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들과 외딴섬에 갇혀버렸다 (72)화 (72/234)

* * *

카이든은 마법사 로브를 벗어 말리듯 나뭇가지에 걸어 둔 뒤, 기절해 있는 마거릿의 상태를 다시 살폈다.

밤중에 모닥불을 피우는 건 위험했지만, 이대로 뒀다간 체온이 떨어져 죽을지도 몰랐다.

“가방이…….”

그러고 보니 마거릿이 메고 있던 가방이 사라져 있었다. 아마도 거미의 다리에 튕겨 나올 때, 끈이 끊어진 모양이다.

마거릿은 가방에 든 물건들을 자기 목숨처럼 챙겨 다녔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절망할지 모르겠다.

“……우선은 살기나 해야지.”

카이든은 마거릿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맥박을 확인했다. 맥박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의 목에 가져다 댄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긴장이라도 한 건지, 아니면 절벽에서 떨어진 충격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그녀가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다행히도 그녀의 맥박은 정상적으로 뛰고 있었다.

“하아.”

물밀듯이 안도감이 밀려왔다.

마거릿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던 그 순간의 감정을 카이든은 결단코 잊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젠장, 마거릿. 제발 눈을 좀 떠 봐.”

카이든이 고단한 얼굴로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간절히 애원했지만, 그럼에도 마거릿의 감긴 눈꺼풀은 미동도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마거릿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목구멍을 타고 뜨거운 감정들이 너울대며 올라왔다.

마거릿은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굴었지만, 사실 그들 중 누구보다 자신의 목숨을 하찮게 여겼다.

위험이 닥치면 망설임 없이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으니까.

지난번 아나콘다를 해치웠던 사건도, 그리고 조금 전의 일들도 마찬가지다.

그를 방패삼아 목숨을 부지해도 됐을 텐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카이든은 마거릿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변했다는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려운 그녀의 성격과 말투, 그리고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노련함.

그조차도 본 적 없는 언어를 알아보고 읽는 점과 기이한 마도구를 익숙하게 다루는 점.

함께 모여 있을 때면 그녀를 우선적으로 공격하려고 드는 마물들. 그러나 어쩐지 그녀에게만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수상한 마물의 알.

그녀는 특이했다.

게다가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그의 귀걸이의 비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귀걸이를 만든 사람을 안다고 했었던가. 의심스럽지만, 진위여부를 당장에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녀가 부러 그에게 자꾸만 육체적 노동을 시키는 이유를 그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는 누구보다 눈치가 빠른 사람인데.

무엇보다 가장 이상한 건, 카이든 그 자신이었다.

그녀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녀에게 완전히 젖어 들고 말았으니까.

수상쩍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 대한 호감을 숨기지 않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의 시선 끝에는 늘 마거릿이 있었다. 그 이유가 그녀를 향한 불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내 잘못이야. 내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그는 감정을 삼켜 냈다.

그녀를 절벽까지 불러내지만 않았더라면, 아니 애초에 그녀를 의심하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위험해지는 일도 없었을 거다.

엄지손가락으로 조용히 마거릿의 차디찬 뺨을 매만졌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게 생명력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죄책감이 숨 쉬기 버겁도록 깊은 무게를 담고 그를 짓눌렀다.

“좋아하지도 않을 상대에게 그런 이상한 말 하는 거 이해해. 귀걸이 때문이잖아.”

카이든은 마거릿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로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마거릿은 그녀를 향한 그의 뜻 모를 호감마저도 ‘귀걸이가 고장 난 탓’이라며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처음부터 그가 그녀에게 신뢰를 보인 적이 없었으니까.

그 자신조차도 경멸해 마지않던 마거릿 로즈 플로네에게 어쩌다 호감이 생긴 건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마거릿이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자신이 대신 다치고 위험에 빠지더라도 마거릿만은 구하고 싶었다.

카이든은 그녀를 향해 남아 있던 일말의 의심마저 완전히 거둬들이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녀가 가진 비밀 따위가 아니라, 이 원인 모를 감정과 혼란이 어디서부터 오는 것인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부터 본능이 따르는 대로 행동하고 말하기로 했다.

* * *

내가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는데 다소 숨이 막혔다. 시야가 또렷하게 회복된 뒤 처음 눈에 들어온 건 단단해 보이는 맨 가슴팍이었다. 놀라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달빛에 반짝이는 새하얀 은발.

상의를 탈의한 남자가 미간을 좁히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으음.”

카이든이다.

아니 근데 얘는 왜 여기서 상의 탈의를 하고 있는 거야?

그러고 보니 밤중이라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물에 젖은 상태여서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아, 혹시 그래서인가? 체온을 올리려고? 그런 것치고 오히려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건 카이든이었다.

조심스레 그의 이마에 손을 얹어 보았다. 열이 나고 있었다.

나는 젖은 드레스를 그대로 입은 채였는데 카이든은 체온을 올리겠다고 상의를 탈의한 채 나를 끌어안고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제기랄.”

이런 상황에 감기까지 걸리다니. 아주 큰일이다.

‘크로스백에 상비약을 챙겨 놨는데.’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가방을 찾았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가방으로 보이는 건 없었다.

“설마…….”

강에 빠진 건가?

조명탄이랑 폭탄은 물에 젖으면 답도 없었다. 그냥 고물이 되어 버린다는 뜻이다.

“망할!”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카이든은 열이 좀 내려야 할 것 같은데.

다시금 그의 이마에 손을 얹어 열을 체크한 뒤, 불을 피워야겠단 결심을 굳혔다.

야밤에 불 피우는 게 좋은 방법은 아니겠지만, 이러다가 카이든이 저체온으로 죽으면 그건 더 심각한 문제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항상 네게만 예외가 생기잖아.”

“계속 이상했어. 그런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거든. 마거릿, 대체 네가 숨기는 게 뭔지 말해.”

“또 혼자만 도망가려고? 넌 도망칠 생각뿐이지? 처음부터 우릴 버릴 생각이었잖아.”

나는 타란툴라가 나타나기 직전까지 카이든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카이든이 나를 의심하는 이유는 무척 타당했다.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나도 그랬을 테니까.

그가 내게 ‘호감 있는 척’ 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는 것과 확인 사살을 당하는 건 다른 문제다.

그래, 소설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유안나지.

내가 조금 변한 모습을 보였다고 남주들의 태도가 바로 바뀔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조금 씁쓸하긴 해도, 그게 현실인걸.

나는 쓸데없는 상념을 접고 다시 상황 파악을 했다. 지금은 불 피우는 게 우선이다.

“하. 젠장, 지포 라이터도 가방 안에 있는데.”

그게 있었으면 불을 조금 더 수월하게 피울 수 있었을 거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카이든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단검을 뽑아들었다.

나뭇가지에는 카이든이 걸어 둔 건지, 그의 셔츠와 마법사 로브가 널려 있었다. 나도 드레스를 벗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너무 찝찝해.’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카이든 앞에서 알몸으로 있을 수는 없으니, 축축한 드레스를 입은 채로 나뭇가지 가까이 다가갔다.

셔츠는 다 마른 듯했고 망토는 아직 젖은 부분이 있었지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듯했다.

나는 카이든에게 다시 옷을 입혀 준 뒤, 이불처럼 로브를 덮어 주고 몸을 일으켰다.

우리가 누워 있던 곳은 강가에서 멀지 않은 숲속이었다. 거대한 나뭇잎으로 둘러싸인 요새 같은 장소였는데, 이런 데는 또 어떻게 찾은 걸까.

나는 일단 주변을 둘러보며 불 피울 나무를 찾았다.

한참을 그렇게 돌아다닐 때였다. 시야에 새하얀 무언가가 반짝였다.

설마, 또 마물은 아니겠지?

나는 겁을 먹고 침을 꼴깍 삼켰다. 긴장돼서 맨손을 펼쳐 주먹을 꼭 쥔 뒤,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조금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마물이 아니라 주먹만 한 알이었다. 은색이어서 그런지 달빛을 받으니 아주 예쁘게 반짝였다.

너무도 익숙한 모양새다.

절벽에서 본 것과 비슷하게 생겼다. 카이든과 나를 지금 이 지경으로 만든 최초의 원인인 바로 그 의문의 알 말이다.

“……설마, 아니겠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