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주변을 둘러보니 카이든도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아스달 왕자는 그 이상의 설명을 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뭐야, 왜 의미심장한 말을 하면서 허세를 부려. 나는 아스달을 질린다는 시선으로 보다가 결국 그를 무시하기로 했다.
아무튼 과거 마거릿은 많은 양의 마력 보유량을 가졌지만, 그걸 사용하기 위해 ‘연습’을 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그날로 마법학은 때려치웠다. 지루하고 힘들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가진 마력에 대해 얘기를 들었던 게, 그것 말고도 또 있긴 했다. 나는 카이든을 보며 입을 열었다.
“마력이 많이 있는 것 같기는 해. 가문의 저택으로 마법학을 가르쳐주러 오던 선생님이 했던 말도 있고. 과거에 아카데미 시험을 봤을 때 마력 테스트를 했었는데, 그때 테스트 구슬을 깨 먹은 적도 있었어.”
내 말을 경청하고 있는 사람들을 둘러본 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시 시험관이었던 마법학부 교수가 구슬에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내가 엄청난 마력을 보유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라고 했거든. 그래서 새 마력 구슬을 가져올 테니 다시 시험해 보자고 했는데…….”
“했는데?”
“시험 안 봤어. 에녹이 아카데미 특별 시험관으로 나온다고 해서 갔던 것뿐이지 아카데미 입학에는 별로 관심 없었거든.”
내 대답에 모두가 알 만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뭐야, 다들? 그 한심하다는 눈빛은?”
“잊고 있었다. 플로네 영애가 에녹 황태자를 얼마나 따라다녔는지.”
아스달이 한숨을 내쉬며 김빠진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게요. 역시 영애는 에녹 전하뿐이었죠.”
유안나도 동의한단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거릿은 에녹을 좋아하니까.’라는 말은 마거릿의 의문스러운 행동에 프리 패스가 되는 마법의 단어인 것 같다.
근데 사실이라서 반박할 수도 없고…… 나 원 참.
“그거야 옛일이고. 지금은 다르잖아. 그렇지, 마거릿?”
내내 불만스러운 얼굴로 앉아 있던 카이든이 내게 답을 채근했다.
“어……. 뭐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어서.”
“거봐, 이제 마거릿은 황태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니까.”
카이든의 말에 반박을 할까 하다가 틀린 말은 아니어서 잠자코 있었다.
“아무튼 영애가 마력을 얼마만큼 보유하고 있었던 간에 그건 어차피 옛말이고. 지금 이 섬에선 마력이 제로 상태에 가깝지 않나.”
“그렇겠죠. 여긴 마력을 쓸 수 없는 섬이니까.”
“그렇다면 영애의 마력에 의해 마물이 각인되었다는 가설도 말이 안 되지 않나?”
아스달의 반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럼 대체 뭘까요?”
유안나가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그러게. 나도 모르겠다.
다들 의아한 얼굴로 다시 은지를 쳐다봤다. 마침 드레스 주머니에서 나온 은지가 내 무릎 위에서 꼬리를 흔들며 귀엽게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은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데, 깊이 잠든 줄 알았던 에녹의 커다란 손이 난데없이 내 손목을 턱, 붙잡았다.
나는 놀라서 누워 있는 에녹의 얼굴을 멀뚱멀뚱 바라봤다. 열에 들뜬 모양인지 나른하게 눈을 뜬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게 정말인가.”
지독히도 낮은 음색이었다.
노곤한 탓인지 열 기운 탓인지 목이 잠겨 거칠어진 목소리였다. 나를 게슴츠레 올려다보는 에녹의 시선이 짙었다.
“마거릿. 그게 정말인지 물었어.”
내가 멍하니 그를 보고 있자 그가 재차 나를 불렀다.
“……네? 뭐가요?”
“이젠 날 좋아하지 않느냐고.”
“지금 그게 궁금해서 아픈 와중에 일어나서 물어보는 거예요?”
“……대답해 봐, 응?”
“그게…….”
“……아니다. 대답하지 마라.”
에녹이 짙은 숨을 뱉어 내고는 조용히 나를 올려다봤다.
그의 분위기가 어찌나 애처로우면서도 고혹적던지, 요란하게 굴던 이들이 모두 일시에 침묵하며 우리에게 집중했다.
‘부, 부담스러워.’
그 과한 시선을 가르고 에녹이 내게 말했다.
“난 널 좋아한다, 마거릿. 그건 알아 둬…….”
그는 그런 폭탄 발언을 한 채 그대로 다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오두막 안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에녹이 나를 이성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가 품은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해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런 얘기는 둘만 있을 때 하지……!’
그래야 진지하게 생각이라도 해 볼 것 아닌가! 나는 창피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뭐, 예상은 했다.”
아스달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러자 유안나가 동의한다는 듯이 맞장구를 친다.
“영애를 싫어한다고 했던 것도 옛말이죠. 지금의 영애를 보면 황태자 전하께서 반하는 것도 이상할 게 없잖아요?”
유안나가 호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안나야……. 너는 그렇게 말하면 안 돼.’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탄식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이제 데드 플래그를 완벽하게 피한 거잖아.’
루제프와 디에고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침묵했고 카이든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에녹을 노려보고 있었다.
“지금 황태자는 제정신이 아니잖아. 마거릿, 귀담아 듣지 마.”
카이든이 초조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는 두 손으로 내 귀를 틀어막았다. 이렇게 뒤늦게 귀를 막으면 뭐 해.
“그치. 지금의 에녹은 맨 정신은 아니지.”
내 대답에 카이든이 안도하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내 귀를 막았던 손을 내렸다. 나는 조용히 에녹의 잠든 얼굴을 보다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지금의 에녹에겐 내가 없으면 안 되잖아. 폭주를 막아 줄 사람이 없는걸. 그래서 그런 말을 한 걸 거야. 다들 오해하지 마세요.”
주변을 둘러보며 당부했지만 모두들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아니, 이 인간들이…….
“그래서. 이쪽 상황은 어떻게 된 건데요? 설명해 주셔야죠.”
내 말에 눈치를 보던 디에고가 총대를 멘 장군처럼 결의에 찬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서 입을 열었다.
“영애가 사라지고서 전하께선 많이 초조해 보이셨습니다. 계속해서 영애만 찾을 정도로.”
디에고의 덤덤한 말에는 많은 이야기가 생략돼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굴었지. 문제는 하필 그때 마물들이 몰려들었다는 건데…….”
아스달이 곤란한 얼굴로 서서 잠든 에녹을 빤히 바라봤다. 눈치를 살피던 루제프가 바톤을 이어받듯 입을 열었다.
“왜 갑자기 마물이 몰려왔는지 추측해 봤는데요. 아무래도 마물의 피 때문인 것 같습니다.”
“피요?”
내 물음에 루제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들은 동족의 피 냄새를 감지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희가 지난 베이스캠프에서 아나콘다를 죽이자, 다음 날 다른 아나콘다들이 떼로 몰려든 것처럼요.”
내가 했던 추측과 같았다.
“저랑 카이든이 실종된 기간이 이틀인데, 낮 시간에는 어땠죠? 그때는 마물이 사라졌나요?”
“네. 어디론가 사라지더군요. 그리고 전하께선 기절하듯이 숙면을 취하셨습니다. 그러곤 다시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마물을 해치우고……. 그걸 반복하고 있었죠.”
중간에 숙면을 취하고 일어났는데도 폭주가 지속됐다는 건가.
에녹의 증상은 나아질 듯, 나아질 생각을 안 한다. 보통 이런 경우는 의지에 달린 경우가 많던데…….
“그래도 대규모로 움직이는 마물에 대한 행동 패턴은 파악한 것 같아 다행이네요. 마물의 사체도 처리했으니 이제 괜찮겠죠.”
내 말에 다들 조금은 편안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야 시름을 조금 덜어낸 것 같았다.
나는 잠든 에녹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우선…… 좀 쉬고 나서 다시 이야기할까요? 우리 모두 쉬어야 할 것 같아요.”
나만 피곤했던 것은 아닐 거다. 저녁이고 뭐고 너무 피곤해서 나는 좀 쉬고 싶은데.
그런데 어쩐지 조용한 카이든이 이상해서 그를 돌아봤는데, 어울리지 않게 죄책감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
“다시 사과할게. 미안해.”
우리가 은지의 알을 보러 절벽으로 나갔던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그도, 나도 몰랐다. 그를 잠시 원망하긴 했지만, 이젠 아니었다.
“사실 좀 서운하긴 했지만, 네가 날 의심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 상황이 좀 말도 안 되게 흘러갔지만, 아무도 그게 네 탓이라고 하진 않아.”
내 말에 카이든이 괴로운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마거릿, 난 그래도 미안해.”
이윽고 그가 천천히 눈을 뜨고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요동치던 붉은 눈동자가 찬찬히 잠잠해진다.
나는 어딘지 단단해진 것처럼 보이는 그를 보다가 물었다.
“그럼 이젠 날 의심 안 해?”
“응. 안 해.”
“그래도 신뢰는 안하잖아.”
“아니, 지금은 신뢰해. 진짜야.”
그렇게 말하며 나를 보는 카이든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나는 가만히 그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불신이 신뢰로 바뀌기까지 엄청 오래 걸렸다, 그치?”
내 물음에 그가 입을 꾹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단호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너도 기다려. 내가 널 신뢰할 때까지.”
내 말에 그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런 그를 보다가 에녹의 옆자리에 누웠다.
은지가 꼬물거리며 기어 와 내 머리맡에 자리를 잡고 꼬리를 동그랗게 말았다. 카이든이 나를 따라 내 왼편에 눕는다.
오두막의 천장을 보고 누워 있자 바스락거리는 소음들이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이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수선한 움직임이 계속됐고, 나는 억지로라도 잠에 들기 위해 눈을 감았다.
“마거릿.”
그때 카이든이 조용히 나를 불렀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카이든이 나를 향해 돌아누워 있었다. 그는 한참을 고민하는 얼굴로 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이 안 오는데, 안고 자면 안 돼? 그럼 잠이 잘 올 것 같아.”
“내가 허락할 거라고 생각하고 묻는 건 아니지?”
“응. 거절할 것 같았어.”
“그럼 그냥 자.”
내 말에 그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여전히 나를 향해 돌아누운 채였다.
이 섬에서 깨어난 이후로 마음 편히 쉰 적이 없는 것 같다. 내내 긴장하고 목숨의 위협을 받고, 살벌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너무 피곤해.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