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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73)화 (73/234)

일단 알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도 말이 안 되지 않은가.

그러나 숲속에 놔뒀던 알이 절벽으로 옮겨 간 것도 설명할 수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못 본 척하자.’

나는 애써 시선을 회피하며 등을 돌렸다.

불 피울 대나무와 나뭇가지를 적당히 챙겨 카이든이 누워 있는 장소로 다시 돌아왔다. 자리를 잡고 불을 피운 뒤, 카이든의 상태를 수시로 살폈다.

다행히 심각할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인지, 열은 금방 내렸다. 카이든의 얼굴이 편안해진 걸 보며 모닥불이 꺼지지 않도록 수시로 불씨를 살폈다.

그때였다.

부스럭.

수풀이 넘어가는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단검을 움켜쥐고는 엉덩이를 들썩였다. 황급히 카이든을 돌아봤지만 그는 깨어날 기미도 없었다.

깨어난다고 해도 아픈 사람한테 싸우라고 할 수도 없고.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단단히 각오했다.

‘힘 쓰는 건 자신 없는데, 망했어.’

나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대충 닦아 내고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단검을 내리그을 수 있도록 자세를 취한 뒤, 천천히 소리가 난 수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아주 느릿하게 한 발자국 앞으로 몸을 옮기며 상체를 기울였다. 수풀 너머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반짝.

“아씨, 깜짝이야!”

달빛에 반사되어 뭔가 환하게 반짝이는 바람에 시력을 잃을 뻔했다.

그래, 시력을 잃을 뻔한 건 조금 지나친 표현이었고 아무튼 눈이 부셨다.

손등으로 눈을 비비적거리며 다시 물체를 확인해 봤더니, 조금 전에 숲속에서 마주쳤던 은빛의 알이었다.

여기가 아까 내가 나뭇가지를 주웠던 곳인가? 나는 두려움을 애써 덜어 내고자 조금 더 과장된 몸짓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아까 나뭇가지를 주웠던 곳이 아니다.

그땐 분명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었는데 여긴 카이든이 잠든 곳 바로 앞이잖아.

“……소름 돋게 왜 그래.”

나는 알을 들어서 숲속 깊숙이 들어가 땅에 내려놓고 나뭇잎으로 덮었다. 혹시라도 짐승을 만나 먹히면 얘도 곤란할 테니까.

“그런데 진짜 마물 알이면 어떡하지?”

하지만, 카이든의 말대로 이 녀석이 내게 공격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실낱같은 예감이 들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감이었다.

가장 큰 예로, 카이든에게는 접촉을 거부했던 녀석이 내 손길은 받아들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어쩐지 알이 정말 꿈틀거린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너, 따라오지 마.”

검지를 세운 채, 짐짓 엄한 투로 알을 향해 말하다가 밀려오는 허탈감에 그저 웃고 말았다.

“내가 드디어 미친 모양이야.”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나뭇잎에 알이 잘 가려진 건가 마저 확인하고는 다시금 자리로 돌아왔다.

다행히도 동이 틀 기미가 보였다. 드디어 아침이 오고 있었다.

“하아……. 엿 같은 밤이었어.”

나는 하얗게 밤을 불태우고 피곤한 얼굴로 커다란 나무기둥에 늘어져 앉았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 해가 떠올랐다. 나는 그제야 안심을 하고 모닥불을 껐다. 아마 금방 더워질 게 분명했다.

‘피곤해 죽을 것 같아.’

나는 아직도 깨어나질 못하고 있는 카이든을 보며 끔뻑끔뻑 졸았다.

차차 점멸하던 시야가 끝내는 까마득하게 암전되고 말았다.

* * *

몸이 흔들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가 이동하고 있었다. 나는 너른 등판에 업혀 있었다.

고개를 슬쩍 들어 보니 눈부신 은발이 눈에 들어왔다. 카이든이다.

“깼어?”

내가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카이든은 내가 깨어난 걸 금방 알아차렸다.

나는 그의 등에 업힌 채로 주변을 살폈다. 강에서 멀리 떨어져 숲 깊숙이 들어온 듯했다.

“내려 줘.”

그가 죽을까 봐 그를 열심히 간호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그를 원망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내 단호한 대답에 카이든이 조용히 반박했다.

“그냥 업혀 있어. 너 지금 걷기엔 몸이 안 좋아.”

“병 주고 약 주는 거야? 이렇게 만든 건 너잖아.”

카이든은 할 말이 없었는지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잠들어 있을 땐 괜찮았는데, 그가 깨어난 걸 보니 속에서부터 화가 들끓었다. 어쩌면 그간 꾹꾹 눌러 담아 감춰왔던 것들이 터져 나온 게 분명했다.

서러웠다. 내가 하지 않은 짓들로 이곳 사람들이 나를 오해하고 불신하는 게.

그럴 만하다는 이유로 애써 담담한 척 해 왔지만, 사실 나도 내게 벌어진 이 모든 상황을 감당하는 게 버겁고 힘들었던 거다.

‘그럴 만하다니……. 그럼 나는? 나는 이대로 괜찮은 걸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미안해.”

그리고 그때 카이든이 내게 사과를 건넸다.

“전부 다. 그러니까 울지 마.”

나는 괜찮았다.

분명히,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이든의 이어지는 뒷말에 그만 울음이 터져 나오고야 말았다.

조용히 카이든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간의 설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의 옷자락이 젖어 가고 있었지만, 내가 알 게 뭐야.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남 앞에서 울어 본 것이.

카이든이 걸음을 멈추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자리를 서성거렸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한참을 그렇게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훌쩍.

“다 울었어?”

코를 훌쩍이자 카이든이 그제야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은 하지 않고 얌전히 그의 등에서 내려왔다.

카이든이 나를 돌아봤다.

“미안해.”

그가 다시 한번 내게 사과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내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미안해, 마거릿. 응?”

눈물이 여전히 흐르고 있는 중이었던가 보다. 그가 손을 뻗어 엄지로 내 뺨 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냈다.

훌쩍.

나는 여전히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코를 훌쩍거렸다.

‘제기랄, 무슨 비련의 여주인공 같네.’

“서럽게도 운다.”

카이든이 계속해서 고개를 숙인 채 내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 있다가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그의 눈을 마주봤다. 펑펑 울어서 눈도 붓고 벌개서 아주 못나 보일 것 같지만, 그게 뭐가 중요해.

“의심해서 미안해.”

카이든이 양손을 뻗어 내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나는 하도 울어서 몽롱해진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애초에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어.”

나를 가만히 바라보는 카이든의 핏빛 눈동자가 짙어졌다.

“마거릿.”

그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날렵한 턱 선이 눈에 들어왔고, 그의 눈동자만큼이나 붉은 입술에 시선이 고였다.

“난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널 구하다가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홀린 듯이 그를 쳐다보다가 나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러곤 미간을 좁히고 그에게 반문했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해? 그거 고백이야?”

“고백?”

카이든은 영문을 모르겠단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그렇지.

“아니, 됐어. 날 구하다가 죽는 짓 같은 건 하지 마. 나더러 평생을 죄책감 가지고 살라는 거지? 이젠 날 괴롭히는 방식을 바꾸기로 한 거야?”

“그게 아니라…….”

당황한 얼굴을 한 카이든이 말끝을 흐렸다. 나는 끝내 말을 끝맺지 못하는 그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나를 의심했던 건, 그래. 이해해. 하지만 덕분에 죽을 뻔한 건……, 모르겠어.”

죽다 살아나서 나도 멀쩡한 정신은 아니었다. 이성적 판단이 어려웠고 자꾸만 감정적인 말이 앞섰다.

‘하긴, 이 섬에서 이성을 유지할 만큼 제정신이면…… 그게 더 이상한 것 아닌가?’

나를 보던 카이든이 착잡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아. 용서는 말보단 행동으로 구할 테니,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카이든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깜짝 놀랄 정도로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의 말과 표정은 그를 만난 이래로 그 어떤 순간보다 진지했다.

늘 과장된 태도 속에 본의를 숨겨왔던 그가 처음으로 꾸밈없이 진심을 말했다.

그의 마음이 뜨겁게 흘러넘쳐 천천히 내게로 고였다. 가슴 속 깊이 들끓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들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의심해서 미안해.”

“애초에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어.”

“난 네가 살았으면 좋겠어. 널 구하다가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조금 전까지 눈물을 흘려서 퉁퉁 부운 눈두덩이를 매만졌다. 사실 나는 이미 그를 원망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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