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냄새가 나는군요.”
속을 잘 달래고 들어왔는지 루제프가 개운한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말했다.
“그건 뭐예요?”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웬 새빨간 꽃을 보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루제프가 손에 든 꽃다발을 내게 보여 주며 걸어왔다.
“아, 예쁘지 않습니까? 오두막 바로 앞에 있었는데 꽃이 핀 지 얼마 안 돼서 그동안은 몰랐던 모양입니다.”
새빨간 꽃잎은 넓고 주름이 거의 없었는데, 그게 꼭 알사탕처럼 보이기도 했다. 양귀비꽃하고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영애께 선물하려고요.”
루제프가 내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꽃 선물 처음 받아 봐요.”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꽃을 받고 곧 미간을 찌푸렸다.
“마음은 고마운데, 독초면 어떡하…….”
잠깐, 독초?
원작 속에 비슷한 내용이 있었다. 유안나와 남주들을 홀렸던 ‘텐타티오넴’이라는 독초였는데.
원작에서도 루제프가 오두막 근처에서 이 꽃을 꺾어 와 유안나에게 선물하면서 모든 사건이 시작됐다.
수위 높은 그렇고 그런 일들이 바로 이 꽃의 독에 현혹되면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화들짝 놀라서 꽃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이 꽃이 오두막 바로 앞에 자라고 있었다니.
마물 사체만 어떻게 처리하면 오두막에서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오두막도 이제 더는 안전하지 않은 게 확실했다.
‘그래, 2층에서 나온 거미가 진화할 때부터 불길하긴 했지.’
아무래도 일행들이 오면 곧장 오두막을 떠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떨어진 꽃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자,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는 루제프가 보였다.
나는 당황해서 재빨리 둘러댔다.
“손이 미끄러졌어요, 미안해요. 근데 이 꽃 독초인 것 같……”
“괜찮습니다. 영애의 마음, 잘 알았습니다.”
루제프가 괴로운 얼굴로 눈살을 찌푸리더니 마른세수를 했다.
문제는 그의 손에 노란 꽃 수술이 묻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 세로줄로 노란 꽃가루가 남은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젠장, 원작대로라면 유안나가 이 꽃을 받았어야 할 텐데, 왜 내가……! 물론 이미 원작과 내용이 다 틀어졌다지만, 그래도 왜 하필 내가……!
“영애, 고기가 타는 것 같은데?”
우리가 뭘 하든 음식 외엔 관심 없어 보이는 아스달이 고기가 타니 와서 좀 보라고 나를 채근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이게 왜 안 중요해. 고기가 타는데.”
왜 저렇게 고기에 집착해. 나는 짜증스레 그를 돌아봤다.
“그럼 저하가 직접 꼬치 좀 불에서 빼 주실래요?”
“그걸 왜 내가 하나. 영애가 와서…….”
아스달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내 어깨 너머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무도 불길한 눈으로.
등 뒤로 루제프의 밭은 신음이 들려왔다.
“플로네 영애. 하아…….”
고통에 찬 것 같기도 하고 희열에 젖은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목소리였는데 아무튼 무척 괴로운 듯했다.
불안감을 안고 등을 돌리니, 루제프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달뜬 숨을 뱉고 있었다.
자리에 주저앉은 그가 천천히 주교복의 맨 윗 단추를 풀었다.
“주, 주교님. 아무리 더워도 옷을 벗지는 마세요.”
내 말에 그가 애처로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서 애원하듯 나를 바라보는데,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게, 몸이 뜨거워서 참을 수 없습니다.”
나는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꽃을 주워 오두막 문을 열고 밖에 내다 버렸다.
그러고는 천에 물을 적셔 노란 꽃가루가 떨어진 바닥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주교가 드디어 미친 모양이군.”
아스달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루제프를 관찰했다. 루제프는 이미 상의 단추의 절반은 푼 것 같다.
“그게 아니라, 주교님이 가져온 꽃이 독초인 것 같아요. 꽃가루에 사람을 흥분시키는 성분이 들어 있는 것 같고요.”
“잠깐, 지금 뭐라고……?”
루제프는 이제 상의를 완전히 탈의했다.
카이든이나 에녹만큼은 아니지만, 매끈하게 잘 짜인 그의 복근이 드러났다. 새하얗고 고운 피부에 굴곡지고 단단한 상체를 보고 나는 당황해서 아스달의 어깨를 황급히 두드렸다.
“저, 저하. 일단 주교님 좀 빨리 말려 보세요.”
“오두막이 너무 더운 것 같습니다.”
루제프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청초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루제프는 왜 성직자일까?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의문이 들었다. 이건 명백한 인력 낭비야.
“영애,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스달도 있는데 굳이 나를 불러 도와 달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바로 원작 속 유안나에게 발생해야 할 그 이벤트인 것 같은데.
“주교님 좀 잡아 주실래요? 제가 묶을게요.”
내 말에 아스달이 성가시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루제프를 등 뒤에서 끌어당겨 잡았다.
나는 재빨리 카이든이 만들어 둔 끈을 가져왔다.
“영애, 몸이 너무 뜨겁습니다. 이런 도움 말고요. 다른 걸, 부디 다른 걸…….”
루제프가 고개를 저으며 애원했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묶었다.
“아니요. 당신은 이런 도움이 필요해요.”
“영애…….”
루제프의 붉은 뺨을 타고 이슬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영애여야만 합니다. 제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우는 얼굴이 너무 안쓰럽고 예뻐서 그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만 싶어졌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화들짝 놀라서 고개를 흔들었다.
아스달이 루제프의 손목을 더 단단히 결박하다가 움찔하고는 나를 돌아봤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봤다.
“영애, 괜찮나?”
그가 미친X 보듯 나를 봤다. 루제프 때문에 꽃가루가 옮아왔는지 그게 내게도 살짝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제기랄. 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다.
열이 오른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자 삽시간에 몸에 불덩이가 붙은 듯 뜨거워졌다.
“제기랄. 저, 저 좀 묶어 주세요…….”
루제프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무 기둥에 루제프를 열심히 묶고 있던 아스달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뒤늦게 바닥에 주저앉은 나를 발견한 그가 급히 내게 달려왔다.
“뭐야, 왜 그래? 영애도 흥분한 거야?”
“흐, 흥분이 아니라 그냥 아프다고 해 주실래요……?”
나는 드레스 앞섬을 쥐고 뜨거운 숨을 뱉었다. 아마 원작의 유안나였다면 여기서…….
나는 떠오르는 온갖 음란한 생각을 지워 냈다. 미쳤어. 겨우 이런 독초 따위에 굴복할 수는 없다.
나는 강인하다. 견뎌야 해.
하지만 몸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간지러웠다. 누군가의 몸에 닿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들끓었다. 머릿속에서 이성과 본능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잠깐은 괜찮지 않을까, 루제프도 힘들어 보이던데 내가 도와…….’
나는 순간 내가 한 생각에 놀라서 내 뺨을 세게 쳤다. 아스달이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봤다.
“저 좀 묶어 주세요.”
“영애. 단어 선택을 좀…….”
아스달이 답지 않게 당황하는 얼굴을 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난감해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기분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너무 더러운 기분이에요. 빨리.”
“하.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나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여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몸이 뜨거운 동시에 간지러웠다. 참을 수 없이.
“제발 저 좀 묶어 주세요, 제발요.”
나는 앞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아스달의 소매를 콱 움켜쥐고 애원했다. 조금 전 루제프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너무 괴로워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몸이 아픈 것 같아요. 이대로라면 제가 무슨 이상한 짓을 할지 몰라요.”
“레이디에게 어떻게 그래.”
난데없이 그가 내게 예의를 차렸다. 그와 동시에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기억에 나는 절로 욕이 터져 나왔다.
“XX, 저한테 물고기 잡는 험한 일은 다 시켜 놓고, 이제 와서 레이디요? 사냥감 손질도 제가 다 했거든요? 그런 게 레이디에 대한 배려야? XX. 그래, 인생이 원래 이렇게 XX 불공평한 거지. X 같은 내 인생!”
내가 가감 없이 욕설을 뱉는 건 카이든 앞, 한정이었다.
아스달 앞에서는 한 번도 날것의 욕을 내뱉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그것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몽롱했다.
이래서 평소에 언어 습관을 바르게 해야 하는 거다. 무의식중에 흘러나오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
“미, 미안하군.”
아스달은 정말로 곤란한 얼굴을 하고는 사과했다. 아니, 결혼도 했던 남자가 왜 저렇게 숙맥처럼 구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빨리 묶으라는 의미로 양 손목을 겹쳐 그에게 내밀었다.
“빨리요.”
아스달이 계속 망설이는 사이에 조금 전보다도 더 몸이 뜨거워졌다. 뇌가 녹다 못해 흘러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아스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말했잖아요,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빨리 묶으라고.”
나는 급기야 다른 손으로 아스달의 멱살을 쥐었다.
사실 지금도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저 이 아플 정도로 뜨거운 열기를 어떻게든 멈추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스달의 새빨간 얼굴이 시야에 담겼다. 그의 얼굴은 왜 붉은 건지 모르겠다. 그도 텐타티오넴에 감염이 된 걸까?
나는 그의 멱살을 쥔 채로 천천히 그에게로 얼굴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때,
“내가 묶지.”
낯익은 다른 목소리가 아스달과 내 사이에 끼어들었다.
새카만 흑발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금안에 내 얼굴이 고였다.
에녹이 깨어났다.
“마거릿.”
깊게 잠겨 목울대를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내 이름이 담겼다.
나는 몽롱하게 눈을 뜨고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물론 여전히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비켜요. 지금 죽을 것 같단 말이에요.”
혀가 잔뜩 꼬였고, 꼭 만취한 것처럼 몸을 가누기도 어려웠다. 몸에 힘이 풀려 아스달의 멱살을 쥔 손을 놓았다.
아쉬운 듯 보이는 아스달의 얼굴이 멀어지고 시야에 딱딱한 나무 바닥이 보였다.
바닥에 머리를 처박힐 뻔했는데 두터운 팔이 내 허리에 감기더니 이내 나를 번쩍 들었다.
“……어?”
에녹이 나를 안아 든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