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88)화 (88/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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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찰 멤버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문제는 나였다.

생각해 보니, 생존력 제로에 달하는 두 남자와 함께 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다. 제기랄.

얼른 에녹이 깨어났으면 좋겠지만, 그런다 해도 당분간 안정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모두의 생존을 책임지는 건 내 몫이었다.

이건 마치 가족의 생계를 등에 업은 가장이나 다름없었다.

물고기 잡는 귀족 영애로도 모자라 남주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귀족 영애라니, XX.

나는 오두막 앞 나무 덱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람쥐 잡이 막대를 설치하기 위해서였다.

다람쥐가 지나다니는 나무에 손질한 막대를 설치하고 그 사이로 올가미를 엮던 중이었다.

“뭐 하는 거지?”

오두막 문을 열고 나온 아스달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올가미를 만들고 있어요. 버섯을 캐던 숲에서 다람쥐가 많이 지나다니는 걸 봤거든요. 거기에 설치할 거예요.”

내 말에 아스달이 납득한 듯하다가 이내 또 불신 가득한 얼굴로 내 손에 들린 나무 막대를 쳐다봤다.

“이걸로 동물을 잡을 수 있다고?”

“다람쥐는 호기심이 많은 동물이거든요. 경계를 하긴 하겠지만, 나무를 오르내리다가 결국엔 여기에 걸릴 거예요. 어릴 때 잡아 봐서 알…….”

나는 실수로 나온 말에 아차 싶어서 입을 도로 다물었다.

“어릴 때 다람쥐를 잡아 봤다고? 귀족 영애가?”

아스달이 제가 들은 걸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하고는 내게 되물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대체 플로네 공작 가문은 무슨 교육을 시키는 거지? 다음에 플로네 공작 가문에서 시킨다는 교육 수업에 꼭 한번 참관하고 싶군.”

나는 당황해서 애써 시선을 회피하며 웃기만 했다. 그러자 그걸 어떻게 해석했는지 아스달이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젓는다.

“영애 같은 괴짜를 배출한 수업이라……. 재밌겠어.”

그나마 다행인 건, 이 사람들 사이에서 마거릿이 미친X, 괴짜로 통한다는 점이다.

“아무튼 그건 별로 쓸모는 없어 보이는군. 차라리 덫을 만들지, 그 막대는 또 어디서 가져와서는…….”

“도와줄 거 아니면, 트집 잡지 마세요.”

아스달은 내게 면박을 당하고도 턱을 괸 채,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덫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저건 마치 예전에 회사 다닐 때 우리 부서 김 부장이 잔소리하기 직전에 짓는 표정과 매우 흡사했다.

“그보단 쉬엄쉬엄하는 게 어떤가. 영애가 쉬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뜻밖에도 아스달이 내 안색을 살피며 걱정 어린 조언을 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들어 잠을 자도 피곤함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열대 우림에서의 생활은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아무튼 그 덕에 남주들과의 끈적한 이벤트가 생길 걱정을 걱정하진 않아도 되는 것만큼은 다행이지.

예상은 했지만, 전개가 한치 앞도 모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분명 이 즈음이라면 여주인공 유안나를 둘러싼 수위 높은 이벤트들이 발생했어야 하는데, 그런 기미는 전혀 없었다.

유안나부터가 남주들에겐 전혀 관심 없는 듯이 태평했기 때문일까.

“이것만 만들어서 설치해 두고 쉬려고요. 고기는 먹어야겠어요.”

“그런 걸로는 동물이 잡힐 것 같지는 않아서 하는 소리야. 쓸데없는 데 시간 낭비 하지 말고 그냥 쉬어.”

내 걱정을 하던 것도 잠시, 남의 말은 잘 듣지 않는 지뢰달은 내가 만들고 있는 덫을 보며 지적과 잔소리를 시작했다. 역시 김 부장 같아.

나는 무시하고 올가미를 완성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카이든이 화살을 만들어 줬거든요. 혹시 화살 쏠 줄 아세요?”

내 물음에 아스달이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쏠 줄 알지. 사냥 대회에서 석궁을 종종 쓰곤 했거든. 아, 영애는 모르겠군. 내가 대회에서 얼마나 대단한 사냥감을…….”

“아니, 사냥 대회도 나가셨어요? 사냥 할 줄 알면서 왜 못 하는 척하셨어요?”

나는 아스달의 무용담을 대번에 끊어 냈다. 어쩜 라떼스러운 레퍼토리도 부장님이랑 똑같을까.

“사냥 대회에선 주로 석궁이나 화살을 이용하니까…….”

“아, 잘됐네요. 마침 카이든이 활을 만들어 줬거든요. 드디어 저하께서도 생산적인 일을 하시겠네요.”

입으로만 식량을 구하는 건 그만하고 아스달도 이제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나.

“너 그게 무슨…….”

“그럼 가실까요?”

“영애는 사람 말을 끝까지 듣는 법이 없군.”

아스달이 결국 분통을 터뜨렸다.

그리고 열린 문틈으로 우리의 대화를 다 들었는지 루제프가 카이든이 만든 활과 화살을 냉큼 들고 나왔다.

“두 분, 나가실 거면 빨리 나가 주시면 안 됩니까? 황태자 전하께서 안정을 취하셔야 하는데, 너무 시끄러워서요.”

루제프가 다소 신경질적인 투로 눈치를 주자 아스달이 기가 차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아스달에게 말했다.

“그럼 오늘 저녁거리는 저하가 구해 오시는 거죠? 새라도 잡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아니면 작은 동물이라도요.”

아스달이 루제프에게서 화살을 받아 들고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요란하게 준비 운동을 시작했다.

“하. 내 실력을 보여 줄 때가 됐군. 나는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동물보단 날아가는 새를 더 잘 잡는 편이야.”

보통은 반대이지 않나? 신기하네.

나는 꼬물꼬물 기어 와서 내 발에 치대는 은지를 들어 올렸다. 소란이 일어나는 걸 들었는지 은지가 꼬물꼬물 기어 와서 내 발에 치댔다. 나는 드레스 주머니에 은지를 넣고는 아스달에게 말했다.

“아무튼 가시죠?”

아스달은 순순히 나를 따라 나왔다.

우리는 오두막의 서쪽 방향 숲속으로 들어갔다. 버섯 채집을 하던 곳인데, 그쪽에서 다람쥐가 지나다니는 걸 자주 봤기 때문이다.

나는 전에 미리 봐 뒀던 나무 기둥에 비스듬히 다람쥐 잡이 막대를 세워 설치했다.

이렇게 연결해 주면, 다람쥐가 완만한 올가미 막대를 이용해 나무에 오를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내가 올가미 막대를 설치하는 사이, 드레스 주머니에서 은지가 기어 나왔다. 녀석은 내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며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더니 어딘가로 빠르게 사라졌다.

“앗, 은지야! 어디 가!”

내 부름에 수풀 사이로 들어가던 녀석이 나를 돌아보고는 방방 뛰었다. 따라오라는 건 아닌 것 같고,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 같았다.

‘뭐 하려는 거지?’

일단 기다리라는 것 같으니, 기다려야지. 나는 얌전히 은지가 수풀 안으로 사라지는 걸 지켜보다가 올가미 막대를 마저 설치했다.

그때, 아스달은 활에 화살촉을 끼우고는 활시위를 당긴 채 주변을 훑고 있었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게 근처에 앉아 아스달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영 쓸모없는 줄 알았는데, 활을 쏠 줄 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푸드덕 푸드덕.

그리고 그때, 나뭇가지 사이를 가르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가 보였다.

피융.

아스달은 민첩하게 움직임을 감지하고 활시위를 놓았다.

퍽.

화살에 맞고 새가 아래로 추락했다. 명중이다.

나는 놀라서 입을 떡 벌리고 아스달을 쳐다봤다.

“여기 있어라. 주워 올 테니.”

아스달이 제법 듬직한 얼굴로 말하며 사라졌다. 오. 정말 다시 봤다.

나는 그를 기다리는 김에 얌전히 버섯 채집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내 앞으로 은지가 뭔가를 입에 물고 나타났다. 물었다기보단 끌고 왔다고 하는 게 정확했다.

“……어?”

토끼였다. 은지는 아직 새끼 뱀이라서 내 손바닥을 두 개 합친 것만 한 크기였는데, 제 몸집의 두 배나 되는 토끼를 사냥해왔다.

먹이 사슬의 상위 포식자는 역시 떡잎부터 다른 모양이다.

“잘했어. 진짜 대단하잖아?”

나는 신이 나서 은지의 비늘을 쓰다듬으며 칭찬을 쏟아 부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더니 은지가 잔뜩 들떠서 자리를 빙글빙글 돌며 재롱을 떨었다.

“아이구, 잘한다 잘한다, 내 새끼!” 외치며 박수를 치고 있는데 아스달이 나타났다.

“뭐 하는 거지?”

그는 해괴한 것을 보듯 나와 은지를 번갈아 바라봤다. 나는 조금 민망해서 한껏 마주 치던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은지가 토끼를 잡아 왔더라고요. 그래서…….”

아스달의 시선이 바닥에서 꼬물거리는 은지와 토끼에게로 향했다.

나는 그가 토끼를 보는 사이 그의 손에 들린 새를 살폈다.

꼬리가 길고 얼굴만 색이 다른 게, 언뜻 보면 꿩처럼 생겼으나 꿩은 아니었다. 이곳에서만 서식하는 다른 종의 조류인 것 같았다.

“긴꼬리새인 것 같군.”

내가 그의 손에 들린 새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아스달이 말했다.

“긴꼬리새요?”

이름 참 단순하다.

“아, 보통 더운 북부 지방에 서식하는 새인데 이곳에도 있군.”

사냥을 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그런 지식은 풍부한 것 같다.

물론 사냥만 하고 사냥감을 손질할 줄은 전혀 모르지만, 사냥을 잘하는 게 어딘가. 쓸모없다는 말은 취소다.

“돌아갈까요?”

나는 은지와 토끼를 챙겨 일어나며 말했다.

“다람쥐는 자기 전에 한번 와서 확인하면 될 것 같아요.”

내 말에 아스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각자 토끼와 긴꼬리새를 들고 복귀했다.

물론 손질은 내 몫이었다. 에녹은 여전히 깨어나질 못하고 있었고, 루제프와 아스달은 주방 근처에도 가 본 적 없는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본래라면 마거릿도 그랬겠지만…….

나는 체념하며 잡은 토끼와 새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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