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물을 정수하러 다녀왔다.
그런데 내가 오두막을 비운 사이 아스달이 미친 듯이 나를 찾았다고 한다.
보나 마나 또 뭘 해 달라 조르려고 찾은 거겠지. 아니면 사냥을 가자고 하는 거거나.
“귀족 영애가 작살로 물고기 사냥하는 진귀한 구경을 또 어디서 해 보겠나. 내일도 함께 냇가에 다녀오지.”
나는 지난밤 아스달이 했던 어처구니없는 말을 떠올렸다.
내가 또다시 지뢰달이랑 사냥을 나가면 인간이 아니지. 지뢰는 피하라고 있는 거다.
난 진저리를 치며 정수한 물을 담은 코코넛 통을 주방 테이블 위에 올려 뒀다. 그러곤 벽난로 앞에 앉아 있는 루제프에게 물었다.
“그래서 저를 그렇게 미친 듯이 찾으셨다던 아스달 저하께선 어디 계시는데요?”
“그게…….”
앉아서 양치를 하던 루제프가 당황한 얼굴로 눈을 굴렸다. 마물의 잔해를 마저 치우고 내려오는 길인지 2층 계단을 타고 내려오던 에녹이 내게 말했다.
“산책 갔다.”
“산책이요……?”
이 숲은 위험하다고 호들갑을 떨어 대던 놈이 혼자서 산책을 갔다고?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거야.”
“네……?”
에녹이 너무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얘기해서 나는 더 이상 묻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이상한데.
그때, 카이든이 박장대소를 하며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푸하하하! 야, 따까리! 밖에 봤어? 왕세자가 왜 나무에 올라가 있냐? 못 내려오던데!”
나는 그가 한 말을 듣고 에녹을 돌아봤다.
“산책 갔다면서요?”
“…….”
“저하께서 나무에는 왜 올라가신 건데요?”
내 기억에 아스달은 고소 공포증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왕궁에서도 그의 방은 높은 층이 아닌 1층 아니면 2층가에만 있었던 걸로 안다.
“너를 하도 찾기에…… 네가 있는 위치를 알려 줬을 뿐이다.”
에녹이 내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제가 나무에 왜 있는데요.”
“…….”
“그리고 아스달 저하께서 그걸 믿었다고요? 그 고상을 떠는 왕자님께서 그 말만 믿고 나무를 탔다는 게 말이 돼요?”
“말이 안 되긴 하지.”
우리의 대화를 듣던 카이든이 내게로 다가왔다. 그가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곤 에녹을 보며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웃음 지었다.
“아스달 왕세자 성격에 거길 스스로 올라갔겠어? 누가 기절이라도 시켜서 올려놓지 않는 이상.”
“……시끄러워서 그랬다.”
에녹이 결국 자신의 범행을 얌전히 시인했고, 나는 황당해서 그를 쳐다봤다.
아스달을 기절시켜서 나무 위에 올려다 놨다고? 대체 왜?
“식사를 하기 전까진 너를 귀찮게 찾는 일은 없을 거니, 좀 쉬어라.”
에녹은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대답한 뒤,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사냥을 다녀오겠다며 검을 챙겨 들고 휭하니 나가 버렸다.
* * *
결국 늦은 오후가 되어서야 아스달은 땅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난동을 부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높은 곳에서 공포를 이겨 내는 데에 기력을 다 썼는지 내려오자마자 곧장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벽난로 앞에 누워 웅크리고 자는 모습은 조금 안쓰럽기까지 했다.
내일은 드디어 유안나가 깨어났다는 장소에 정탐을 가기로 한 날이었다. 출구 열쇠라는 중요한 단서가 발견된 곳인만큼 신중히 탐색해야 할 것이다.
나는 몇 번이고 가방을 점검하며 모든 준비를 미리 끝내 두었다.
“마거릿.”
오두막 입구에 서 있던 카이든이 나를 불렀다.
“네가 봐 줬으면 하는 게 있어.”
나는 크로스백을 어깨에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아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봐 줬으면 하는 거?”
“전에 봤던 동그란 알 기억해? 은빛으로 된, 새알처럼 생긴 거 말이야.”
에녹, 카이든과 버섯을 따면서 발견했던 작은 새알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그게 왜? 그거라면 숲속 깊이 놔두고 오지 않았나? 설마, 그거 진짜로 마물 알이었어?”
내 놀란 물음에 카이든이 어깨를 으쓱이며 열린 문밖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고. 직접 봐 봐.”
마침 오두막에는 에녹도 루제프도 없었다. 함께 가면 좋았을 텐데.
하는 수 없이 나는 카이든과 둘이서만 움직였다.
앞서가는 카이든의 너른 등짝을 보고 있는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왔다.
나는 크로스백의 겉면을 매만졌다. 조명탄과 수류탄이 잘 들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어디까지 가야 해?”
“절벽 쪽에서 봤어.”
카이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높직한 나무들이 전부 사라지고 시원하게 시야가 뚫렸다. 마침 절벽에 다다른 것이다. 나무 사이로 널따란 강이 펼쳐졌다.
카이든이 이윽고 절벽 앞에서 멈춰 섰다. 그가 절벽 바로 앞에 있는 동그란 알을 가리켰다.
“이거 봐.”
알은 지난번에 봤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분명 손가락만큼 작은 알이었는데, 지금은 카이든의 주먹 정도 되는 크기로 성장한 것 같다.
나는 절벽 끝에 아슬아슬하게 자리 잡은 새알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보라고 한 건, 알 말고 그 밑부분도 한 번 봐봐.”
카이든이 알 밑에 둥지처럼 깔린 꽃들을 가리켰다.
특이하게도 꽃들이 전부 목이 꺾여 시들어 있었다. 꼭 알에서 독가스가 뿜어져 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물의 알인가 본데?”
“그때 봤던 그 알인 것 같은데, 성장했어. 그리고 위치도 계속 바뀌는 게 이상해. 네가 가져다 놨던 곳은 여기가 아니잖아.”
카이든의 말에 나는 턱을 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여기가 아니지.”
숲속 깊숙이 들어가 나무 사이에 내려놓은 게 기억난다. 이런 절벽까지는 오지도 않았다. 아니, 애초에 동일한 알인 건 맞나?
“그리고 가장 이상한 부분은 따로 있어. 너, 그때 이 알 만졌잖아.”
“어…… 그렇지?”
“나는 만질 수가 없거든.”
카이든이 그렇게 말하며 알을 향해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알에서 갑자기 검은 연기가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는 알 주변을 감싸며 다소 공격적인 형태로 일그러졌다.
카이든의 손이 연기에 살짝 닿자 스파크가 튀었다. 그가 황급히 손을 뺐다.
“괜찮아?”
난 놀라서 그의 손을 잡았다. 카이든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웃었다.
“괜찮아. 봤지? 알이 나를 거부해.”
“하지만, 그때 봤던 그 알이 아닐 수도 있잖아.”
“아니야, 그때 그것과 기운이 비슷해. 마력이 없어져도 희미하게 흐름이나 기운을 느낄 수는 있거든.”
카이든은 단호하게 내게 말한 뒤, 한 가지 제안을 했다.
“한번 손 대 볼래?”
“어?”
“괜찮아. 날 믿어 봐.”
카이든은 그답지 않은 매우 진지한 얼굴로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그를 잠시간 마주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알에서 풍기는 검은 연기는 사그라진 채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마법사가 하는 말이니까, 괜찮겠지?
나는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은빛의 새알 위로 손을 얹었다.
“어?”
카이든의 말대로 나는 알을 만질 수 있었다. 방금 전에 보았던 공격적인 검은 연기는 나오지 않았다.
“왜 너만 받아들이는 거지?”
반질반질한 알을 만져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카이든이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글쎄. 모르겠어.”
나도 영문을 모르겠어서 정말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런데 한참 그렇게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카이든과 눈이 마주쳤다.
“카이든?”
“아무래도 이상하지. 항상 네게만 예외가 생기잖아.”
나는 순간 섬뜩한 기분에 두어 발자국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나 카이든은 내가 멀어진 만큼 가까이 다가와서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가 턱을 괴고는 내게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왜 마거릿 너는 되는데, 나는 만질 수 없을까? 귀걸이가 고장 난 탓에 마력의 흐름이 고여서 그런가? 내 안에 흐르는 파장이 이상해서? 그런데 그건 마거릿 네가 시키는 대로 해서 원활하게 흐르기 시작했거든.”
카이든의 말에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사실 나도 마력의 흐름을 뚫어 주는 방법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게 아니었다.
현자라고 불리는 대마법사 카이든도 모르는 건데,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러게. 나도 육체적 노동으로 에너지를 순환시키면 자연스레 마력도 순환한다는 사실만 알지. 왜 그렇게 되는지 정확한 이유까진 몰라.”
나는 턱을 괴고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원작에는 ‘육체적인 힘’을 소비해야 한다고만 나왔지 그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그리고 육체적 관계가 아닌, 노동으로도 마력의 흐름이 제어 가능하단 사실을 발견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런데 그게 이 새알을 만지는 것과 정말로 상관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연관은 없을 것 같은데. 카이든답지 않게 요지를 잘못 잡았다.
그는 갑자기 이 얘기를 왜 꺼낸 걸까.
그러다가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내가 카이든에게 노동을 시키는 게 마력의 흐름을 원활하게 순환시키기 위해서였다는 걸, 얘기한 적이 있었나?’
없었다. 그런 얘기를 카이든에게 직접적으로 들려준 적은 없었다.
순간 소름이 돋아서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내가 이 말을 왜 했는지, 너를 여기에 왜 데려왔는지, 눈치챘어?”
내 표정을 본 카이든이 미소를 지었다.