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85)화 (85/234)

“상태는 어때?”

카이든이 다가와서 내게 물었다.

“별로 좋진 않아. 치료하고 경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아. 소독을 잘 해야겠어. 다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라 감염될 여지가 너무 많아.”

나는 심호흡을 하고는 마지막으로 에녹의 안색을 살폈다. 다들 나와 에녹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게 약통이었어요?”

유안나가 신기하다는 듯이 루제프가 가져온 구급 약통을 살폈다. 아스달은 팔짱을 낀 채 여전히 불신 가득한 시선을 내게 보냈다.

“영애가 치료를 한다고? 영애가 뭐든 잘한다는 건 이제 알겠어. 근데 이건 다른 문제지. 그러다가 반황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영애가 책임질 건가?”

아스달은 에녹을 무시하면서도 은근히 그를 챙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를 성가시게 하는 건 못 참지.

나는 매서운 눈빛을 하고 아스달을 올려다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가 놀란 듯 움찔했다.

유안나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다가 아스달을 구박했다.

“어차피 도움 안 되긴 매한가지인데, 하는 일 없는 저하보단 영애가 낫겠죠.”

그러더니 그녀가 아스달을 향해 손짓을 했다. 비키라는 듯이. 내게서 한번 밀린 아스달은 유안나에게도 밀리고는 다소 처량한 얼굴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제발 저하께서는 입 좀 다물고 계십시오. 그게 돕는 겁니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카이든이 아스달을 보며 혀를 찼다.

“이보게 로드, 말이 심한데?”

“오랜만에 로드께서 옳은 소리 하신 것 같습니다.”

아스달의 반박에 뜻밖에도 루제프가 카이든을 두둔하고 나섰다. 그러자 아스달이 배신감에 젖은 얼굴로 루제프를 돌아봤다.

“주교, 자네까지 이러기…….”

“지금 중요한 건 치료잖습니까. 저희 중에 이 약품을 사용할 수 있는 이는 플로네 영애뿐입니다.”

루제프가 연달아 아스달의 말을 끊는 배포를 보였다. 가만히 루제프를 지켜보던 카이든이 재미있다는 얼굴로 웃으며 루제프에게 시비를 걸었다.

“야, 따까리. 넌 그냥 조용히 해.”

“뭐야? 기껏 편들어 줬더니 이 더러운 마법사가……!”

조금 전까지 카이든을 두둔하던 루제프가 화를 터뜨렸다.

“건방진 것들이 쌍으로 가관이군.”

아스달이 꼰대 부장님 같은 얼굴로 루제프와 카이든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주 난장판이 따로 없다.

“다들 시끄러우니까 비켜 주실래요? 지금 에녹은 환자라서 치료하고 쉬어야 해요. 안정이 필요하다고요.”

내 말에 잠시 세 남자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디에고와 유안나는 애초에 얌전히 앉아 내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따로 지적할 부분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누워 있는 에녹의 제복을 바라봤다. 재킷은 애초에 입고 나가지 않았던 모양인지 상의로 셔츠 한 장만 걸치고 있었는데, 셔츠가 갈기갈기 찢겨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에녹, 상처를 치료해야 하니 이 셔츠는 벗길게요.”

내 말에 에녹이 살포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옆에 앉아 있는 카이든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카이든이 나를 도와 에녹의 상처를 잡고 최대한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에녹의 셔츠를 벗겼다.

“윽.”

에녹이 다시금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상처에 붙어 있던 셔츠가 떨어지면서 쓰라림을 남긴 것 같았다.

그 아픔이 내게까지 전달되는 것 같아서 나는 콧잔등을 찡그리고는 에녹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작게 심호흡하는 걸 보며 셔츠를 완전히 벗겨 내 상처를 자세히 살폈다. 평소라면 감탄했을 탄탄한 복근은 위중한 상처에 가려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세상에, 정말 심각하네요.”

유안나가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그녀 말대로 상처가 정말 깊었다.

나는 남은 소독약의 개수를 살폈다. 그리고 자잘한 상처에 바를 연고의 상태도 확인했다. 그런 다음, 루제프가 떠온 물에 천을 적셔 상처의 피와 흙먼지들을 닦아냈다.

“이거 에녹의 입에 물려요. 아플 테니까.”

나는 약통에 들어 있던 드레스 천 조각을 둘둘 말아 반대편에 앉아 있는 루제프에게 건넸다. 루제프가 곧 천을 조심스레 에녹의 입에 물렸다.

나는 소독한 천으로 상처를 눌러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부위를 지혈했다.

에녹의 눈썹이 잔뜩 일그러졌다. 왠지 내가 다 아픈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한참 뒤에 보니 어느 정도 피가 멎어 있는 듯해서 소독약을 준비했다.

“에녹, 아플 거예요.”

내 말에 에녹이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곧장 그의 상처 위로 소독약을 부었다.

“으윽! 큭.”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린 에녹은 그래도 잘 참아 냈다.

나는 그의 안색을 확인한 뒤, 소독이 끝난 부위에는 붕대를 감고, 가볍게 긁힌 상처들 위로는 연고를 발랐다.

문제는 봉합이 필요한 큰 상처들이었다. 구급 약통에는 봉합에 필요한 드레싱 재료들도 들어 있었다.

하지만 감염의 위험이 있는 상태로 오랫동안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대로 봉합을 해 버리는 것도 안전하지 않았다.

“일단 크게 벌어진 상처는 살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나는 붕대를 마저 잘라 클립으로 고정을 시키고는 구급 약통에 남은 약품들을 넣었다.

“드레싱을 계속 해 주면서 감염 여부를 확인하는 게 좋겠어요. 자연적으로 상처가 아물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모두가 에녹 주변에 모여들어서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 눈빛들이 마치…….

응급실에서 의사에게 환자의 경과를 듣는 보호자들 같기도 했다.

나는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하며 에녹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흉터가 남고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겠지만, 제가 옆에서 간호할게요.”

“저도 돕겠습니다. 치료는 제 전문이기도 하니까요. 영애께 배운 대로 약품의 종류에 대해서도 모두 익혀 두었습니다.”

루제프가 덤덤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고마워요.”

“그런데, 이거 정말 신기하네요. 도통 뭐라고 쓰여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유안나가 약통을 훑어보며 내게 물었다.

“그건 그래. 나도 동대륙은 가 봤는데, 이런 언어는 없었거든.”

이어서 카이든이 말을 얹자 나는 당황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곤 재빨리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다.

“어, 그게……. 동대륙에 한국이라는 소수 민족이 있어. 다들 잘 모를 거야.”

내 말을 들은 이들이 의아한 얼굴로 한국이 어디냐며 서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섬을 탈출하고 나면, 나는 분명히 X 될 거다.

애써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나는 새근새근 잠이 든 에녹의 뺨에 손을 얹어 열 체크를 하고 있었다.

드레스 주머니가 꿈틀거리더니 얌전히 숨어 있던 은지가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으악!”

루제프가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그의 비명에 은지도 깜짝 놀랐는지 제자리를 빙글빙글 돌아 다시금 내 다리 위로 올라왔다.

나는 안심하라는 듯이 녀석의 몸통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 영애, 그건 마물입니까?”

루제프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은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내게 물었다.

“아나콘다 마물인 것 같…….”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디에고가 검을 빼어 들었다. 곧장 카이든이 단검을 들었고, 루제프가 황급히 내 앞으로 달려와 나를 보호하듯 가리고 섰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루제프가 화가 잔뜩 난 얼굴로 호통을 쳤다.

신경질 부리거나 짜증을 내는 건 많이 봤어도 루제프가 이런 식으로 화를 터뜨리는 건 처음 봤다.

“마물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위험합니다.”

디에고는 동요도 없이 은지를 향해 검을 겨누고 대꾸했다.

은지가 덜덜 떨며 내 몸을 타고 올라와 어깨에 눕더니 머리카락 사이로 제 얼굴을 숨겼다.

녀석이 어깨 위에 누워 덜덜 떠는 바람에 몸이 옅게 진동했다. 나는 은지의 몸통을 쓰다듬으며 디에고를 노려봤다.

“우리 애 놀랐잖아요!”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갑자기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예상 못 한 반응에 울컥 치민 화도 가라앉았다. 다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뭐야, 왜요?”

내가 당황해서 주변을 훑으며 묻자 나를 향해 검을 겨누고 있던 디에고가 허탈하단 얼굴로 검을 내렸다.

유안나가 놀란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저, 플로네 영애가 그렇게 진심으로 화내는 거 처음 봐요.”

“나 처음으로 저 뱀 X끼가 부러워졌어.”

“마물이라고 하지 않았나? 누가 보면 애완 뱀이라도 되는 줄 알겠군.”

유안나와 카이든, 아스달이 연달아 말을 했고, 디에고가 대미를 장식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설명을 좀 해 주십시오.”

“설명하고 있었잖아요. 다짜고짜 검을 드신 분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디에고 경.”

나는 화가 난 것을 구태여 숨기지 않고 그에게 말했다. 저 나무꾼은 나한테 검을 겨누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결국 디에고가 내게 사과했다.

나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디에고의 사과를 받고는 그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물론 카이든이 나를 불신했다는 이야기는 부러 하지 않았다.

우선 카이든과 절벽까지 나갔다가 마물의 공격을 받고 떨어진 것, 그리고 깨어난 장소에서 알을 발견한 것. 나를 따라다니던 알이 부화하고 은지가 태어난 것.

은지가 내게 각인한 것 같다는 정황까지 설명하고 나자 다들 신기하다는 얼굴로 내 어깨에 있는 은지를 쳐다봤다.

“마물이 인간에게 각인을 하는 경우는 처음 봅니다.”

루제프가 신기하단 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보자 그가 차근히 내게 설명해 줬다.

“보통은 상위 포식자에게 각인을 하는데 마물은 인간을 상위 포식자라고 인식하지 않거든요.”

아. 내가 탄성을 뱉자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카이든이 말을 이었다.

“아나콘다라면 이미 그 자체가 상위 포식자여서 다른 각인 개체를 찾기는 쉽지 않았을 거야. 그러던 중에 너를 만났다면 충분히 각인할 가능성은 있지. 물론 네가 마력을 갖고 있다는 전제하에.”

그가 내 어깨에 누워 여전히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을 숨기고 있는 은지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내가 마력을 갖고 있다는 전제라니.

“영애가 가진 마력 보유량이 엄청나긴 해.”

그때 갑자기 아스달이 내 마력에 대해 알은체를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긴 했다. 과거 마거릿의 마법 스승이 ‘많은 양의 마력을 보유하고 있으니, 체력만 기르면 된다’고 했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가 가진 마력보다 카이든이 가진 마력이 더 많았을 텐데, 왜 굳이 나한테 각인을 한 거지?

그리고 애초에 이 섬에선 마력을 못 쓰잖아.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미간을 좁히고 아스달에게 물었다.

“근데 제 마력 보유량을 저하께서 어떻게 알아요?”

그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자신의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웃음을 지었다.

“내가 그런 걸 보는 눈을 가졌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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