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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81)화 (81/234)

“주교, 자네는 마거릿이 사라진 거라고 생각하나.”

“글쎄요. 그게 아니라면…….”

그게 아니라면 ‘죽었을지도’. 루제프는 거대한 타란툴라를 바라보며 말을 삼켰다.

루제프 역시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후자의 가정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거릿이 죽다니.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죽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는 안 된다.

“저건 발자국 아닙니까?”

루제프가 절벽 끝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어두워서 잘 분간은 되지 않았지만, 언뜻 보기엔 사람 발자국 같았다.

“크기를 보니까, 플로네 영애의 것 같습니다.”

루제프는 가만히 발자국을 눈으로 좇았다. 크기가 작은 발자국과 그것보다 큰 발자국이 있었다. 아마도 다른 하나는 카이든의 것이 분명해보였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루제프는 이 끔찍한 상황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 발자국을 가만히 노려봤다.

“……마물들과 전투를 벌인 것 같군요.”

죽은 타란툴라 방향으로 발자국이 나 있었고 굉장히 격렬히 움직인 흔적이 있었다.

발자국의 움직임을 따라 걸으며 루제프는 마지막으로 난 발자국이 절벽 끝에서 끝나는 걸 보았다.

자의로 움직인 것 같지는 않았다. 꼭 뭔가에 맞고 날아간 듯이 앞으로나 옆으로 오간 흔적 없이 딱 거기서 끝났다.

“보셨습니까, 전하? 이거 설마…….”

루제프는 황급히 절벽 끝에 쭈그려 앉아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득한 높이였다. 무언가에 맞고 날아가 아래로 처박혔다면 그대로 즉사했을 게 분명했다.

에녹은 루제프 옆에 서서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절벽 아래를 내려다봤다.

부스럭.

그리고 풀숲 쪽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저 바람소리인지 아니면 마물인지 알 수는 없었다.

루제프는 순간 소름이 끼쳐 에녹을 돌아봤다.

“전하,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 계속 있는 건 위험해요.”

그러나 에녹은 미동도 없었다. 그의 말을 듣기는 했는지 의문이 들었다. 루제프는 불안한 얼굴로 연신 뒤를 살폈다.

그러나 다행히도 바람 소리였는지 숲속에서 더 이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에녹은 여전히 절벽 끄트머리에 서 있었다. 루제프가 다가갔지만 그는 동요 한 조각도 없었다.

루제프는 마물의 사체가 있는 이곳에서 한시도 더 있고 싶은 생각이 없었으나 그렇다고 혼자서 돌아갈 자신은 없었다.

결국 그는 에녹의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 * *

마거릿이 사라졌다.

그녀가 자의로 떠난 것이든 사고를 당한 것이든 둘 다 그를 미치게 만들기 충분했다.

속이 뒤집혔다.

의문 모를 뜨거운 감정들이 주체할 수 없이 그의 가슴속에 용암처럼 흘러내렸다.

마거릿의 가방끈을 움켜쥔 그의 손이 잘게 떨렸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심장이 뛰어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를 잠식하는 무기력함에 질식해 버릴 것만 같았다.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옆에서 루제프가 그에게 말을 걸었지만,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거대한 강 너머 우거진 수풀 뒤로 커다란 산등선이 보였다. 산등선 위로 바라본 밤하늘엔 별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사이엔 어둑한 밤을 환히 밝히는 커다란 달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마거릿 같다.

‘내가 마거릿에게 미치긴 했나 보군.’

이젠 하다 하다 달을 보면서도 마거릿 생각을 하고 있다.

“솔직히 전하께서 왜 저와 결혼도, 약혼도 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전하께서 가지지 못한 걸 가졌잖아요. 순수 귀족 혈통이요.”

과거 마거릿이 그에게 했던 말이 에녹의 귓가에 맴돌았다.

“황태자가 되셨으니 더 중요하잖아요, 결혼은. 입지를 다져야 하니까. 플로네 공작 영애인 제가 전하를 좋아하는 걸 다행으로 여기세요.”

그가 늘 동경하고 갈망하던 고귀한 신분을 타고나서도 그런 식으로밖에 말할 줄 모르던 사람이었다. 과거의 마거릿은.

그를 좋아한다 말했으나 그를 대하는 그녀의 태도에는 그에 대한 존중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하긴, 그를 존중하는 사람이 지금까지 있기는 했던가? 아마 없었을 거다. 그래서 그는 완벽해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의 마거릿이라면…….’

이 섬에 와서 다시 만난 그녀는 그의 신분은 물론 자신의 신분마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지금의 그녀는 겉모습이 아닌 사람의 본질을 좇았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그가 찾고 있던, 고귀하고 강인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에녹은 미간을 좁힌 채, 마거릿의 얼굴을 떠올리다가 이내 괴로운 신음을 뱉으며 눈을 감았다.

“돌아 버리겠군.”

그는 가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사람 모두 살아 있을까요?”

루제프가 조용히 의문을 표했다.

“살아 있을 거야.”

에녹은 스스로에게 세뇌를 하듯이 중얼거렸다.

기대 섞인 얼굴로 에녹을 쳐다보다가 이내 빠르게 얼굴을 굳힌 루제프는 한숨을 내쉬었다.

에녹은 자리를 정돈하고 주변을 훑으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마거릿은 돌아올 거다. 아니라면 내가 이 섬을 모두 뒤져서라도 찾아낼 거니까.”

에녹의 중얼거림을 끝으로 그들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뒤를 돌았을 때였다.

언제 모여들었는지 절벽 주변으로 빼곡하게 사람 몸체만 한 거미들이 모여 있었다.

“으악!”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비명을 내지르며 루제프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스르릉.

검을 뽑아든 에녹이 긴장한 얼굴로 끝도 없이 몰려드는 마물을 훑었다.

“이참에 마물을 소탕하는 게 좋겠군.”

마물 소탕이라니. 루제프는 당황해서 고개를 들어 에녹을 쳐다봤다.

“저희 둘밖에 없는데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모여들었는지 몰라도 그들을 포위하며 다가오는 마물의 수가 엄청났다. 그리고 놈들은 수풀 사이로 꾸역꾸역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에녹이 찬찬히 주변을 훑으며 상황판단을 했다.

“저놈들이 어떻게 알고 모여드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버려두면 오두막까지 포위당할지도 모르겠군.”

에녹이 흘끗 고개를 기울이며 루제프를 돌아봤다.

“절벽에서 싸우는 건 위험하니, 자리를 이동해야 할 것 같은데. 그러려면 자극적인 미끼가 필요할 것 같다.”

“서, 설마 저더러……?”

루제프의 당황한 반문에 에녹이 웃음을 짓더니 검으로 자신의 팔뚝을 그었다. 루제프가 미쳐 말릴 새도 없었다.

“전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의 놀란 외침에도 에녹은 동요 없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마물 소탕이 모두 끝나고도 폭주가 멈추지 않는다면, 날 검으로 찔러서라도 기절시키게.”

그런 말을 남긴 채, 에녹이 움직였다.

‘검으로 잘못 찌르면 기절이 아니라 죽을 수도 있습니다!’

루제프는 에녹의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내적 비명을 질렀지만 자리에 굳은 채 움직이지는 못했다. 이미 에녹은 마물 사이로 사라진 뒤였기 때문이다.

에녹의 날카로운 검날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달빛을 받아 일순 반짝인 날은 빠르게 휘둘러졌다. 화려한 검의 궤적을 따라 마물들의 녹색 피가 분수처럼 흩어진다.

브레이크가 없는 사람처럼 에녹의 움직임은 멈출 줄 몰랐다. 그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에녹이 드디어 미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거릿이 돌아와야만 정신이 돌아오겠지.

루제프는 에녹의 광기에 압도되어 제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그가 마물을 도륙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이틀을 보냈다. 마거릿이 카이든과 함께 나타나기 전까지.

* * *

내 팔뚝을 휘감고 있던 은지가 훌쩍 뛰어 내려와 바닥을 기었다. 확실히 나보다는 이 녀석이 더 빨랐다.

‘세상에. 기는 게 더 빠르다니. 역시 마물이야.’

카이든도 그게 무척 신기했는지 은지의 뒤꽁무니를 빤히 바라보며 뛰었다.

“쟤도 자라나?”

카이든의 물음에 나는 은지를 따라 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라겠지?”

“그때 봤던 그 아나콘다 새끼가 맞다면, 그만큼 자란다는 거 아니야?”

그의 말에 나는 순간 소름이 돋아서 걸음을 멈췄다. 은지와 카이든이 동시에 자리에 멈춰 서서 나를 쳐다봤다.

“그런 말 하지 마. 은지는 그렇게 안 클 거야.”

내 말에 은지가 영문을 모르겠단 듯이 고개를 갸웃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라는 게 더 좋은 거 아니야? 키워서 훈련시켜. 다른 마물들을 얘가 잡아 줄지도 모르잖아.”

콰쾅!! 콰아앙!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굉음이 숲속에 울렸다. 나는 은지의 배를 만지작거리다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 빨리 다시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카이든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길해. 에녹이 설마 폭주한 건 아니겠지?’

나는 파도처럼 물밀 듯이 넘실거리는 불안감을 애써 잠재우며 뛰었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다가 우리는 어느 공터 앞에서 멈춰 섰다. 정확히는 숲속 한가운데 나무들이 전부 쓰러져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터였다.

공터에 빼곡하게 거미의 사체들이 널려 있었다.

진득한 녹색 피가 흙바닥에 진창 고여 너저분했다. 나는 황급히 은지를 주워 들었다. 녀석이 그 진득한 녹색 피 위를 지나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영문을 모르고 녀석이 혀를 내민 채로 나를 올려다봤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왜 자신을 가지 못하게 하는 거냐고 묻는 듯했다.

“대체 이게 뭐지……?”

카이든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기가 차다는 듯이 주변을 훑었다.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 들이닥친 악취에 나는 코를 틀어쥐었다.

“누구 짓일까?”

“누구 짓이겠어.”

카이든과 나는 같은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에녹.

이 정도로 마물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에녹밖에 없었다.

쾅!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전하! 그만하십시오! 위험합니다!”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는 디에고의 것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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