 마물에게 공격당했어요. 전에 오두막 앞에서 본 은색의 조그만 새알 기억해요?”
내 물음에 에녹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거릿, 그대가 숲 깊숙이 치워 내지 않나.”
“카이든이 그 알을 다른 장소에서 발견했거든요. 누가 옮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근데 그게 카이든이 만지면 독 같은 걸 풍겼는데, 제가 만지면 멀쩡했어요. 이상하죠? 아무튼 그러고 있는데 타란툴라 마물을 만난 거죠. 그것도 절벽 앞에서요.”
나는 이어서 절벽에서 떨어진 이야기와 알이 자꾸만 나를 따라다닌 이야기, 그리고 은지가 부화해서 녀석이 우리에게 도움을 준 이야기를 그에게 전했다.
“고맙다.”
“네? 뭐가 고마워요?”
“무사해 줘서.”
나는 당황했다. 새삼스러운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얼굴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아직도 텐타티오넴 독이 덜 빠진 상태인가.
“……그럼, 에녹은요? 대체 왜 그렇게 폭주한 거예요?”
“마물을 소탕해야만 했다.”
나는 그의 덤덤한 대답에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정말로 의도하고 폭주한 게 맞았단 말이에요? 그거 자살 행위인 거 알죠?”
“그대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어.”
에녹은 정말로 나를 굳게 믿는 신뢰 가득한 눈을 하고 나를 봤다.
“때맞춰 돌아오지 못하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주교에게 검으로 찔러 달라고 부탁했어.”
검을 찔…… 맙소사.
나는 조용히 마른세수를 했다. 이 인간을 어쩌면 좋지.
“저도 고마워요.”
“뭐?”
“무사해 줘서.”
내 말에 그가 돌연 입을 꾹 다물고 나를 쳐다봤다. 나는 주먹 쥔 그의 손에 힘줄이 돋아난 걸 묵묵히 바라보았다.
붉어진 눈시울을 하고 격한 감정을 갈무리하는가 싶더니, 그가 나를 다시 끌어안고서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나는 조용히 그의 등을 토닥이며 그의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에녹은 감정적으로 결여된 부분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쩌면 내 말이 그에게 위로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난 널 좋아한다, 마거릿. 그건 알아 둬…….”
그가 기절하듯 쓰러지기 직전에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 말, 진짜일까?’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에녹, 그 말은 진심이었어요?”
에녹이 그제야 내게서 떨어졌다. 그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찼다.
“무슨 말?”
“그…….”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민망한데.
“오두막까지 온 건 기억나요? 그 뒤에 당신이 나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도.”
내 물음에 에녹이 콧잔등을 찡그리더니 곰곰이 생각에 잠긴 얼굴로 말이 없었다.
“……기억이 나질 않는군.”
그럼 그렇지. 그냥 지난밤의 나처럼 열에 들떠 한 헛소리인 모양이다. 나는 어쩐지 실망스러워서 한숨을 내쉬었다가 깜짝 놀랐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교님은 어때요?”
“글쎄, 아마 아직 문 앞에 묶여 있겠군.”
“저도 이제 괜찮으니까, 주교님도 아마 정신이 멀쩡해졌을 거예요. 내려갈까요?”
내 말에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던 에녹이 아쉬운 눈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다정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좀 더 쉬고 내려가는 게 어떻겠나.”
그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루제프도 힘들어 하고 있을 테니 결박은 풀어 줘야죠. 정 피곤하면, 원래 우리 자리에서 다시 잘까 봐요.”
“그래. 어차피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괜찮겠지.”
에녹이 의중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제프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을 경우엔 본인이 옆에서 나를 지켜주겠단 소리인가? 그에게 다시 질문을 하려다가 나는 곧 물음을 삼켰다.
예전 같았으면 거침없이 그에게 질문을 쏟아 부었을 것 같은데, 지금은 이상하게도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 옆에 있어 준단 그의 말을 내 멋대로 해석했는데, 어쩐지 그 해석을 깨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에게 질문하기를 포기했다.
나는 에녹과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역시나 루제프는 오두막 문 앞에 묶인 채로 앉아 눈물을 훌쩍이고 있었다.
그러고는 2층에서 내려오는 우리를 보고 반가운 얼굴로 엉덩이를 들썩였다.
아스달은 벽난로 앞에 잠들어 있었는데, 잠귀가 어두운지 깨지는 않았다.
나는 루제프의 손목을 묶은 끈을 풀어 주면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은지는 어디 있지?
그리고 텐타티오넴이 피기 시작한 거라면……. 카이든 쪽은 괜찮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