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89)화 (89/234)

“배고프군.”

아스달이 자꾸만 주방 근처를 배회하면서 반복했다.

“재촉하는 건 아니야.”

뒷짐을 지고 나를 보다가 눈이 마주친 아스달이 부정했다. 누가 봐도 재촉하는 건데?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른 험한 말을 삼키며 웃었다.

“그럼 얌전히 좀 기다려 주세요. 거슬려서 집중 안 되니까 시야에서 비켜 주시고요.”

“거, 거슬……?”

“네. 좀 비켜 주세요. 당장.”

아스달이 당황해서 입만 벙긋거리더니 내가 잘 벼린 돌칼을 들자 조용히 시야에서 비켜섰다.

그는 벽난로 앞에 앉아 얌전히 식사 준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제발, 플로네 영애의 심기를 건들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다가 영애가 떠나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실 겁니까?”

옆에 있던 루제프가 연신 그를 타박했다.

“저희는 플로네 영애 없이 이 섬에서 버틸 수 없습니다.”

마거릿 신봉자 다 됐네……. 아스달만큼이나 기겁을 한 내가 토끼 손질을 하다 말고 루제프의 옆통수를 노려보았다.

“저는 만능이 아니에요, 주교님. 제가 뭐든 할 줄 안다고 착각하는 것 같은데…….”

“아닙니까?”

루제프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반문했다.

“뭐든 할 줄 아시는 거 맞잖아요.”

“아니라니까요! 그거 오해예요. 뭔가 대단히 착각하고 있네, 이 사람.”

나는 토끼와 긴꼬리새의 피를 빼기 위해 경동맥을 잘라 나무 걸대에 거꾸로 매달았다.

“잠깐만요, 이것 좀 하고 다시 얘기해요.”

나는 나무 걸대를 들고 오두막 밖으로 나가 세우고, 그 아래 피를 담을 나무 바구니를 놓았다. 피를 빼고 바로 가죽을 벗겨야 하니까 수시로 체크를 해 줘야 했다.

나는 피곤한 얼굴로 어깨를 문지르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보십시오, 사냥감 손질은 별로 해 본 적 없다고 하신 분이,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노력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책임감도 엄청납니다.”

루제프의 말에 아스달이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아 턱을 괴고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뭐, 그렇긴 하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노력파인 것 같더군.”

아스달이 루제프에게 세뇌라도 된 듯 긍정했다.

‘그래, 뭐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고 새삼스레.’

에녹도 카이든도 루제프도 처음에는 모두 나를 의심하고 경계했었다. 유안나도 아니고 하필이면 마거릿에 빙의를 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좀 더 진심을 담아 칭찬 좀 해보십시오. 플로네 영애 심기가 불편해 보이지 않습니까.”

루제프가 내 눈치를 보며 아스달을 나무랐다. 아니, 주교님. 나도 아스달의 칭찬 따위는 필요 없어요. 당연히도 루제프의 말은 역효과를 낳았다.

아스달이 대번에 불쾌하단 얼굴로 그와 나를 번갈아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 잠깐, 나도 영애의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어. 그런데 지금 주교 말은, 내가 영애의 비위라도 맞춰야 한단 소리인가?”

“필요하면 그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애는 저희의 희망입니다.”

“잠깐만요, 말이 이상하네. 제가 왜 희망이에요? 그런 말을 넣어 두세요. 저한테 그런 이상한 단어 붙이지 마시고요.”

나는 에녹의 앞에 앉아 그의 상태를 살피며 대답했다. 하지만 루제프는 생각보다 단호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전 영애를 믿어요.”

아니 대체 왜 저래. 나는 결국 루제프를 설득하려다 포기했다.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피다가 에녹의 상태를 보기 위에 벽난로 앞으로 다가갔다.

에녹은 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조용히 그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 열은 내린 모양이다.

“주교님. 에녹은 그동안 상태가 어땠어요?”

“이제 열은 완전히 내렸습니다. 숨소리도 고른 게, 안정을 되찾은 것 같더군요. 아까 두 분 사냥 가셨을 때 잠깐 정신을 차리셨습니다.”

“정말요?”

나는 놀라서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에녹을 돌아봤다.

“사실 전하께서 지금까지 제대로 쉬신 적이 없지 않으십니까. 피로가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루제프가 에녹의 숨소리를 체크하며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조금 놀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제대로 쉰 적이 없다니…….”

아마도 모두가 편안한 휴식을 취한 적은 없을 거다. 하지만, 지금 루제프가 한 말은 그 뜻이 아닌 것 같았다.

루제프가 나를 흘끗 보고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모르셨습니까? 저희가 모두 잠들어 있을 때도 수시로 깨서 주변을 경계하던 분이잖습니까. 오두막에 오기 이전에도요.”

루제프가 통제 불가능한 것을 보듯 에녹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매일 그러셨던 걸로 압니다. 저도 잠자리에 예민한 편이라 자주 잠에서 깨곤 하는데 전하께선 그때마다 항상 깨어 계셨었거든요.”

에녹이 종종 그런다는 건 알았다.

그는 예민한 사람이었다. 전쟁을 겪은 군 지휘관이었고, 지금은 황태자였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이 사람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휘둘렸다.

하지만 그렇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변을 경계하기를 ‘종종’이 아니라 ‘매일’ 해 왔다고…….

‘그러니 몸이 망가질 수밖에 없지.’

나는 착잡한 얼굴로 잠든 에녹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마 하루 이틀 정도 더 쉬면 회복하실 수 있을 겁니다.”

루제프가 걱정 말란 듯이 내게 말했다. 가만히 앉아 우리를 지켜보던 아스달이 내게 물었다.

“제국으로 돌아가면 영애는, 결혼을 할 생각이 있나?”

나는 의아한 얼굴로 그를 마주 봤다.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야. 영애는 지금이 결혼적령기지 않나. 지금 영애와 함께하고 있는 남자들 모두 완벽한 신랑감 후보가 아니던가. 탈출하면 반황이 아니라 다른 이와 결혼하고 싶어질 수도 있지.”

턱을 괴고 있던 아스달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콧잔등을 찡긋하며 미소를 지었다.

저거 지금, 내 신랑감 후보에 본인도 포함시킨 건가? 양심 있어?

아무튼 나는 그의 질문이 너무도 뜻밖이라 잠시 말문이 막혔다. 무슨 의도로 한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길게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건 나가면 생각해 볼게요. 지금 그런 고민을 하는 건 사치죠”

턱을 괴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아스달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지. 이곳에서 그런 건 사치지.”

그러고는 한참 만에야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루제프가 다소 묘한 시선으로 아스달을 돌아봤다.

나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오두막 밖에 놔둔 사냥감을 떠올렸다.

지금 즈음이면 피가 빠져 있을 것 같아서 자리에서 일어나 오두막 밖으로 나가 보았다.

예상대로 사냥감들은 피가 잘 빠져 있었다. 나는 그대로 사냥감을 들고 주방으로 들어와 가죽을 벗기고 본격적인 손질을 시작했다.

“영애, 왕세자 저하께서 하신 말씀 때문에 마음 상하진 않으셨길 바랍니다.”

루제프가 조용히 다가와 내게 말했다.

“아,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저하께서 하시는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나는 웃으며 그에게 답하고는 사냥감 손질을 마저 했다.

그런데 그때 루제프가 내가 손질하는 사냥감으로 시선으로 내리더니, 잠시 놀란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이내 그는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이 입을 틀어막았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비위가 약해서.”

그러고는 오두막 밖으로 사라졌다.

‘뭐야…….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떠나네.’

나는 황급히 뛰쳐나가는 루제프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젓고는 다시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토끼는 꼬치에 끼워 굽고, 새는 대나무에 넣어 찜 요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에녹에게 먹일 묽은 스튜도 준비했다.

“영애는 사냥꾼을 했어도 잘했을 것 같아.”

“그런 개소ㄹ……. 아니 그걸 칭찬이라고 하는 건 아니죠?”

“칭찬인데.”

아스달이 주방 식탁 앞에 턱을 괴고 앉아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나는 기분 나쁜 티를 숨기지 않고 얼굴을 와락 구겼다. 그러자 내 얼굴을 보고 아스달이 나를 놀려먹었다.

“영애, 그런 표정 지으면 못생겨 보여.”

“저 예쁜 거 알아요.”

그러자 아스달이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문다. 마거릿이 예쁜 건 사실이라 반박할 수 없었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취급은 곤란해요. 저 곱게 자랐어요. 제가 태어난 날 교황 성하께서 유아 세례도 내려 주셨다는 거, 알 만한 사람은 다 알 텐데요.”

교황이 직접 유아 세례를 내리는 경우는 극히 드문 케이스였다. 실제로 플로네 공작 부부는 극성맞은 경향이 있었다.

마거릿은 세 자매 중 둘째였는데, 플로네 공작 부부가 딸들에게 균등하게 사랑을 쏟아 주었기에 애정 결핍 같은 건 없었다.

오히려 너무 애지중지 곱게 자라서 문제였지. 마거릿은 천상천하 유아독존 스타일로, 굳이 비교를 하자면 아스달 정도의 오만함을 갖고 있었다.

카이든이나 유안나도 비슷한 과였던 것 같은데, 혹시 이 섬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만 모아둔 건가.

“아, 그 얘기는 나도 알지. 플로네 공작이 애처가에 유별난 딸 바보지 않았나.”

“잘 아시죠? 저, 섬 밖으로 나가면 곧장 아버지께 이를 거예요. 헤스티아 왕세자가 저더러 사냥꾼이나 하라고 했다고요.”

“아니, 잠깐 잠깐. 영애 지금 뭐라는 거야?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왜곡해?”

그냥 그가 나를 골렸던 것처럼 나도 그를 골려준 것뿐이다. 나는 당황한 아스달을 보며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제야 장난임을 알아차린 아스달이 한숨을 내쉬고는 내게 사과했다.

“사냥꾼 발언은 사과하지. 나답지 않게 레이디에게 무례를 범했군.”

아스달은 미간을 꾹꾹 문지르며 대답했다. 마거릿에게만큼은 늘 무례했던 것 같지만.

“미안하시면 고기 굽는 것 좀 도와주실래요?”

“재차 미안하지만 그건 어렵겠군. 나보단 그대가 잘하지 않나. 난 열심히 응원하고 있겠다. 거기 고기가 타는 것 같은데, 잘 보게나.”

아스달이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말했다.

저 XX, 저거. 아스달은 정말로 사람을 제대로 부려 먹을 줄 아는 XX다.

에녹이라면 이런 건 자기가 하겠다며 나를 뒤로 밀어냈겠지?

‘흑흑, 깨어난 에녹 보고 싶어.’

나는 안구에 습기가 차는 기분에 눈가를 슬쩍 닦아주고는 열심히 고기를 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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