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87)화 (87/234)

16. 유혹의 꽃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에녹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쉽게 깨어나지 못했는데, 아마도 그간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 탓인 것 같았다.

들끓던 열은 모두 내리고 은은한 미열만 남았다. 젖은 천으로 에녹의 얼굴을 닦아 주고 상처가 제대로 아물고 있는지 다시 확인했다.

“영애, 이건 무슨 약이라고 하셨죠?”

에녹의 상처를 보고 있는데, 옆에 앉은 루제프가 내게 물었다.

그는 얌전히 앉아 약통에 든 약품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차근히 그에게 약품 종류를 설명해주었다.

다 함께 오두막 1층에서 취침을 한 탓인지 아스달도 유안나도 다른 사람들을 따라 일찍 기상해 있었다.

“정찰 멤버 구성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은데.”

아스달의 말에 나는 루제프와 약품 얘기를 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스달이 거실 가운데 서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유안나와 디에고는 아침 식사 준비를 하던 중이었고 카이든은 아침에 구해 온 땔감을 벽난로에 넣던 중이었다.

“성녀가 깨어난 장소에 다녀오는 것 말이다. 저런 몸으로 다녀올 순 없지 않겠나.”

아스달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에녹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이 맞다. 우리는 에녹이 부상을 입은 탓에 유안나가 깨어난 장소에 다녀올 멤버를 다시 정해야 했다.

“황태자는 플로네 영애가 옆에 없으면 안 되니까 영애도 정찰 멤버에서 제외시켜야겠지.”

이제는 모두가 에녹의 분리 불안을 알게 됐다. 나는 민망해서 아무런 반박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유안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고는 다시 코코넛 그릇에 씻은 버섯을 나눠 담고 있었다.

나는 아스달의 말에 고민을 하며 카이든을 돌아봤다. 카이든은 아스달이 무슨 말을 하든 관심 없다는 태도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카이든, 네가 다녀와야겠다.”

“뭐? 싫어. 넌 안 가잖아.”

내 제안을 카이든이 단번에 거절했다.

“루제프는 에녹을 치료하는 걸 도와야 하고, 나는 에녹 옆에 있어야 하잖아. 우리 중에 갈 만한 사람은 너밖에 없어.”

“근위대장이랑 아스달 왕세자도 있는…….”

“그 두 사람은 우리 사람이 아니잖아.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해?”

카이든이 그제야 내 말을 알아들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곧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불만스러운 얼굴로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나도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마거릿. 나도 분리 불안이야.”

나는 카이든의 황당한 변명에 못 말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문득 며칠 전 카이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널 구하다가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그게 고백이냐고 되물었을 때, 카이든은 영문을 모르겠단 듯이 나를 쳐다봤었지.

그는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내가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카이든의 저런 저돌적인 태도가 나를 좋아해서라고 오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호감을 가졌더라도, 에녹처럼 나를 좋아하는 감정으로 바로 이어지는 건 아니니까.

‘자의식 과잉이야.’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카이든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다녀오면 네가 원하는 거 하나 해 줄게.”

“……뭐든?”

시무룩해 있던 그가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보더니, 눈을 반짝였다.

“뭐든 들어주는 건 곤란하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것에 한해서.”

“흠.”

카이든이 내 말에 고민하는 얼굴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기특해서 나도 모르게 그의 머리를 강아지 쓰다듬듯이 쓰담쓰담 하고 있는데

“아무튼 그럼 로드도 참여하기로 결정된 거지? 성녀와 로드,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디에고 경이 좋겠군.”

“아스달 저하께서는 안 가시고요?”

나는 아스달의 말에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본인이 가겠다고 나설 줄 알았는데 의외다.

“합리적인 결정을 내렸을 뿐이야. 나보단 디에고 경이 검술 실력이 더 뛰어나니까. 베이스캠프는 내가, 위험 부담이 큰 정찰 멤버엔 디에고가 배치되는 게 나을 거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나름 왕세자라고 사람을 효율적으로 쓰는 데는 머리가 잘 돌아가는 모양이다.

“그럼 오늘 바로 떠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날을 많이 지체하지 않았습니까.”

얌전히 유안나를 도와 코코넛 그릇에 물을 붓던 디에고가 말했다.

“그 말이 맞아. 로드, 어떤가. 바로 떠날 수 있겠나?”

아스달의 물음에 카이든이 불만 가득한 얼굴을 하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는 연신 내 눈치를 살핀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스달에게 말했다.

“네, 바로 떠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네요.”

“마거릿.”

카이든이 내 팔을 덥석 잡았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예쁜 얼굴이 시야에 꽉 들어찼다. 그가 내게로 가까이 고개를 기울인 탓이다. 젖은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가기 전에 무사 기원 해 줘.”

“기도하고 있을게. 조심하고.”

“그런 거 말고.”

“그럼?”

내가 의아한 얼굴로 묻자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날렵한 턱선이 보인다 싶어 의아해하다, 곧 뺨에 입술 감촉이 닿아서 깜짝 놀랐다.

“?!”

놀란 나는 그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손으로 감쌌다.

“이런 거.”

그가 내 반응을 보고 재미있다는 듯이 눈웃음을 지었다. 매혹적인 웃음이었다. 사람을 단숨에 홀려 버리는.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나는 순간 화가 나서 그를 노려봤다.

“카이든.”

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이런 거 하지 말랬지. 너, 이거 아주 나쁜 버릇이야.”

내가 목소리를 깔고 화를 내자, 카이든이 정말로 놀랐는지 크게 뜬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마거릿, 네가 말하는 좋아한다는 개념이 뭔지는 잘 모르겠어. 그게 사랑이냐고 묻는다면 아닌 것 같아.”

‘사람을 갖고 노는 거야? 뭐 하자는 거지?’

짜증이 치솟아서 기분이 나빠지려는 찰나에 카이든이 이상한 소리를 덧붙였다.

“그냥 난 네가 없으면 보고 싶고, 네가 웃는 게 기분 좋고, 너와 닿는 게 좋고, 네가 오직 나만 바라봐 줬으면 좋겠어.”

응?

“너를 만지는 게 좋아. 네가 나를 만져 주는 것도 좋고.”

뭐?

“허락 없이 입맞춤한 건 미안해. 그런 이유로 용서해 달라고 하면 나 미워할 거야?”

나는 해괴한 것을 바라보듯 카이든을 쳐다봤다. 그 말을 하는 의중을 몰라서 쳐다봤을 뿐인데, 카이든은 해맑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뭐지? 새로운 사랑 고백법인가?

“하. 저놈은 답도 없군.”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의 대화를 다 들었는지 루제프가 경멸하는 시선으로 카이든을 흘겨보고 있었다.

“적당히 좀 하고. 빨리 준비해라, 로드.”

아스달이 카이든을 향해 빈정거렸다. 물론 카이든은 아스달이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고 나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대체 이놈을 어쩌면 좋지 싶어서 고뇌에 빠지고 말았다. 폭탄을 던진 건 카이든인데, 고민은 왜 내가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카이든에게 말을 해 봐야 또 도돌이표 대화만 반복될 것 같은데. 게다가 뭐가 됐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사랑이니 뭐니, 그런 감정을 논하기 전에 정찰 멤버들을 위해 여분의 식량과 물을 준비하고 필요한 물품을 챙겨 두어야 했다.

‘할 일이 왜 이렇게 많지.’

나는 짐을 얼추 정리한 뒤,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굉장히 피곤하다.

정찰 멤버는 다 함께 버섯 스프를 끓여 먹고, 떠날 준비를 단단히 했다.

“아, 마거릿. 이건 선물.”

떠날 준비가 거의 끝나 갔을 때, 카이든이 내게 기다란 활과 화살을 건넸다.

며칠 전에 흘리듯이 만들어 달라고 얘기를 했던 건데 정말로 활과 화살을 제작한 모양이다.

“카이든, 넌 진짜 못 만드는 게 뭐야?”

내가 눈을 빛내며 칭찬하자, 카이든이 부끄러웠는지 뺨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천연덕스럽게 대꾸할 줄 알았는데, 너무 부끄러워하니 나도 덩달아 민망해졌다.

“진짜 조심해.”

내가 한 번 더 당부하자 카이든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나는 크로스백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수첩의 메모지 한 장을 북 찢어 카이든의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카이든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두 눈을 깜빡이며 나를 쳐다봤다.

“이거, 내가 그려 본 섬의 지도거든? 오두막의 위치랑 산 정상에서 봤던 섬의 지형을 표기해 뒀어. 혹시 모르니까.”

벙커 위치를 제외하고, 카이든에게 필요할 만한 정보들만 그려 넣은 지도였다. 나는 이어서 나침반도 꺼냈다.

“나침반 볼 줄 알지?”

“당연히 알지.”

카이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다른 쪽 로브 주머니에 나침반을 넣어 주었다.

“열쇠가 있었다는 장소에 가서 뭔가를 발견하게 되면 위치 꼭 기억해 두고.”

섬을 나가는 탈출 문이 그 근처에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테다.

만약 탈출구가 정말 발견된다면 정찰 멤버들이 우리를 버리고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지만, 내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다고 에녹을 두고 그들과 함께 떠날 순 없었기 때문이다.

“마거릿.”

카이든이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내 뺨을 만지작거렸다.

“고마워.”

그가 웬일로 멀쩡하게 내게 감사 인사‘만’ 한다.

“그만 출발하시죠, 로드.”

오두막 입구에 서 있던 디에고와 유안나가 카이든을 불렀다. 카이든은 나를 한번 쳐다보고는 얌전히 그들을 따라 오두막을 나섰다.

알아서 잘 하겠지?

디에고랑 카이든이라면 믿을 만한 조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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