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84)화 (84/234)

나는 웃으면서 그에게 물었다.

“주교님께선 다친 곳은 없으신가요?”

그가 훌쩍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다가 나는 그가 품에 소중히 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낯익은 가방이었다.

“어? 이거……?”

아무래도 내가 계속 찾았던 크로스백인 모양이다.

“아, 영애의 가방입니다. 주웠어요. 저는 영애가 혹시나 잘못된 줄 알고…….”

루제프가 벌겋게 부어오른 눈을 하고는 갑자기 나를 표독스럽게 노려봤다.

“한 번만 더 이렇게 걱정시켜 보십시오.”

그가 까칠한 고양이처럼 연신 투덜거리며 내게 가방을 건넸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물론 내 의도는 아니었지만.

“주교님!”

멀리서 상황을 지켜보던 유안나가 뛰어왔다. 그녀는 루제프의 안색을 살피고는 우리를 둘러봤다.

“다들 괜찮아요? 플로네 영애, 무사하실 줄 알았어요.”

그녀가 내 두 손을 잡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성녀님은 괜찮으세요?”

나는 유안나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어머, 제 걱정은 마세요. 저는 발이 빠르고 숨는 걸 잘해서 괜찮아요.”

유안나가 허리에 손을 얹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시원하게 웃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에요?”

“그 전에 우리도 영애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좀 들어야겠는데?”

아스달의 물음에 나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네.

그리고 그때 드레스 주머니가 꿈틀거렸다.

“아, 맞다. 은지……!”

너무 얌전히 주머니 안에 있어서 잠시 잊었다.

“……영애? 이거 뭐예요? 악!”

유안나가 의아한 얼굴로 내 드레스 주머니 쪽을 쳐다보다가 빼꼼 머리를 내밀고 나온 은지와 눈이 마주치고는 비명을 내질렀다.

은지가 깜짝 놀라 다시금 드레스 주머니 안으로 머리를 숨겼다.

디에고가 검을 뽑아서 나를 향해 겨누었고 에녹이 내 앞을 가로막고 그들을 향해 검을 마주 겨눴다.

“비키게. 아까부터 대체 그게 뭔지 묻고 싶었어. 정체 모를 마물인 것 같은데.”

“마물이든 뭐든 마거릿에게 검을 겨누는 건 용납할 수 없다.”

“그건 동감. 마거릿 놀라잖아요. 검 치우시죠, 왕세자 저하.”

에녹이야 원래 저랬으니 그렇다 치지만 이제는 카이든도 한술 더 뜬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그들을 보다가 주머니에서 은지를 꺼냈다.

“얘를 어떻게 만났는지 설명하자면 조금 긴데…….”

은지가 내 손바닥 위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다가 눈알만 굴려서 주변 눈치를 살폈다.

하여간 이 소심이.

그때, 경계하는 아스달과 디에고 사이로 느긋하게 걸어 나온 유안나가 고개를 숙이고는 은지를 유심히 살피더니 말했다.

“자세히 보니 귀엽다.”

“이봐, 성녀님. 위험해.”

“성녀님. 비키십시오.”

아스달과 디에고가 동시에 유안나를 향해 말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자신에게 공격적이지 않다는 걸 알아서일까, 은지는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보다가 유안나를 향해 배를 뒤집고는 애교를 부렸다.

“어머?”

유안나가 사랑스럽다는 듯이 눈을 곱게 접었다. 하지만 곧 디에고의 재차 이어진 당부에 귀찮다는 듯이 뒤로 물러났다.

“일단 은지야, 인사부터 해.”

물론 인사하라는 말의 반은 농담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녀석이 좌중을 훑었다.

그러고는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를 슬쩍 올려다보고는 꼬리를 흔들었다. 꼭 그 눈빛이 ‘정말 인사해?’라고 말하는 듯했다.

“강아지 같네.”

멀찍이 떨어진 유안나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때, 은지가 저를 향해 날카로운 검을 겨눈 아스달과 디에고를 쳐다보더니 이내 입을 쩍 벌렸다.

이윽고 은지 입에서 주먹만 한 작은 불이 뿜어져 나왔다.

‘응?’

아스달과 디에고가 놀란 얼굴로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그들에게까지 닿을 정도로 큰 불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은지는 내내 저를 위협하고 있는 아스달과 디에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모두가 나를 쳐다봤다. 나는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은지를 내려다봤다.

은지는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는 ‘나 잘했지?’라는 눈빛으로 나를 마주 봤다.

은지야. 너 불도 뿜을 줄 안다는 얘기는 안 했잖아. 그리고 그게 어딜 봐서 인사야.

아무래도 조기 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할 모양이다.

* * *

우리는 일단 마물의 사체부터 처리한 뒤에 오두막으로 돌아가 그간의 사정에 대해서 마저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마물의 사체를 완벽히 처리하고 가지 않으면, 또 다른 마물들이 몰려올지도 모른다.

“으악. 촉감 너무 싫어.”

나는 거미의 복슬복슬한 다리를 들고 움직이다가 결국 자리에 주저앉았다.

“영애, 힘내요.”

유안나는 얄밉게도 나무 위에 앉아서 여유롭게 우리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저기요, 성녀님. 좀 도와주실래요?”

“저는 비위가 약해서.”

나는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렇지. 당신은 그런 사람이었지.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도움이 되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래서 더 얄밉다.

그때 카이든이 거대한 거미 한 마리를 가볍게 손으로 들어 어깨에 걸치고는 나를 돌아봤다.

“마거릿, 너도 저기서 쉬라니까. 여긴 우리끼리도 충분해.”

“그러게. 너 보니까, 걱정 없겠다.”

내 말에 카이든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웃었다.

“그래도, 빨리 끝내고 싶으니까 도울래.”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잘린 거미 다리를 힘껏 들어 옮겼다.

나무가 없는 커다란 공터에 마물의 사체를 쌓아 놓으면 은지가 그 앞에서 불을 뿜었다. 라이터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였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고 힘겹게 거미 다리를 옮기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거미 다리의 무게가 가벼워졌다.

놀라서 고개를 드니 유안나가 반대편에서 거미 다리를 함께 들고 있었다.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보자 그녀가 싱긋 웃음을 짓는다.

“영애가 했던 말이 생각나서요.”

“제가 했던 말이요?”

“존중과 배려를 하라면서요.”

그녀가 나와 호흡을 맞춰 거미를 들고 이동했다. 도무지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렇게 하면, 영애가 내 사람이 되나?”

아니요, 저기요 여주님. 시중드는 것에서 언제 내 사람까지 진전이 된 거죠?

“그런 게 갖고 싶기는 하더라고요. 날 위하는 내 사람들.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이용만 당하는 건 이제 질려서.”

그녀가 뜻밖의 말을 했다.

“이용이요?”

“아. 교황청 놈들 말이에요. 저는 성녀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거든요. 가족의 생계를 두고 협박을 당했죠.”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교황청의 악랄함에 나는 마땅히 답할 말을 찾지 못하고 침묵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아. 영애가 부럽네요. 돌아가면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어서.”

손을 툭툭 털어 낸 유안나가 부러운 눈초리로 나를 봤다.

‘돌아가면 더 행복하게…… 마거릿으로 살아야겠지. 이젠 내가 마거릿이니까.’

마음이 조금 심란해진다.

“시중들라고 한 건 반은 진심이에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고상한 귀족 영애가 소문과 다르게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고 능숙하게 해내는 게 신기했어요. 그래서 골려 주고 싶었던 것도 있고. 저는 성격이 좀 이상하거든요.”

“네. 이상해 보여요. 본인 편할 대로 생각하시네요.”

“아하하하. 원래 인간은 편협해서 자기가 경험한 선에서만 생각하는 것 아니겠어요? 역시 영애는 재미있다니까.”

정말 유안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 사이 공터에 도착했다. 우리는 은지가 불을 뿜고 있는 마물의 사체 더미 위에 들고 있던 거미 다리를 던졌다.

나는 웃으면서 내 어깨를 치는 유안나를 기겁하며 쳐다보고는 슬그머니 그녀에게서 벗어났다. 그리고 계속해서 루제프나 다른 이들을 도와 마물 사체를 옮기는 데 주력을 다했다.

어느덧 마물 사체를 모두 치우고 해가 저물었다.

은지는 얌전히 내 드레스 주머니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주머니를 토닥토닥 두드리고는 바닥에 잠시 내려놨던 크로스백을 주웠다.

크로스백의 끈이 떨어졌기 때문에 가방을 멜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가방을 품에 안아 들고 에녹을 흘끔거렸다.

“다들 식사는 하셨어요?”

“했을 것 같은가?”

피곤한 얼굴로 뒤따라오던 아스달이 내 물음에 답했다. 나는 그의 초췌한 몰골을 보다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하셨을 것 같네요.”

우선 이 중에서 나와 카이든이 그나마 멀쩡한 것 같으니 둘이서 사냥이라도 해 와야겠다. 왜 밖에서 생고생한 우리 둘이 더 멀쩡한 건지는 모르겠다.

오늘은 고기를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오두막에 돌아가자마자 덫을 만들어야겠다.

한참을 걸어서 우리는 드디어 오두막으로 돌아왔다.

“윽.”

오두막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으며 에녹이 고통에 찬 신음을 뱉었다. 오는 길 내내 참은 것처럼 보였는데 거처에 오자 더이상 고통을 참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루제프에게 눈짓하자 그가 구급 약통을 가져왔다.

그간 누가 다친 적이 없어서 구급 약통을 쓸 일이 없었기에 유안나와 아스달, 디에고가 의아한 얼굴로 약통을 바라봤다.

나는 붕대와 약품들을 꺼내 에녹의 상처를 치료할 준비를 했다. 지난번에 카이든을 치료했던 붕대는 깨끗하게 세탁해 건조를 시켜 둔 탓인지 상태가 좋았다.

‘붕대가 많지 않으니까…….’

재활용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재활용하는 게 좋았다.

“에녹.”

나는 자신의 침구 위에 비몽사몽 누워 있는 에녹을 불렀다. 괴로운 낯으로 얼굴을 한가득 구기고 있던 그가 슬며시 눈을 떴다.

나는 가만히 그의 뺨에 손을 얹었다. 몸이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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