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74)화 (74/234)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화제를 전환했다.

“오두막으로 가던 중이었어?”

나를 빤히 바라보던 카이든이 곤란하다는 듯 제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어. 그런데 여기가 어딘지 알 수가 있어야지. 대충 절벽 위치로 가늠해서 움직이고 있긴 한데…….”

“나 얼마나 잠들어 있었어?”

“내가 일어났을 땐, 한낮이었어. 네가 너무 깊이 잠든 것 같아서 깨우진 않았고.”

카이든의 말에 나는 조금 전의 일들을 애써 잊었다. 그러고는 그와 함께 다시 걸음을 옮겼다.

“잘했어. 내 가방이라도 있었으면 위치 잡기가 쉬웠을 텐데 아쉽네.”

“그게 무슨 소리야?”

“섬 지도를 그렸거든. 그게 내가 메고 다니던 가방에 들어 있었고.”

어차피 찾지도 못할 거, 말해 뭐 하겠나. 폭탄은 오두막에 남은 게 있다지만, 조명탄은 아까워서 어떡하면 좋아.

“조명탄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거 하늘에다가 쐈으면 분명 오두막에서도 보였을 거야, 그치?”

내가 중얼거리자 카이든이 이미 잃어버린 걸 어떡하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떨어진 곳으로 추정되는 절벽은 근방에서 가장 크고 높아서 멀리서도 한눈에 보이기는 했다.

나는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바닥에 동선을 그렸다.

“카이든, 생각해 보자. 여기서부터 저 절벽까지의 거리가 5km라고 가정해 봤을 때 말이야…….”

카이든이 나를 따라 자리에 앉아서 내가 바닥에 적는 계산을 가만히 지켜봤다.

“킬로미터가 뭔데?”

‘제기랄, 계산법이 다르구나.’

나는 마거릿의 기억을 열심히 뒤적였지만, 마거릿은 수학에 영 관심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대충 얼버무려 설명을 이어 갔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의 거리와 시간을 계산해 보자는 거야. 만약 저 절벽이 우리가 떨어진 절벽이 아닐 수도 있잖아. 강의 반대편으로 왔을 경우라면 말이야. 그럼 우린 처음 장소로 다시 돌아가야 해.”

“효율성을 따져 보자는 거군. 이해했어. 내가 생각해 봤는데, 지금 강에서부터 여기까지 대략 3,000걸음 정도 이동해서 왔거든? 근데 태양의 기울기 각도를 보니 30분 정도 걸린 것 같아.”

나는 그가 이(異)세계 계산법으로 시간과 거리를 계산하는 걸 지켜봤다.

“절벽의 각도를 생각해서 시간 계산을 새로 해야 해.”

카이든이 흙바닥에 열심히 손가락으로 시간 계산을 시작했다.

“만약 저 절벽이 우리가 떨어진 절벽이 아닐 경우는 오두막까지 다시 돌아가는데 최소 이틀,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겠군.”

“그 절벽이 맞다고 쳤을 땐, 하루면 되겠지? 그럼 우선은 하루 치 식량을 구하는 게 좋겠어.”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은 우선 잘 곳을 찾아야 하고.”

카이든이 해가 기우는 것을 보며 내게 말했다. 나는 카이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에녹이 걱정하겠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내가 사라지자 에녹은 밤새 나를 찾아다녔었다.

이번에도 분명 그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나에 대한 불신을 완전히 지운 에녹은 헷갈리게 하는 법 없이 언제나 내게 호의적이었다.

“아무래도 이 섬에서 난 그대 없이 살 수 없을 모양이니.”

“그러니 마거릿, 난 네가 필요해. 그러니 부디 내 옆에 있어 줘. 떠나지 말고.”

나는 전에 에녹이 내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정말로 주인과 떨어지면 불안해하는 강아지처럼, 내가 없으면 정상적인 사고를 못 할 만큼 초조해했다.

“얼른 돌아가야겠어. 에녹이 기다리잖아.”

그런 말을 하며 멍하니 카이든을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마거릿.”

카이든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황태자가 좋아, 내가 좋아?”

뭔가 굉장한 질투가 섞인 뉘앙스라 나는 조금 의아했다.

“그런 걸 왜 물어봐?”

“궁금해서 그래, 응? 대답해 봐.”

카이든이 걸음까지 멈추고는 재촉을 하듯 내게 물었다.

“나는 루제프가 좋아.”

나는 구태여 장난스런 어투로 선택지에는 올라오지도 않은 사람의 이름을 언급했다. 그리고 그건 분명 가벼운 농담이었는데…….

“그 X새끼,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카이든은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심지어는 지나치게 화가 나 있었다. 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카이든을 쳐다봤다.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이든이 심각하게 내 어깨를 잡고 다시 물었다.

“그 새끼가 어디가 좋은데? 마거릿, 말해 봐.”

카이든의 예쁜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는 섬뜩하도록 붉은 눈동자가 불처럼 타오르는 걸 머저리처럼 멍하니 바라만 봤다.

“와……. 너한테는 농담도 못 하겠다.”

“뭐?”

카이든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썹을 까딱거렸다. 어휴.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잘못했다. 농담 같은 건 이제 하지 말아야지.”

카이든은 여전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가 다시 루제프 얘기를 꺼낼 낌새가 보여서 나는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절벽을 찾아가는 게 맞을까? 다른 지름길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를 빤히 노려보던 카이든은 머리를 헤집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절벽으로 가는 게 나아. 다른 길을 찾으려면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져. 그리고 절벽 위에서 네 가방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물속에는 없었지?”

“없었어. 적어도 내 눈엔 안 보였지.”

나도 카이든을 따라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정말 낙오자나 다름없는 신세네.”

하늘이 벌써 어둑해지고 있었다.

“제기랄.”

카이든이 다시금 욕설을 뱉었다.

우선 우리는 오늘 밤을 지새울 장소부터 물색하기로 했다. 다행히 오래 돌아다니지 않고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거대한 나무뿌리 아래로 몸을 숨길 공간이 있었는데, 오늘 밤은 그곳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아나콘다의 독가스로 기절한 우리를 루제프가 숨겨 주었던 장소와도 매우 비슷했다.

“이쪽 숲에는 이런 게 많네. 우리가 지내던 곳은 뿌리가 이렇게 밖으로 나와 있진 않았는데.”

나는 나뭇가지와 낙엽을 가져와 잠자리를 세팅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함께 자리를 깔던 카이든이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야. 꼭 구역마다 특징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

카이든의 대답을 듣고 나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처음 우리가 지내던 동굴 근처에선 늑대형 마물들만 등장했다.

그다음엔 아나콘다형 마물, 그리고 오두막 근처에선 타란툴라형 마물이 등장했지. 이게 과연 우연일까?

“마치 의도적으로 누군가가 그렇게 설정해 둔 것처럼.”

머릿속에 자꾸만 알레아란 이름이 맴돌았다.

“누가 우릴 가둬 놓고 실험이라도 하고 있다는 거야?”

‘실험’이란 단어에 민감한 카이든이 격정적으로 반응했다.

“그건 아직 모르는 거지. 우리가 찾은 단서라곤 ‘알레아’뿐이었는데.”

“그 망할 알레아. 내 눈에 띄기만 해 봐.”

카이든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알레아의 짓이라는 건 아직 확실치 않았다. 전부 추측일 뿐이지.

거기다가 원작이라면 죽었어야 할 내가 죽지 않아 어떤 변수가 생겼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미 많은 게 바뀐 것 같지만, 알 게 뭐야. 나도 살아야지.’

원작에 따르면 우리는 1년만 죽지 않고 버티면 섬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도 탈출 게이트가 열리는 위치조차 모른다는 거다.

유안나가 가진 열쇠라면 1년이란 긴 시간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늑대형 마물이 지내는 구역에서 오랑우탄 마물을 보지 않았어?”

내 지적에 카이든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게. 그놈이 돌연변이인가? 근데 걔 말곤 못 본 것 같기도 해.”

나는 심각한 얼굴로 카이든을 돌아보며 내가 생각한 새로운 가설을 내세웠다.

“원래는 마물의 서식지가 나눠져 있는데, 마물이 진화하고 있는 탓에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거라면 설명이 될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 앞서 말한 가설대로여도 말은 되지. 정해져 있는 마물 서식지가 있는 건 맞는데,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있다든가.”

“하긴, 다른 녀석하고 달리 그 오랑우탄은 꼭 지능이 있는 것처럼 사람을 찾으러 다니는 것 같았지.”

바위틈에 숨어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딱 그 앞에서 멈춰 섰었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다가 소름이 돋아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배에서 요란하게 꼬르륵 소리를 내며 허기를 알렸다.

‘일단 뭘 좀 먹어야겠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카이든의 단검으로 나뭇가지를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카이든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응? 뭐하려고?”

“사냥 준비.”

“이 밤에? 미쳤어?”

“미친 짓인 거 나도 알아. 근데 우리 어제부터 굶었잖아. 뭐라도 먹지 않으면 내일 움직이기 어려울 거야.”

내 말에 카이든은 반박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나와 함께 사냥 준비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통발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밤에 작살로 물고기를 낚는 데는 한계가 있을 거야.”

“통발이 뭐야?”

“물고기를 잡는 도구야. 내가 만들게, 넌 옆에서 도와줘.”

내 말에 카이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얌전히 통발을 만드는 걸 도왔다.

나는 완성된 통발을 들고 카이든과 함께 계곡을 찾아 나섰다.

냇물이 흐르는 소리를 들은 게 헛것은 아니었는지 머지않아 물이 흐르는 널찍한 계곡을 찾았다.

“일단 통발에 미끼를 넣어야 하니까, 작살로 물고기를 잡긴 해야 할 것 같아.”

한 가지 다행인 건, 오늘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는 점이다.

넓은 계곡이라 하늘을 가리는 나무도 없었고 달빛을 고스란히 받아서인지 그래도 시야가 어느 정도 확보가 됐다.

‘손전등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작살로 물고기를 낚으려는데 역시 손전등이 없어서인지 쉽지는 않았다.

두 시간즈음 흘렀을까? 낚시는 근성이라고, 그래도 작살로 미끼용 붕어를 한 마리 잡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내내 허탕만 치던 카이든이 내 손에 들린 손바닥만 한 붕어를 보고 기가 찬다는 얼굴을 했다.

“플로네 공작 가문에서 가르친다는 그 교육, 나도 좀 받고 싶어지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붕어를 기절시켜 미끼용으로 손질을 해 준 뒤, 통발 안에 넣었다.

“말했잖아, 난 괴짜였다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도 있는 법이야.”

카이든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라는 표현이 카이든을 납득시킨 모양이다.

“하긴, ‘그’ 플로네 영애가 생존 지식을 꿰고 있으리라고 누가 알았겠어.”

내가 계곡물 속에 통발을 집어넣는 걸 유심히 지켜보던 카이든이 중얼거렸다. 오해든 아니든, 아무렴 좋다. 그가 납득을 했으면 된 거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고갯짓을 했다. 돌아가자는 뜻이었다.

그리고 잠자리를 만들어 둔 장소로 다시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익숙하게 반짝거리는 걸 발견했다.

은빛을 띠는 새알이 나무뿌리 아래에 곱게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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