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마물이 바닥으로 쓰러지고 나는 에녹과 서로 마주 보고 섰다.
“에녹.”
그리고 다시 한번 그를 불렀을 때, 그의 등 뒤로 또 다른 거대한 타란툴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녹은 곧장 등을 돌려 내게서 멀어졌다. 제기랄.
스스스.
내 어깨에 있던 은지가 내려와 내 팔뚝을 감았다. 나는 나를 바라보며 혀를 날름거리는 녀석을 보다가 문득 소설 속 내용이 떠올랐다.
-섬의 마물들은 모든 개체가 상극이다.
늑대 마물이 있는 곳에는 타란툴라 마물이 서식하지 않고 타란툴라 마물이 서식하는 곳에는 아나콘다 마물이 머물지 않는다.
그중 아나콘다 마물은 이 섬의 먹이 사슬 상위 포식자다. 하여 늑대 마물과 타란툴라 마물 모두 아나콘다 마물의 새끼만 봐도 두려워하고 기피했다.-
분명 그런 내용이 있었다. 너무 스쳐 가는 서술이어서 이제야 생각이 났다.
몰려드는 마물들의 눈만 좀 돌리면 억지로라도 에녹을 빼내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해맑은 얼굴로 혀를 내밀고 나를 보는 은지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은지는 정말 새끼 아나콘다일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런 작은 아이가 저 거대 타란툴라를 해치울 수 있을 리는 없다.
‘아직 은지는 아기잖아.’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은지를 보내 타란툴라 마물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그러자 은지가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조금 화난 얼굴로 콧김을 뿜었다. 마치 저를 우습게 보지 말란 듯이 말이다.
그래서 나는 녀석을 보며 물었다.
“할 수 있겠어?”
왠지 그간의 은지라면 대화가 될 것만 같았다.
내 물음에 은지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그러고는 내 몸을 타고 바닥으로 기어 내려갔다.
그 사이에도 거미들이 끝도 없이 모여들었고 나를 호위하듯 서 있는 카이든, 아스달, 디에고도 부쩍 바빠졌다.
나는 빠르게 기어가는 은지를 따라 조명탄을 쥐고 황급히 뛰었다.
마침 에녹을 향해 다섯 마리의 마물이 모여들었고 그 사이를 부드럽게 기어 들어간 은지가 에녹의 앞에 서서 주위를 훑었다.
그러자 공격적으로 다리를 뻗던 마물들이 주춤거렸다.
나는 그 사이로 파고들어 마물에게 달려들려고 하는 에녹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보는 사이, 마물들을 향해 조명탄을 조준하고는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펑! 퍼엉!
불꽃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마물의 사체가 공중분해 됐다. 나는 바닥에 얌전히 있는 은지를 주웠다.
“잘했어. 고마워.”
한숨을 내쉬며 녀석의 비늘을 두어 번 쓰다듬어 줬다.
“다음엔 이렇게 위험한 일 안 시킬게.”
어느새 녀석에게 정이 든 모양이다. 내가 저를 쓰다듬자 기분이 좋았는지 꼬리를 흔들며 내 팔을 타고 올라와 어깨에 매달렸다.
나는 그런 은지를 내버려 두고 에녹의 팔을 당겼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질 않았다.
“마거릿!”
바로 옆에서 카이든의 힘겨운 외침이 들려왔다. 마물이 더 모여든 모양이다.
“황태자를 빨리 끌어내라!”
아스달이 내게 외쳤다.
나는 세 남자가 몰려드는 마물을 힘겹게 상대하는 걸 보고 다시 에녹을 올려다봤다. 초점이 반쯤 나간 눈을 하고 그가 멍하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양손으로 그의 뺨을 쥐고 두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나는 에녹의 얼굴을 천천히 내게로 끌어당겼다. 내 코가 그의 코에 닿을락 말락 가까워졌다.
“에녹. 정신 차려.”
한 자 한 자 힘을 주고 그에게 말했다. 에녹의 금안이 느릿하게 흔들렸다.
좋은 징조였다. 최소한 나를 밀어내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아직 정신이 든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나는 다시 한번 또박또박 힘을 줘 말했다.
“이제 그만해.”
우리 주변으로는 세 남자가 거의 날아다니다시피 마물을 상대하며 난리가 났지만, 나는 침착하게 에녹의 발작을 가라앉히고자 노력했다.
“그만해도 되니까 이제 멈춰. 하지 마.”
나는 에녹의 금안을 똑바로 마주 본 채, 아주 단호하고도 엄격하게 그를 통제했다.
에녹의 금안이 요동치듯 흔들렸다. 그의 눈동자에 서서히 초점이 잡히기 시작한다. 그래서 나는 쐐기를 박듯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멈춰. 에녹.”
에녹의 폭주는 리스크가 크지만, 이렇게 마물이 많은 경우라면 오히려 도움이 된다. 하지만 본인에겐 아니겠지. 자신을 전혀 돌보지 않는 상태로 폭주해 버리니까.
그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나뿐인 데다가 통제 과정 또한 번거롭고 힘들지만, 싫지는 않았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다. 내 존재가 인정을 받은 기분. 한국인 시절에는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래도 역시 트라우마는 치료됐으면 좋겠어.’
존재가 인정받는 기분을 느낀다는 것도 어차피 찰나의 감정이다. 그리고 나는 자기만족을 위해 다른 이의 고통을 즐길 만큼 독하지도 못했다.
“……마거릿.”
귓가에 나를 부르는 에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에녹의 금안에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정신이 들어요?”
나를 보는 그의 금안이 놀란 듯 크게 뜨였다. 드디어 정신이 든 모양이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안도감에 그만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에녹이 내 팔을 단단히 붙잡지 않았다면 추하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을 거다.
“마거릿.”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쩐지 물기가 잔뜩 밴 목소리였다.
이윽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는 내 얼굴을 노려봤다. 어쩐지 그의 눈이 붉게 충혈이 된 것 같기도 했다. 그가 나를 강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왜 이제 왔지?”
어깨에 뜨거운 숨결에 닿았다.
“난 그대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어디 갔었어, 응? 날 두고.”
낮은 음색의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그가 투정을 부리듯이 내 어깨에 얼굴을 문댔다.
목이 멘 듯 잔뜩 갈라진 목소리엔 괴로움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그리고 저도 나름 죽을 뻔했거든요. 그러니 너무 나무라진 말아 주세요.”
내가 아랫입술을 내밀고 불만스레 대답했다. 그러자 에녹이 고개를 들고 나를 잠시 바라봤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깊은 죄책감이 어렸다.
“내 생각만 했군.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하다.”
“알아서 살아 돌아왔잖아요. 괜찮아요. 그리고 제발, 내 몸 신경 쓰기 전에 당신 몸도 좀 소중히 해 줄래요?”
내 말에 에녹이 자괴감 어린 얼굴로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회피했다. 아마도 조금 전, 폭주를 하다가 내 덕에 정신을 차린 걸 떠올린 모양이다.
“마거릿!”
카이든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카이든과 아스달, 디에고가 여전히 우리를 호위하듯이 둘러싸고 마물을 상대하고 있었다.
“에녹, 우선 이곳을 벗어나는 게 좋겠어요. 이참에 마물 소탕을 해 버리면 좋겠지만, 오늘은 무리일 것 같아요.”
내 말에 그도 그제야 주변을 살피더니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주교님은 어디 있죠?”
내 물음에 에녹이 미간을 좁히고는 작은 거미 떼들이 모여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젠장. 자꾸 눈앞에서 걸리적거리기에 바위 안으로 숨겨 뒀다.”
그의 말에 나는 놀라서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쳐다봤다.
“설마…… 저 거미들이 모여 있는 곳인가요……?”
그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바닥에 떨어뜨린 검을 주워 들었다. 그러고는 검을 가볍게 털었다. 검날에 진득하게 묻은 녹색 피가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내 잘못이다. 내가 데려오지.”
“함께 가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전하.”
멀리 있던 디에고가 언제 왔는지 빠르게 다가와 에녹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마거릿은…….”
에녹이 내 손을 붙잡은 채로 망설이고 있으니 카이든이 뒤에서 내 양어깨를 잡고는 에녹을 향해 웃었다.
“마거릿은 내가 지킬 테니, 걱정 마시길.”
“나도 있다.”
아스달이 손을 들고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와 에녹을 쳐다봤다.
“마거릿, 기다리고 있어. 다시 돌아올 테니.”
에녹의 걱정스러운 당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교님을 구출하는 게 우선인 거 알죠? 전 여기 있을 테니 걱정 마세요.”
에녹이 카이든과 아스달에게 나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디에고와 함께 거미 떼 속으로 들어갔다.
“부탁하긴 뭘 부탁해. 마거릿이 꼭 자기 사람인 것처럼 구네.”
카이든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투덜거리더니 바닥을 기어 오는 작은 거미를 발로 밟았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반대편에서 오는 거미를 검으로 베어 낸 아스달이 그 말에 동의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때 거대한 굉음이 잇달아 들려왔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니 디에고와 에녹이 육안으로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고 그들의 검이 닿은 곳마다 마물들이 조각나 공중분해됐다.
에녹이 워낙에 괴물 같은 작자라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디에고도 최연소 기사단장이었다. 그것도 근위대 기사단장. 그 역시 혼자서 마물 몇 마리는 거뜬하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한참 동안 도륙이 계속되는가 싶더니 숲속이 고요해졌다. 태풍이 휩쓸고 간 듯 초토화가 된 공터엔 마물들의 사체가 가득했다.
마물 소탕을 오늘 안에 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던 게 무색하게 타란툴라 마물들이 전멸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녹색 비 사이로 루제프가 숨어 있다던 바위가 드러났다. 바위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물빛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윽고 전투가 끝나서 사방이 잠잠해지자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루제프가 바위 아래에서 기어 나왔다. 품에는 뭔가를 안고서.
“주교님!”
나는 곧장 그를 향해 달려갔다. 에녹에 의해 바위 아래에서 구출된 루제프가 나를 보더니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플로네 영애!”
이윽고 그가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얼굴로 나를 끌어안았다.
루제프가 너무 꽉 끌어안아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잠시 뒤 루제프의 팔에서 힘이 조금 빠지고서야 품에서 벗어난 나는 그의 안색을 살폈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나를 바라보는 루제프의 청초한 눈망울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