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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82)화 (82/234)

나와 카이든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황급히 뛰어갔다.

그리고 마주한 장면은 조금 전 보았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까.

거대한 거미들 수십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거미를 밟고 올라간 남자는 계속해서 모여드는 거미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마물의 녹색 피가 바닥에 강을 이뤘다.

콰아아악!

거미들이 내지르는 비명인지 뭔지 모를 끔찍한 소리들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내 팔에 몸을 휘감고 있던 은지가 놀랐는지 팔을 타고 내 어깨 위로 기어 올라와 머리카락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플로네 영애! 살아 계셨군요!”

멀지 않은 거리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높이가 높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던 유안나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유안나는 전투력이 없다. 게다가 나처럼 조명탄 같은 무기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능숙하게 스스로 위험에 대처할 줄 알아서 걱정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플로네 영애.”

이번엔 바로 옆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돌아본 시야에 분홍색 머리카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스달이었다.

유안나는 이쪽으로 넘어올 수 없는 위치에 있었는데, 아스달은 비교적 우리와 가까이에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잔뜩 초췌해진 몰골을 하고는 나와 카이든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이를 악물었다.

“살아 있었군.”

“살아 계셨습니까, 로드, 영애.”

그리고 마찬가지로 근방에 있었는지 황급히 뛰어온 디에고가 나와 카이든에게 인사했다.

“그건 뭐지……?”

아스달이 내 어깨 위에 올라가 있는 은지를 가리키며 묻던 중에 디에고가 검을 뽑아 나를 향해 겨눴다. 카이든이 재빠르게 내 앞을 가로 막고 섰다.

“위험한 놈 아니야, 검 치워.”

“은지는 위험하지 않아요. 정말이에요.”

카이든의 말에 내가 한마디 더 덧붙이자 아스달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은지……?”

“은지는 이 녀석 이름인데, 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에녹은 대체 왜 저렇게 폭주한 상태인 거죠?”

내 물음에 디에고와 아스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들은 피곤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하더니 다시금 폭주 상태인 에녹을 돌아봤다.

“주교님은 어디 계신 거죠?”

아무리 찾아봐도 루제프가 보이지 않았다. 불길하게. 아스달이 한숨을 내쉬며 에녹이 서 있는 방향을 노려봤다.

“중심에 있어.”

“……중심이요? 저기에 주교님이 있다고요?”

세상에……. 그 심약한 루제프 주교가 저 중심에 있다니.

“아직은 무사한 것 같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무의식중에 주교님을 보호하시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습니다. 전하의 상태도 매우 불안정합니다.”

이번에는 디에고가 묵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놈은 인간이 아니야. 짐승이지.”

아스달이 진저리를 치며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로 에녹을 보며 말을 이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이틀째 저렇게 마물들을 도륙하는 중이야.”

“일시적으로 멈추게 하는 건 가능하긴 합니다. 아스달 저하께서 저와 함께 힘을 써 주신다면요.”

디에고의 말에 아스달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이 진저리를 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영애와 로드는 대체 어딜 다녀온 건가?”

아스달이 의문 가득한 얼굴로 나와 카이든을 보며 물었다.

“타란툴라 마물에게 공격받았어요. 절벽에서 떨어지고 여기까지 힘들게 온 거예요.”

그제야 아스달과 디에고가 나와 카이든의 몰골을 훑었다.

“그래서 에녹은 왜 폭주한 건데요?”

내 물음에 아스달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에녹 쪽을 쳐다봤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폭주하기 전까지 영애를 찾고 있었다는 것만 기억나는군.”

“저 때문은 아닐 거예요. 에녹의 폭주는 ‘사람의 피’를 봤을 경우에만 발동한다고요.”

“그렇지. 그럼 마물 소탕을 위해 폭주를 의도했을지도 모르겠군. 우리 중에 피를 흘린 사람은 없으니까. 반황 본인 말고는.”

마물 소탕을 위해서 폭주를 의도했다고?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하느냐는 차치하고 마물을 모두 소탕한 뒤에 제어는 어떻게 하려고 그런 방법을 택한 건지 모르겠다.

나는 다시금 에녹을 돌아봤다. 실상 에녹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다. 마물에게 에워싸여 그것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느라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물들의 움직임이 이상했어. 갑자기 몰려들었거든. 몰려든 장소가 오두막에선 거리가 있으니 다행이지만……. 머릿수가 제법 많아서 오두막까지 포위당할 수도 있었다. 결계가 있다 한들 그건 위험하지. 반황은 지금 해야 할 일을 하는 거야.”

아스달이 피곤한 얼굴로 미간을 꾹꾹 문지르며 말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다. 오두막만큼 좋은 베이스캠프는 없었다. 버틸 수만 있다면 최대한 오래 그곳에서 버티며 탈출 방법을 찾는 게 가장 이상적이었다.

‘그러니 마물을 소탕하고 사체를 불태워 버리는 편이 좋을지도.’

마물들은 동지의 죽음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리고 사체 주변으로 모여드는 특성이 있는 것 같다. 일전의 아나콘다 마물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절벽 위에 죽은 타란튤라 마물 때문인가? 혹시 그래서 이렇게 모여든 건가? 그렇다면 이 현상이 어느 정도 납득 가능하기도 했다.

에녹이 쓰러뜨린 마물들의 녹색 피도 마찬가지다. 그 피가 점점 더 많은 마물을 불러내기라도 하는 건지 어디선가 자꾸만 마물들이 등장했다.

나는 그제야 에녹이 피투성이 상태라는 걸 알아차렸다. 놀라서 입가를 가리고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린 피해 있으면 그만인데, 반황 녀석은 저러다가 죽을지도 몰라.”

이어지는 아스달의 말에 나는 황급히 에녹을 향해 다가갔다. 물론 얼마 가지 못하고 카이든에게 붙잡혔다.

“위험해, 마거릿.”

내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발작 상태의 에녹이 ‘그만해’라는 말에 반응한다는 건 알았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그걸 아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았다.

“에녹도 위험해요.”

내 말에도 카이든은 내 손목을 붙들고 놔주질 않았다.

“은지야.”

그리고 내 부름에 어깨에 숨어 있던 은지가 팔을 타고 내려오더니 카이든의 손을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콱 물었다.

이 녀석이 내게 각인했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아니, 사실 이제는 거의 확신했다. 말하지 않아도 은지가 내 마음을 읽고 시키는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카이든이 놀라서 내 손을 놓쳤다.

“미안해요.”

나는 카이든에게 사과하고 조명탄을 꺼내 장전한 뒤, 마물들 사이로 걸어 들어갔다.

“에녹!”

당연하게도 에녹은 내 부름에 답이 없었다. 그는 초점 없는 눈을 하고는 등을 돌려 몰려드는 거미들을 향해 걸어 나갔다.

나는 그를 따라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마물들의 사체를 헤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카악!

그때, 가까이 다가온 거대한 거미가 나를 향해 다리를 뻗었다. 재빨리 조명탄을 치켜들었지만, 그보다 먼저 날카로운 검날이 짓쳐들어와 마물의 다리를 잘라 냈다.

고개를 돌리니 검을 들고 선 디에고가 보였다.

내 양옆, 그리고 뒤로 아스달과 디에고, 카이든이 각각 무기를 들고 나를 호위했다.

“엄호해 줄 테니까, 하려는 걸 해 봐. 저 상태의 황태자를 통제할 수 있는 건 너뿐이잖아.”

카이든이 단검을 들고 걱정 말라는 듯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돕겠습니다.”

디에고가 묵묵히 대답했고, 아스달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라, 영애.”

아스달이 외쳤다. 여전히 내가 포X몬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지만 어쨌든 좀 든든하기는 했다.

그렇게 나는 어깨에 은지를 매단 채로 앞으로 나아갔다.

“에녹!”

거의 지척이었다. 그러나 에녹은 여전히 내 외침을 듣지 못했다.

“멈춰요, 에녹!”

에녹을 통제할 수 있는 통제어나 마찬가지인 문장을 꺼냈으나 효과는 없었다. 그에게까지 완벽히 닿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분명 들렸을 거리임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초점이 나가 있는 상태의 에녹을 보며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에녹!”

힘차게 그의 이름을 불러 봤지만, 소용은 없었다. 내 목소리가 그에게까지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고민이 길어질수록 마물의 진득한 녹색 피가 강을 이루며 흙바닥에 진창 고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마물의 몸뚱이에 검을 찔러 넣은 에녹과 눈이 마주쳤다.

쿠에엑!

마물의 괴상한 비명과 함께 녹색 피가 뺨 한쪽에 잔뜩 튀었다. 역겨운 악취가 풍겨 왔지만 나는 눈 하나 깜짝할 수 없었다.

에녹이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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